작가: 장호준 (aqualux199)

 

        -= IMAGE 1 =-

        ▲ 트럼펫 피쉬 NikonosV 에 확대튜브를 앞에 달고 찍었다.(수심7 미터 )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다. 

        사이판 오비쟌 비치.        

        ⓒ 장호준

 

        -= IMAGE 2 =-

        ▲ 달고기 (수심20미터)

        다른고기에 비해 거리를 주고 체형이 아름다와 사진에 많이 노출되는 고기이다.
        ⓒ 장호준

 

        -= IMAGE 3 =-

        ▲ 동해영덕 (수심2미터)

        때로는 얕은 수심에서 맑은물을 만나기도 한다. 
        ⓒ 장호준

수중사진촬영대회 장소는 서귀포 앞 바다였다.

우리는 서귀포 항구 옆에 있는 숙소에 짐을 풀었다.

전국의 '찍사'(수중사진 찍는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그동안 다이빙 포인트에서 간간이 보았던 찍사들은

다이빙 가방 옆에 그보다 더 멋지고 육중한, 하드케이스로 만든 카메라 가방을 들고, 

카메라 가방에는 각종 다이빙 관련 업체들의 스티커가 붙어 있었고,

몇몇 가방에는 해외다이빙을 증거하는 항공화물 태그가 그대로 붙어 있었다.

해외여행도 자랑이던 시절이었다.

P와 나는 다이빙 가방 하나를 달랑 맨 단출한 모습으로 이들 무리에 합류했다.

육상 사진을 찍을 때도 나는 그 많은 사진 공모전에 한 번도 출품하지 않았었다.

공모전 자체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진을 찍는 것은 단지 내 인생을 위한 취미일 뿐이라고 정의해 놓았기 때문이다.

나는 교만한 독립군이었던 것이다.

물론 경쟁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냐는 물음에 부정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런데 나는 오늘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이 대회에 출전하게 되었다.

그것도 내 개인화기도 없이,

이것은 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장비를 숙소에 풀어놓고 P와 나는 항구로 내려갔다.

여기는서귀포, 다이빙의 고장이다.

연산호의 세계적인 군락지요,

한국인들이 그리워하고 존경하는 남쪽나라다.

우리는 그 바닷 바람을 쏘이며 항구를 돌아 봤다.

"니는 카메라 안 할래?"

P를 보고 내가 물었다.

P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내 물귀신 작전의 의도를 알아 차린 것이었다.

"니 하는 데 내까지 하믄 되겠나?"

"와?"
"나는 모델 해야 될 꺼 아이가, 임마."

그는 슬쩍 내 말을 비켜 나갔다.

그는 감정에 휩쓸려 칠락팔락 하는 나완 달랐다.

그는 속으로 카메라 값을 계산하고,

기종을 비교하며,

자신이 진정으로 카메라를 원하고 있는지를 자문하고 있는 것이 틀림 없었다.

나는 아니꼬운 마음에 혀를 찼다.

"쳇!"

그러나 그는 모델도 얼마 못하고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났다.

저녁에는 세미나가 있었다.

미국과 일본에서 온 수중 사진가의 발표도 있었다.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으나 내가 육상에서 경험했거나 혹은 책에서 읽은 원론적인 이야기라서 흥미롭진 않았다.

우리가 참가한 이 대회만 하더라도 사진 기술로 우열을 가리는 대회는 아니었다.

사진도 하나의 창작이었고 이는 순전히 개인의 능력에 달린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저녁을 먹기 위해 일행들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수중사진 클럽을 만들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거기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건성으로 찬성을 했다.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거기에 꼭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곧 전광석화와 같이 발기인 대회가 열렸다.

이는 몇몇이 주동해 사전에 여러 가지 작업을 해 놓았기 때문에 얻은 결과였다.

"수중사진클럽을 만들면 존나?"

나는 육상사진 클럽에서 활동을 하며 전시회도 몇 번 해 봤다는 사람에게 물었다.

