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수의 역사는 군사적인 목적, 해초 채취를 통한 생계유지의 수단 뿐 만 아니라 심해에 대한 지식을 확대하려는 인간의 강한 욕구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겠다.

인간의 잠수 역사는 확실치 않으나, 잠수가 작업화 된 것은 약 5,000년 전부터라고 하겠다.

초기의 잠수는 비교적 얕은 수심에서 이루어졌으며, 잠수사들은 주로 사업적 가치가 있는 해조류, 산호 및 진주조개 등의 채취작업에 종사했다.

잠수에 대한 최초의 역사적 기록은 그리이스의 역사학자 헤로도 투스에 의해 기술되었다.

그는 그의 저서에서 B.C.5세기경 페르샤의 왕 Xerxes 에 의해 침몰된 배에서 보물을 찾도록 고용 되었던 Scyllis라는 잠수사에 대해 기술하였다.

초기부터 잠수사들은 군사적인 분야에서도 맹활약을 하였다.

그들의 임무는 주로 적선의 닻줄을 끊어서 표류하게 하거나 선창에 구멍을 뚫어 침몰 시키거나 항구에 장애물을 설치하는 일이었다.

전사를 돌이켜 볼 때 알렉산더대왕은 잠수사들로 하여금 지금의 레바논인 Tyre 라는 항구의 장애물을 제거하도록 명령했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직접 잠수하여 일의 진척을 감독하였다.

 

그 외 일단의 잠수사들은 지중해 동부의 큰 항구를 중심으로 인양작업에 종사하였다.

B.C. 1세기까지 잠수작업은 매우 조직적이었으며, 인양작업에 대한 보수도 작업심도가 깊을수록 위험도가 높다는 사실에 입각한 법률에 의해 정해졌다.

예를들면, 24피트의 수심에서 인양작업을 할 경우에는 잠수사들은 발견한 물건의 1/2을 차지했으며, 12피트의 경우에는 1/3을 차지했고, 3피트에서는 다만 1/10을 차지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런 원시적인 잠수 형태는 세계 도처에 남아 있다.

스킨다이버 (잠수장비가 전혀 없이 하는 잠수) 들은 어릴 때부터 훈련함으로써 보통사람보다 뛰어난 폐기능 및 스테미너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돌과 같은 무거운 것을 들고 빨리 바닥에 내려가도록 하거나 또는 허리에 로프를 매어서 협력자로 하여금 그들을 끌어당길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런 형태의 잠수로는 1 -2분을 넘길 수 없었다.

이 시간은 보통사람이 지상에서 숨을 참을 수 있는 시간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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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은 수중의 잠수사에게 공기를 공급해 줌으로서 보다 오랫동안 수중에서 머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런 대부분의 설계는 잠수사가 직접 갖고 다니는 호흡낭에 대한 생각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런 생각은 굉장히 오래 했던 것 같으며, B.C. 세기경에 앗시리아의 조각에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 조각에 나타난 그림에서 볼 때 그들은 오히려 부대로서 가죽주머니를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런 기구를 갖고는 실제로 잠수가 불가능하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잠수작업의 형태가 나타난 것은 중세기 말엽이며, 1240년으로 베이컨은 잠수장비란 인간이 바다나 강 밑에서 안전하게 작업할 수 있는 장비라고 말했던 것이다.

16, 17세기의 다른 저자들은 훗일 성공적인 발전의 전조가 된 장비들의 그림을 출판했다.

그러나 이러한 설계가 실제로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으며, 그들도 핵잠수함을 발명한 쥴 베르네와 비숫하게 부당한 비평을 받았을 것이다.

즉, 베르네는 구상은 했지만 필요한 기술적 뒷받침이 없었던 것이다.


 


1,500 -1,800년 사이에 잠수장비도 발전을 거듭함으로써 잠수사들이 수중에서 수시간 동안 머물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것은 잠수종 (Diving Bell )의 발명이다.

이에 대한 설명을 하자면, 종모양으로 아래가 개방된 크고 튼튼한 통으로 잠수사들이 수시간 동안 충분히 호흡할 수 있게 충분히 공기를 싣고 수직으로 하강할 수 있는 장비이다.

쉽게 이야기해서 컵을 거꾸로 하여 접시에 담겨 있는 물 속에 집어넣는 것과 같다.

컵 속의 공기는 수중압력에 의해서 별로 압축되지는 않는다.

이 잠수기구는 쇠사슬에 매달려 있으며 수표면에 있는 배의 움직임에 따른 조작 외에는 별다른 조작을 할 수는 없다.

잠수사들은 그가 작업하려는 바로 위에 이 잠수기구(잠수종과 유사한)가 위치한 경우에는 그대로 기구 속에서 작업할 수도 있으며 또는 위험을 무릅쓰고 잠시동안 기구 밖에 나가서 작업할 수도 있다.


