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속에서 찍은 사진 250장이 날아가다
작가: 장호준 (aqualux199)
▲ 사진촬영하는 다이버
물고기 사진을 찍기 위해 급히 Nkonos 카메라의 거리계를 급히 조정하고 있다.
그 앞엔 볼락 새끼 한마리가 다이버에게 호기심을 보이고 있다.
ⓒ 장호준
대부분의 다이버들이 물에 들어가는 이유는 수중사냥의 매력에 이끌려서다.
그물이나 낚시처럼 보이지 않는 상대와의 대결이 아니라 물고기와의 일대일의 대면대결이 이들을 흥분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메라도 있다.
1943년 6월,
스쿠버다이빙의 아버지라 불리는 잭 이브 쿠스토는 에밀 가냥과 함께 스쿠버 장비를 만들었다.
그리고 당시 이탈리아군에 의해 점령 당해 있던 프랑스의 한 작은 포구에서 처음으로 이 장비를 실험하러 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장비를 실험하며 동굴의 천정에 붙어 있던 바다가재도 잡아 나왔다.
그는 1910년 6월 11일 프랑스에서 태어나 1997년 6월 25일,
87년의 생을 마감할 때까지 바다와 함께하며 바다에 관한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바다에서 인간의 생존공간을 크게 넓힌 사람이었다.
아울러 그는 인간을 물 속으로 끌어 들여 물고기에게는 커다란 재앙을 안겨준 사람이기도 했다.
쿠스토 선장(Captain Cousteau).
이는 쿠스토가 죽을 때까지 불린 이름이었다.
그는 1930년 20살 나이에 프랑스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해 2년간 항해훈련을 했고
그 후 해군비행학교에 지원하여 파일럿 교육을 받았으나,
교통사고로 양팔과 갈비뼈 여러 개를 다치는 중상을 당했다.
당연히 그는 파일럿 신체검사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그는 이 사고로 다친 팔 근육을 회복시키려고 수영을 하게 되었다.
이것이 그를 평생 바다에서 생활하게 만들 줄은 그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그가 고글을 쓰고 바다 속을 들여다 본 순간 그는 바다에 미쳐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를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바다에 미쳤다.
수중카메라도 그가 처음으로 만들어 사용했다.
그는 자신이 만든 최초의 수중카메라에 칼립소(Calypso)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는 그가 영국의 후원자로부터 기증받은 해양탐사선에 붙인 이름이기도 했다.
그가 수중카메라 칼립소를 만든 것은 1961년이다.
칼립소호는 전 세계를 누비며 해양에 관한 자료를 모으고 실험을 했다.
이후 그는 1964년,
일본광학(후에 (주)Nikon 카메라 제조사)에 이 카메라의 디자인과 판권을 넘긴다.
Nikonos가 탄생한 것이다(수중카메라에는 육상용 카메라에 하우징을 덮어씌운 것과 카메라 자체에
방수기능을 가진 두 종류가 있다. Nikonos는 후자).
그러나 현재 Nikonos 시리즈의 수중카메라 생산을 중단됐다.
(주)Nikon 내의 수중카메라 사업부도 해체되었다.
쿠스토는 이외에도 수많은 해양 관련 일에 관여했다.
그는 해양 생물학자였으며 항해가이며,
환경주의자이며 영화제작자이기도 했다.
1956년에 발표한 수중 다큐멘터리 < The Silent World >는 칸느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오스카상을 수상했다.
쿠스토는 또 인류 최초로 스쿠버다이빙 장비를 지고 물 속에 들어간 사람이었다.
물론 다른 형식의 장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스쿠버장비 이전에 이미 수면에서 호스를 통해 공기를 공급하는 형식의 헬맷다이버들이 있었으며,
군사용으로 산소를 사용하는 재호흡기도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는 알렉산더 대왕이 밀랍을 칠한 양가죽을 뒤집어씌운 나무통 속에 들어가,
페르시아 만의 바다 속을 10m나 내려간 적도 있었다.
해양에 관한 인간의 호기심은 제왕도 다를 바가 없었다.
쿠스토의 발명이 지구를 한 바퀴 돌아 우리나라의 민간에 들어오기까지는 30~4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나는 다이빙 입문 초기,
수중카메라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일단 내가 다이빙에 입문하게 된 동기가 그것이 아니었고,
수중카메라에까지 정신을 뺏긴다면,
내 경제적 앞날이 순탄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 때문이었다.
▲ 도화돔 떼
도화돔떼들이 바다를 가득 메우고 있다.
복판의 하얀부분은 물속에서 올려다 본 태양이다.
ⓒ 장호준
다이빙을 시작하기 전에 나는 육상카메라를 들고 여기저기를 돌아 다녔다.
눈이 오면 눈 내리는 곳을 찾아,
태풍이 오면 바람이 부는 바다를 찾아,
학이 있다면, 학이 있는 동네를 다니면서 카메라를 받쳐 놓고 하루 종일 학사진에도 몰두하곤 했었다.
학이 앉아 있는 마음에 드는 가지에 렌즈를 고정시켜 놓고 고적한 외로움과 마주 앉아 홀로 자연을 대하고 있노라면 내 마음 속에 평화가 깃들고는 했으니까.
나는 그게 좋았다.
그러나 다이빙을 시작한 그때 다시 수중카메라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이중의 지출을 해야 할 것이고 그건 아무래도 내 경제적 형편으로는 버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다이빙 횟수가 늘어 갈수록 주위에 카메라를 드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자 어느덧 나는 카메라 주위를 얼쩡거리게 되었다.