"아무래도 도움이 되지요. 다이빙 함 간다 캐도 돈 도 적기(적게) 들고, 특히 전시회는 혼자선 몬 합니더. 모이면 서로 알고 있는 기술도 가르쳐 주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도랑치고 가재 잡는 거지 뭐."

촬영대회가 시작됐다.

선수들은 협회 측에서 내어준 세 통의 포지티브 필름의 첫 장에 자신의 얼굴을 박아 넣었다.

협회 측에서 기념품으로 돌린 대회로고가 박힌 흰 티셔츠를 입은 선수들은 자신에게 배정 된 배를 타고 자신이 결정한 장소로 이동해서 금·은·동을 건지러 물 속으로 들어갔다.

우리 팀은 처음 참가하는 사람들을 위해 문섬의 새끼섬을 한 바퀴 도는 행사를 가졌다.

어디에 어떤 고기가 있는지도,

조류와 지형이 어떤지를 모르고는 사실상 촬영은 공염불 이었기 때문이었다.

테스트 다이빙이 시작됐다.

모두 물로 뛰어 들고 대오를 정비한 후 S가 앞장을 섰다.

곧 그의 여자 허리통만한 허벅지가 물살을 가르기 시작했다.

S도 P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체격이 좋았다.

새끼섬을 왼쪽 어깨에다 붙이고 섬을 한 바퀴 돌기로 한 것이다.

수로를 벗어나 섬 바깥 쪽으로 나가서 수심 20m를 유지하며 앞으로 나갔다.

그러나 우리는 곧 조류에 막혀 버렸다.

도저히 헤쳐 나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숨이 턱으로 차올랐다.

'나 혼자라도 돌아가야 하는가'라는 갈등의 순간,

S가 발길을 돌렸다.

"카메라까지 rk지고 들어 갔다면 큰일 날 뻔 했잖아."
"조류와 맞서지는 마이소, 바보 같은 짓입니다."

두 번째, 우리는 반대편 코스를 택했다.

니코노스 V에 28mm 렌즈를 장착한 카메라를 들고,

P와 함께 들어간 나는 정작 카메라를 들이댈 곳을 찾지 못해 애를 먹었다.

S의 말 마따나 P의 키 183cm를 28mm 렌즈에 구겨 넣긴 아무래도 힘들었다.

내가 구상한 구도로는 아무래도 사진이 힘들었던 것이다.

할 수 없이 나는 남들이 무엇을 찍나 유심히 관찰하다가 그 흉내를 내는 수밖에 없었다.

촬영대회는 내게 또 다른 물의 속성을 알게 해 주었다.

수중 카메라가 내게 한 발짝 앞으로 성큼 다가서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알지 못했고 내가 관심을 두지 않았던 세계가 현실적으로 와 닿는 순간이었다.

바다는 그 온갖 것들을 포용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 것이었다.

"바다가 왜 바다인 줄 아능교?"
"글쎄?"
"바다는 모든 것을 다 바다(받아)들인다고 바답니더."

그러면서 사부인 S는 이렇게 덧붙었다.

'바다에 이 세상 모든 물(혼탁한 물, 맑은 물, 찬물, 더운물)들이 모이는 이유는 바다가 가장 낮기 때문에 그렇다'는 뻔한 소리를 하면서

'우리도 물로 들어갈 때는 낮은 모습을 보여야 하며 자세를 낮추면 사람이 모인다'는 다소 차원 높은 이야기도 곁들였다.

대회가 끝나고 한 달쯤 흘렀나?

S의 다이빙 숍에 들른 내게 S는 촬영대회 입상소식을 알려 줬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울러 그는 곧 수중사진클럽의 발기인 대회가 있다면서,

클럽이 왜 필요한가를 조목조목 역설하고 나서 내게 거기에 출석할 것을 명령했다.

"카메라도 없는데?"

S는 코웃음을 치더니 캐비닛에서 카메라 한 대를 꺼내 내 앞에 놓았다.

그러면서 그는 "공짜 아니고 외상"이라면서 돈이 되는 즉시로 갚으라고 주문했다.

산다는 것이 무엇을 한다는 것이고,

다이빙을 한다는 것도 다이빙 외에 무엇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꼭 신체를 사용해서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날 이후 나는 많은 갈등에 시달렸다.

내가 당시에 산 렌즈는 35mm 뿐이었다.

이는 수중에선 육상의 55mm와 같은 표준렌즈였다.

동해안에서 이 렌즈를 사용해서 내가 바라는 사진을 찍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도무지 카메라에 들이 댈 주제를 찾기도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카메라 매뉴얼 북 하나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이었다.

쓰레기통에 인화한 사진들이 쌓여 갈수록 내 고민도 깊어졌다.

갈 길은 먼데 나는 답보 상태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다에 떨어져 고개를 박으면 시야가 나를 거부했고,

창을 잡으면 창이 나를 밀어 냈다.

 

창과 카메라 사이에서 갈등하는 나날이 많아졌다.

나는 새로운 정보와 기술에도 목 말랐다.

클럽이 돌파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 다음편에 계속됩니다.

물 속에서 찍은 사진 250장이 날아가다

작가: 장호준 (aqualux199)

 

              

           ▲ 사진촬영하는 다이버

           물고기 사진을 찍기 위해 급히 Nkonos 카메라의 거리계를 급히 조정하고 있다.

           그 앞엔 볼락 새끼 한마리가 다이버에게 호기심을 보이고 있다.

           ⓒ 장호준

 

대부분의 다이버들이 물에 들어가는 이유는 수중사냥의 매력에 이끌려서다.

그물이나 낚시처럼 보이지 않는 상대와의 대결이 아니라 물고기와의 일대일의 대면대결이 이들을 흥분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메라도 있다.

 

1943년 6월,

스쿠버다이빙의 아버지라 불리는 잭 이브 쿠스토에밀 가냥과 함께 스쿠버 장비를 만들었다.

그리고 당시 이탈리아군에 의해 점령 당해 있던 프랑스의 한 작은 포구에서 처음으로 이 장비를 실험하러 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장비를 실험하며 동굴의 천정에 붙어 있던 바다가재도 잡아 나왔다.

그는 1910년 6월 11일 프랑스에서 태어나 1997년 6월 25일,

87년의 생을 마감할 때까지 바다와 함께하며 바다에 관한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바다에서 인간의 생존공간을 크게 넓힌 사람이었다.

아울러 그는 인간을 물 속으로 끌어 들여 물고기에게는 커다란 재앙을 안겨준 사람이기도 했다.

 

쿠스토 선장(Captain Cousteau).

이는 쿠스토가 죽을 때까지 불린 이름이었다.

그는 1930년 20살 나이에 프랑스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해 2년간 항해훈련을 했고

그 후 해군비행학교에 지원하여 파일럿 교육을 받았으나,

교통사고로 양팔과 갈비뼈 여러 개를 다치는 중상을 당했다.

당연히 그는 파일럿 신체검사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그는 이 사고로 다친 팔 근육을 회복시키려고 수영을 하게 되었다.

이것이 그를 평생 바다에서 생활하게 만들 줄은 그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그가 고글을 쓰고 바다 속을 들여다 본 순간 그는 바다에 미쳐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를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바다에 미쳤다.

 

수중카메라도 그가 처음으로 만들어 사용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최초의 수중카메라에 칼립소(Calypso)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는 그가 영국의 후원자로부터 기증받은 해양탐사선에 붙인 이름이기도 했다.

그가 수중카메라 칼립소를 만든 것은 1961년이다.

칼립소호는 전 세계를 누비며 해양에 관한 자료를 모으고 실험을 했다.

 

이후 그는 1964년,

일본광학(후에 (주)Nikon 카메라 제조사)에 이 카메라의 디자인과 판권을 넘긴다.

Nikonos가 탄생한 것이다(수중카메라에는 육상용 카메라에 하우징을 덮어씌운 것과 카메라 자체에

방수기능을 가진 두 종류가 있다. Nikonos는 후자).

그러나 현재 Nikonos 시리즈의 수중카메라 생산을 중단됐다.

(주)Nikon 내의 수중카메라 사업부도 해체되었다.