울진의 한 바닷가에서 수중카메라를 자랑스럽게 조립하고 있는 사람들 옆에 쭈그리고 앉아 나는 물었다.
“그거 얼마쯤 해요?”
“풀세트 할라카마 몇 백 만원이 듭니다.”
물론 나는 즉시 신경을 꺼 버렸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이성일 뿐이었다.
첫 해외다이빙의 기회가 왔다.
장소는 필리핀의 아닐라오였다.
물론 해외 다이빙 포인트에 대해 아무런 경험도 정보도 없던 나는 나의 친애하는 다이빙 버디인 P와 함께 우리의 다이빙 사부인 S에게 조언을 구했다.
필리핀은 수중사냥을 금지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고기도 몬 잡는데 내가 가면 뭐 하노?”
다이빙 내내 구경만 한다는 것은 납득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염려 탁 노소, 카메라 내가 빌려 드릴께, 육상카메라 하셨잖아요.”
스쿠버를 하는 사람들에게 카메라란 수중카메라를 의미하는 것이고,
다른 카메라는 꼭 육상이란 말을 붙인다.
그때 그가 내게 빌려준 카메라는 Nikonos V(1984년 발매)로 필카의 명기였다.
니커 28mm짜리 광각렌즈에 스트로보는 니콘의 SB 24 육상용 스트로보에 하우징(방수용 카메라집이나 스트로보집)을 덮어 씌운 어정쩡한 것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열심히 찍었다.
내 버디 P도 스쿠버를 하는 멋진 자신의 모습을 찍어 자신의 집 벽 한 쪽을 장식하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모델을 섰다.
“피사체와의 거리가 3m가 넘어가면 사진이 거의 안 나옵니데이.”
카메라를 들고 물로 들어가기 전에 사부가 주의를 줬다.
그는 사부지만 우리보다 몇 년 아래였다.
그는 우리와 다이빙을 매개로 처음 만났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대한민국의 특성인, 학연, 지연으로 종적 줄서기를 한 결과 동생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다.
“응, 그건 왜 그래?”
“물은 육상하곤 다릅니데이.”
이 말은 육상과 수중의 빛에 관한 가장 원론적인 말이었다.
필리핀 일정을 마치고 돌아와 짐을 풀자마자 나는 내가 거래하던 사진관으로 한달음에 달려가 필름을 맡겼다.
필름이 현상되고 인화하는 동안 내 가슴은 흥분으로 떨리고 내 머리 속은 내가 찍었던 온갖 구도들이 멋진 사진으로 변해 나오는 상상으로 가득 찼다.
그 푸르른 물, 꿈결 속처럼 그 푸름을 헤집고 유영하던 다이버들의 멋진 모습, 형형색색의 물고기들, 나는 거의 오줌을 지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단 한 장도 초점이 맞은 것이 없었다.
7통의 필름이,
250장의 사진이 꽝이었다.
(그때 나는 네가티브 필름을 사용했었다).
초점이 안 맞는 사진은 사진이 아니다.
이럴 수는 없다.
초점거리를 수동으로 맞추는 카메라지만 내가 육상에서 지금껏 찍은 사진엔 그런 일이 없었다.
나는 사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쩌고, 저쩌고, 나는 울분을 토했다.
“고장 난 카메라제?”
사부가 숨을 멈췄다.
수화기 저 편에서 한참 동안 카메라의 주인과 상의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렌즈가 물을 쪼끔 먹었어요. 괜찮은 줄 알고 드렸는데…. 미안 하구마….”
알았다 알았어, 사부야, 다 내 탓이다.
근데 장차 이일을 어이 할꼬?
허무했다.
▲ 촬영대회에 참가한 대구 수중협회의 선수들
서귀포항앞에서 대구수중협회를 통해 참가한 선수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 장호준
그렇게 시작한 카메라지만 나는 한동안 카메라를 잊었다.
왜냐하면 그 때만 해도 나는 수중사냥에 깊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크랙 사이를 뒤질 때의 기대감.
숨을 멈추고 작살을 날릴 때의 흥분을 자제 하며 생기는 쾌감,
이윽고 팔을 통해 전해지는 그 죽음의 떨림,
고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작살에서 빼낼 때의 조바심.
어느 것 하나 삶의 기쁨을 노래하지 않는 것은 없었다.
그해 가을이 저물어 갈 때 사부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님, 서귀포 촬영대회 갑시다.”
“거긴 내가 왜?”
사부의 말인즉, 모든 게 공짜라는 것이었다.
필름도 주고, 탱크도 주고, 호텔비도 내주고, 배도 용선해주고, 술도 한잔 사준다는 것이었다.
본인이 부담해야 하는 것은 밥값과 비행기삯 뿐이라는 것이었다.
“왜?”
“수중사진의 저변 확대를 위해서, 이 나라 수중문화의 창달을 위해서 아입니까.”
대한 체육회 산하 한국수중협회가 주관을 하고 거기에 각종 다이빙관련 업체들이 스폰서로 참여해서 벌이는 잔치라는 것이었다.
“카메라가 없잖아?”
똑같은 말을 나는 반복했다.
그도 똑같은 말로 받았다.
“내가 빌려 주께요.”
물론 P도 모델이라는 똑같은 역할을 맡았다.
이리하여 나는 P와 함께 제주도로 가게 되었다.
내 다이빙 인생의 분기점도 나 모르게 제주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것이다.
출처: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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