 

쿠스토는 이외에도 수많은 해양 관련 일에 관여했다.

그는 해양 생물학자였으며 항해가이며,

환경주의자이며 영화제작자이기도 했다. 

1956년에 발표한 수중 다큐멘터리 < The Silent World >는 칸느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오스카상을 수상했다.

 

쿠스토는 또 인류 최초로 스쿠버다이빙 장비를 지고 물 속에 들어간 사람이었다.

물론 다른 형식의 장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스쿠버장비 이전에 이미 수면에서 호스를 통해 공기를 공급하는 형식의 헬맷다이버들이 있었으며,

군사용으로 산소를 사용하는 재호흡기도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는 알렉산더 대왕이 밀랍을 칠한 양가죽을 뒤집어씌운 나무통 속에 들어가,

페르시아 만의 바다 속을 10m나 내려간 적도 있었다.

해양에 관한 인간의 호기심은 제왕도 다를 바가 없었다.

 

쿠스토의 발명이 지구를 한 바퀴 돌아 우리나라의 민간에 들어오기까지는 30~4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나는 다이빙 입문 초기,

수중카메라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일단 내가 다이빙에 입문하게 된 동기가 그것이 아니었고,

수중카메라에까지 정신을 뺏긴다면,

내 경제적 앞날이 순탄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 때문이었다.

 

              

       ▲ 도화돔 떼

       도화돔떼들이 바다를 가득 메우고 있다.

       복판의 하얀부분은 물속에서 올려다 본 태양이다.

       ⓒ 장호준

 

다이빙을 시작하기 전에 나는 육상카메라를 들고 여기저기를 돌아 다녔다.

눈이 오면 눈 내리는 곳을 찾아,

태풍이 오면 바람이 부는 바다를 찾아,

학이 있다면, 학이 있는 동네를 다니면서 카메라를 받쳐 놓고 하루 종일 학사진에도 몰두하곤 했었다.

학이 앉아 있는 마음에 드는 가지에 렌즈를 고정시켜 놓고 고적한 외로움과 마주 앉아 홀로 자연을 대하고 있노라면 내 마음 속에 평화가 깃들고는 했으니까.

나는 그게 좋았다.

 

그러나 다이빙을 시작한 그때 다시 수중카메라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이중의 지출을 해야 할 것이고 그건 아무래도 내 경제적 형편으로는 버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다이빙 횟수가 늘어 갈수록 주위에 카메라를 드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자 어느덧 나는 카메라 주위를 얼쩡거리게 되었다.

 

울진의 한 바닷가에서 수중카메라를 자랑스럽게 조립하고 있는 사람들 옆에 쭈그리고 앉아 나는 물었다.


“그거 얼마쯤 해요?”
“풀세트 할라카마 몇 백 만원이 듭니다.”

 

물론 나는 즉시 신경을 꺼 버렸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이성일 뿐이었다.

첫 해외다이빙의 기회가 왔다.

장소는 필리핀의 아닐라오였다.

물론 해외 다이빙 포인트에 대해 아무런 경험도 정보도 없던 나는 나의 친애하는 다이빙 버디인 P와 함께 우리의 다이빙 사부인 S에게 조언을 구했다.

필리핀은 수중사냥을 금지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고기도 몬 잡는데 내가 가면 뭐 하노?”


다이빙 내내 구경만 한다는 것은 납득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염려 탁 노소, 카메라 내가 빌려 드릴께, 육상카메라 하셨잖아요.”
스쿠버를 하는 사람들에게 카메라란 수중카메라를 의미하는 것이고,

다른 카메라는 꼭 육상이란 말을 붙인다.

 

그때 그가 내게 빌려준 카메라는 Nikonos V(1984년 발매)로 필카의 명기였다. 

니커 28mm짜리 광각렌즈에 스트로보는 니콘의 SB 24 육상용 스트로보에 하우징(방수용 카메라집이나 스트로보집)을 덮어 씌운 어정쩡한 것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열심히 찍었다.

내 버디 P도 스쿠버를 하는 멋진 자신의 모습을 찍어 자신의 집 벽 한 쪽을 장식하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모델을 섰다.

 

“피사체와의 거리가 3m가 넘어가면 사진이 거의 안 나옵니데이.”


카메라를 들고 물로 들어가기 전에 사부가 주의를 줬다.

그는 사부지만 우리보다 몇 년 아래였다.

그는 우리와 다이빙을 매개로 처음 만났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대한민국의 특성인, 학연, 지연으로 종적 줄서기를 한 결과 동생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다.

“응, 그건  왜 그래?”
“물은 육상하곤 다릅니데이.”


이 말은 육상과 수중의 빛에 관한 가장 원론적인 말이었다.

 

필리핀 일정을 마치고 돌아와 짐을 풀자마자 나는 내가 거래하던 사진관으로 한달음에 달려가 필름을 맡겼다.

필름이 현상되고 인화하는 동안 내 가슴은 흥분으로 떨리고 내 머리 속은 내가 찍었던 온갖 구도들이 멋진 사진으로 변해 나오는 상상으로 가득 찼다.

그 푸르른 물, 꿈결 속처럼 그 푸름을 헤집고 유영하던 다이버들의 멋진 모습, 형형색색의 물고기들, 나는 거의 오줌을 지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단 한 장도 초점이 맞은 것이 없었다. 

7통의 필름이,

250장의 사진이 꽝이었다.

(그때 나는 네가티브 필름을 사용했었다).

 

초점이 안 맞는 사진은 사진이 아니다.

이럴 수는 없다.

초점거리를 수동으로 맞추는 카메라지만 내가 육상에서 지금껏 찍은 사진엔 그런 일이 없었다.

나는 사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쩌고, 저쩌고, 나는 울분을 토했다.


“고장 난 카메라제?”


사부가  숨을 멈췄다.

수화기 저 편에서 한참 동안 카메라의 주인과 상의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렌즈가 물을 쪼끔 먹었어요. 괜찮은 줄 알고 드렸는데…. 미안 하구마….”


알았다 알았어, 사부야, 다 내 탓이다.

근데 장차 이일을 어이 할꼬?

허무했다.

 

            

             ▲ 촬영대회에 참가한 대구 수중협회의 선수들

             서귀포항앞에서 대구수중협회를 통해 참가한 선수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 장호준

 

그렇게 시작한 카메라지만 나는 한동안 카메라를 잊었다.

왜냐하면 그 때만 해도 나는 수중사냥에 깊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크랙 사이를 뒤질 때의 기대감.

숨을 멈추고 작살을 날릴 때의 흥분을 자제 하며 생기는 쾌감,

이윽고 팔을 통해 전해지는 그 죽음의 떨림,

고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작살에서 빼낼 때의 조바심.

어느 것 하나 삶의 기쁨을 노래하지 않는 것은 없었다.

 

그해 가을이 저물어 갈 때 사부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님, 서귀포 촬영대회 갑시다.”
“거긴 내가 왜?”


사부의 말인즉, 모든 게 공짜라는 것이었다.

필름도 주고, 탱크도 주고, 호텔비도 내주고, 배도 용선해주고, 술도 한잔 사준다는 것이었다.

본인이 부담해야 하는 것은 밥값과 비행기삯 뿐이라는 것이었다.


“왜?”
“수중사진의 저변 확대를 위해서, 이 나라 수중문화의 창달을 위해서 아입니까.”


대한 체육회 산하 한국수중협회가 주관을 하고 거기에 각종 다이빙관련 업체들이 스폰서로 참여해서 벌이는 잔치라는 것이었다.

 

“카메라가 없잖아?”


똑같은 말을 나는 반복했다.

그도 똑같은 말로 받았다.


“내가 빌려 주께요.”


물론 P도 모델이라는 똑같은 역할을 맡았다.

이리하여 나는 P와 함께 제주도로 가게 되었다.

내 다이빙 인생의 분기점도 나 모르게 제주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것이다.

출처:오마이뉴스

신선한 고기는 비린내가 안 난다. 

 

 작가: 장호준 (aqualux199)

           

            ▲ 갑오징어 (수심 10 미터)

            갑오징어 한 마리가 아주 점잖은 표정으로 카메라 앞에 서 있는 것 같다.

            사실은 카메라만 들이대면 자리를 떠나 버려 아주 애를 먹었다.

            오징어 중에 그 맛이 가장 낫다고 한다.

            그 뼈는 지혈제로도 쓰이고 그 알은 산모가 먹으면 부기가 가라 앉는다.

            시파단,

            ⓒ 장호준

 

어느 해 제주도 서귀포에서 일본인들과 횟집에서 회를 먹은 적이 있다.

그때 횟감으로 나온  ‘다금바리’가 있어서 그걸 시켜 먹었는데,

거기에 감격한 한 일본인이 눈을 지그시 감고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는 것을 봤다.

냄새부터 아주 경건히 맛본다는 메시지였겠지만,

조선 사람인 우리 눈에는 음식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는 꼬락서니가 정말 꼴값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속으로 웃은 적이 있다.

 

처음 외국에 나가서 외국에서는 ‘회’를 먹지 않는다는 말을 상기하고,

그걸 확인했을 땐 정말 깜짝 놀랐다.

아니 그럼 그 맛있는 ‘회’를 먹지 않고 그 사람들은 대체 무엇을 먹는다는 말인가?

 

우리와 일본, 그리고 중국을 제외하면 ‘회’라는 문화가 없다.

‘회’가 전 국민적 사랑을 받는 나라는 우리와 일본 밖에 없다는 말이다.

 

다이빙을 다니면서 느낀 일이지만 내륙지방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가 ‘회’ 맛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물론 이들이란 지금처럼 내륙지방에서도 쉽게 바다 물고기회를 만날 수 없었던 시절을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 분들도 회 맛을 알고 모르고 와는 상관없이 횟집을 고를 때는 꼭 자연산을 판다는 횟집을 찾는다.

넙치(광어)나 도다리를 놓고 자연산이냐 양식이냐를 구분할 줄도 모르면서 자연산 횟집을 찾는 것이다.

 

전국의 횟집 수족관에 있는 활어들을 양식이라고 말하는 횟집은 없다.

전부 자연산이라면 대체 양식은 어디에 있는가.

세계의 어업양식기술은 이미 대양에 사는 참치(다랑어)까지 양식하는 것에 성공을 했다.

이미 우리나라도 그 대열에 끼여 있다.

 

멍게(우렁쉥이)도 자연산과 양식은 그 형태가 확연히 구분되며,

전복도 양식을 해서 어느 정도 크면 종패를 바다에 뿌려서 키우는데,

양식한 부분과 자연에서 큰 부분은 색깔의 차이가 뚜렷하다.

그러나 그 맛의 차이는 아무나 구별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양식이 오히려 골고루 좋은 먹이를 먹이는 바람에 물고기의 영양상태가 좋아 횟감으로 더욱 맛있고 좋다고 생각한다.

굳이 자연산을 찾는 마음이란 자연에 대한 사람들의 동경과 향수가 낳은 결과가 아닌가 생각한다.

 

지금이야 내륙의 도시에서도 회가 일상화 되어 있지만,

아직도 시골에서는 신선한 회를 먹기가 힘들다.

회 맛도 다른 음식처럼 어릴 때부터 자주 먹어 본 사람이 그 깊이와 넓이를  아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자연산과 양식의 차이를 기가 막히게 구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맛을 구별하지 못한다.

물론 이는 좋다 나쁘다와는 상관이 없다.

 

바다에 나가면 수중사냥에는 기막힌 솜씨를 발휘 해 놓고도 정작 그 수확물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는 다이버들을 많이 만난다.

나는 처음 이들이 나와는 다른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들이 다른 것은 철학이 아니라 입맛이었다.

회맛을 모르는 사람들이거나,

회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며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다. 이렇게 맛있는 회를 안 먹다니…”

 

어떤 사람에겐 손바닥 뒤집듯이 쉬운 일이 어떤 사람에겐 도저히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법이다.

어릴 때의 입맛, 어릴 때에 만난 문화, 어릴 때의 친구, 이것은 아무래도 특별난 것들이라 사람들은 평생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것이다.

첫사랑, 첫눈, 말만 들어도 가슴이 뛰는 것들이 있듯이 말이다.

 

필리핀에 다이빙을 갔다가 수중사냥을 하고 싶어 가이드를 꼬드겨 밤에 바다로 나선 적이 있었다.

물론 필리핀의 거의 모든 다이빙리조트에서 수중사냥을 금지하지만,

그때만 해도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이라 그들은 작살까지 빌려 주면서 우리를 안내했다.

현지의 어떤 물고기가 좋은지를 몰라서 우리의 목적을 이야기하고 그들이 잡으라는 팔뚝만한 물고기 몇 마리를 잡아서 주방에 맡겼더니,

어른 엄지손가락 크기만 하게 뭉텅뭉텅 잘라 왔다.

 

             

            ▲ 박쥐고기 (수심 20 미터)

            박쥐고기 몇 마리가 느긋하게 아침 산책을 나가고 있다.

            필리핀, 아닐라오.

            ⓒ 장호준

 

열대의 따뜻한 바다(어떤 곳은 수온이 30도에 달하는, 우리의 목욕탕물 수준인 수온도 있다)에서 나는 물고기라 지방질도 없었고 육질도 퍼석했다.

거기다가 우리가 보아 왔던 물고기와는 그 색깔부터가 너무 달랐다.

알록달록하고 화려한 색깔과 어지러운 무늬는 민무늬의 무채색에 길들어져 있던 우리 눈에 금붕어보다 더 화려한 몸꼴이어서 관상용이 아닌가 하는 선입견에 선뜻 젓가락이 가지 않았다.

 

물고기는 찬 바다에서 나는 물고기가 맛이 있다.

일본인들이 제일로 치는 횟감이 찬 바다에서 잡히는 참치(참다랑어)의 뱃살이다.

큰놈은 거의 200kg도 더 나가고 그 값 또한 몇 천 만 원에서 일억 원이 넘는 단다.

그 고기를 부위별로 해체해서 경매에 붙이고  낙찰 받은 횟집 주인들이 회를 떠서 한 조각에 얼마씩에 파는 것이다.

 

그렇게 비싸니 서민들은 잘 먹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들의 ‘다도’를 보면 하도 형식적인 것에 치우치는 것처럼 보여 음식에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를 한다.

다도도, 중국에서 시작되었다고 나는 알고 있다.

한 뿌리에서 나온 문화라도 자라 온 환경에 따라 이렇게 전혀 다른 꽃이 피는 것이다.

 

참치만 해도 일본인들은 환호를 지르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돌돔, 감성돔, 참돔, 옥돔, 등 돔 종류를 우리는 고급 물고기로 치고,

일본인들도 ‘썩어도 도미’라며 최고로 치지만,

유럽이나 미주 쪽은 그렇지 않단다.

 

        ▲ 크루징보트

        호주의 북부해안 대보초(G,B.R)를 항해하며 다이빙 포인트를 안내해 주는 배다.

        ⓒ 장호준

 

국적이 각각인 여러 명의 외국인들과 함께 호주의 대보초를 항해한 적이 있다.

낮이면 그들이 안내하는 포인트에서 다이빙을 하고 다이빙이 끝나면 다음 목적지로 항해를 하는 것이다.

이른바 크루즈 보트 다이빙이었다. 

좁은 배 안에 서로 얼굴을 맞대고 지난 지 며칠이 되자 너나 할 것 없이 스스럼이 없어졌다.

저녁 어스름 무렵 보트 승무원들이 낚시도구를 챙겨 배의 뒤 갑판으로 나왔다.

 

외줄 낚싯대에다가 어른의 가운데 손가락만한 새우를 미끼로 끼워 던지자 팔뚝만한 물고기들이 물려 올라 왔다. 

몇 마리리가 잡히자 곧 회가 쳐졌다.

일본인들도 몇 명이 있었지만 이들은 보아하니 먹을 줄만 아는 사람들이었다.

 

도리 없이 우리 일행 중 한 명이 나가서 회를 쳤다.

껍질을 벗기고, 살과 뼈를 발라 내고, 발라낸 살들을 마른 수건으로 훔치고….

주위에는 그 배에 탄 모든 외국인들이 둘러서 있었다.

싱가포르국적을 가진 중국인, 베트남인, 미국인, 영국인, 일본인, 그들은 회를 치는 사람의 손놀림과 그 과정을 보며 간간이 탄성을 질렀다.

 

이윽고 먹을 시간이 왔다.

소스는 두 가지, 우리가 가져 온 고추장과 일본인들이 가져 온 ‘와사비’였다.

우리는 와사비에 찍어 먹고,

일본인들은 고추장에 찍어 먹고,

옆에서 구경하던 다른 나라 사람들은 이러는 우리의 모습이 신기해서 쳐다보고….

회에는 술이 따르는 법,

종이팩으로 사온 소주도 한 컵씩 돌렸다.

 

한국인들이 음식을 먹으면서 주위 사람들을 모른 체 하고 먹을 리가 없다.

더구나 외국인들이 아닌가.

우리나라 국민들이 인정이 없다고 욕을 얻어 먹는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 일행 중 한 사람이 나섰다.

 

그는 젓가락으로 회 서너 점을 집더니 와사비를 듬뿍 찍어서 한 외국인의 입에 넣어주고,

또 고추장을 듬뿍 찍어서 그 옆에 있는 외국인의 입에 넣어 주었다.

물론 그들은 안 먹겠다고 소리 지르며 손사래를 쳤지만,

그는 그런 것을 무시했다.

그럴수록 더욱 권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예의범절,

그는 드디어 강제로 입을 벌리고….

그들은 회 맛을 피할 수 없었다.

갑판에서 때 아닌 소동이 일어났다.

물론 이 회를 먹인 우리 일행인 그 분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갑판의 한 쪽에 수줍은 듯 서 있었다.

 

일본이 부강해지면서 그들의 ‘스시’ 문화가 뉴욕의 고급 레스토랑에 진출해 있다지만,

음식문화가 한 나라의 일상에 오르기란 이처럼 어려운 것이다.

아마도 그들 외국인들은 그날 우리의 회를 난생 처음으로 경험했을 것이다.

 

회중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맛을 내게 선사한 회는 물회였다.

물고기라면 일단 사람들은 비린내를 생각한다.

거기다가 물이라! 왠지 더욱더 비릴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회다.

처음으로 그 집에서 물회를 맛 본 그 날을 잊을 수가 없다. '

진정한 물회란 이런 것이 아닐까'하는 감동에 이런 맛은 국가가 보존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을 정도였다.

 

그 다음부터 나는 서귀포에 도착하는 즉시 다이빙 가방을 던져 놓고 그 집으로 달려 가곤 했다.

그것은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서귀포에서 삼십여 분 차를 타고 나가면 바닷물이 집 앞 마당에서 찰랑거리는 그 집이 나오고 얼음을 둥둥 띄운 자리돔, 한치, 소라, 물회가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내게는 그 맛을 글로 알릴 재주가 없다.

다만 나중에는 그 맛을 나 혼자 알아서는 안 된다는 강박관념까지 생겨 서귀포에만 가면 그 물회 맛을 못 본 사람을 데리고 가야 할 의무라도 있는 것처럼 그 집으로 안내했다.

 

그때 함께 간 한 친구가 그 물회 맛을 보더니 감격해서 소리를 질렀다.

그는 남들 앞에서 처음 먹어 봤다고 말하기가 좀 거시기 했던지 식사를 끝내고 나온 나를 옆 골목으로 데리고 가더니 감동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내 평생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처음이야!”

 

재료가 신선하면 비린내도 없다.

고등어도 갈치도 금방 건져 올린 놈을 회를 쳐 놓으면 비린내가 없다.

어물전에서 파는 고등어가 비린내가 몹시 난다면 그것은 오래되었다는 말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싱싱하고 신선한 사람은 비린내가 나지 않는다.

뭔가 감추고 있는 사람, 어딘가 상해가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비린내가 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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