 


최초로 이 기구가 만들어진 것은 1531년이며, 그 후 수백년 동안 불안정하기는 하나 효과적인 잠수기구로 계속 사용되었다.

1680년 매사츄세츠주에서 태어난 윌리엄 필립이 이 기구를 변형시켜 무겁고 뒤집어진 통을 통해 잠수사에게 공기를 공급함으로써 20만 파운드의 보물을 찾는데 이용했다.

1690년 영국의 천문학자 에드먼드 헬리(헬리혜성의 발견자)는 공기가 든 무거운 통을 통해서 잠수기구 속의 공기를 보충시킬 수 있는 기구를 발명했다.

그는 이를 실험하기 위해 자신과 다른 4명의 잠수사들과 함께 템즈강 수중 60피트에서 1시간 30분 동안 머물렀다.

그 후 약 26년후 헬리(당시 65세)는 이 잠수기구를 개량하여 66피트에서 4시간 동안 체류했던 것이다.

 
 

1715년 다른 영국인인 존 레스브리쥐는 한사람이 완전히 들어갈 수 있는 잠수복을 발명했다.

이 장비의 본질적 요소는 튼튼한 가죽으로 싸여진 공기주머니이며, 볼 수 있는 유리창과 물이 들어오지 않게 되어 있는 겨드랑이의 소매를 갖고 있으므로 충분히 작업을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이 기구도 역시 배로부터 줄을 내려 잠수종과 같이 조작하는 것이다.

 레스브리쥐의 발명은 확실히 성공적이었으며, 유럽의 여러 바다에서 수 많은 난파선들을 인양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그는 1749년 한 유명한 잡지에 기고하면서, 평균 작업심도는 60피트이며 최대수심은 72피트,수중체류시간은 34분 정도라고 했다.

구 후 레스브리쥐의 기구와 유사한 장비들이 고안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장비들은 잠수종과 비슷한 기본적인 한계점에 도달했던 것이다.

즉, 잠수사들이 자유롭게 일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공기를 공급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의 발견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기술적인 문제가 해결된 것은 공기를 압축해서 잠수사에게 공급할 수 있는 압축기가 발명되면서 부터 시작되었고, 그것은 19세기에 들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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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난구조 및 인양작업을 위한 잠수기술은 18세기 중엽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부터 발달되기 시작했다.

잠수종, 레스브리쥐의 잠수복을 이용한 잠수 혹은 간단한 스킨다이빙 등을 통해 잡수사들은 침몰선의 닷,금화 혹은 은괴에 이르기 까지 모든 물건의 인양에 큰 활약을 했다.

한편 일반 사람들도 드물기는 하지만 해저의 보물 인양에 흥미를 느꼇다.

예를들면 한 침몰된 전함에서 인양된 100대의 대포는 오늘날 시가로 5백만달러에 달한다.

그리고 매년 1천척 이상의 배들이 영국 근해에서 침몰되었으며, 이러한 사건들이 보다 효과적인 구조 및 인양작업을 할 수 있는 훌륭한 잠수복의 발명에 자극이 되었던 것이다.


 


최초의 실질적인 잠수복의 발전을 가져 온 사람은 아우구스투스 시이베라고 할 수 있다.

실질적으로는 그는 그 당시의 성공적인 잠수장비를 만든 여러 사람 중의 한사람이다.

인양작업에 열심이었던 죤과 찰스 딘 형제는 1823년 방연복(Smoke Dress)에 대한 특허권을 얻었다.

1828년에는 잠수복에 대한 특허권을 얻는데, 이 잠수복은 추위를 막을 수 있게 무겁고 밖을 볼 수 있는 창이 달린 헬멧과 수표면으로부터 공기를 공급받을 수 있는 호스가 부착되어 있었다.

 

헬멧은 잠수복에 고정되어 있지는 않았으며, 다만 잠수사의 어깨 위에 올려 놓음으로서 그 자체의 무게와 끈을 요대에 묶어서 고정시켰다.

소모된 공기는 헬멧의 테두리를 통해 배출되었기 때문에 일어서 있는 경우에는 별 문제가 없으나, 잠수사가 실족하거나 넘어지면 헬멧은 곧 물이 차게 된다.


아우구스 시이베의 최초의 작업은 딘 형제의 잠수복에 대한 수정작업이었다.

그는 허리까지 닿은 짧은 옷을 이용하여 목, 둘레에 헬멧을 고정시켜서 배출공기는 가장자리를 통해 나갈 수 있도록 했다.

딘형제는 인양작업을 하는데 매우 조직화되어 있었고, 1836년에는 최초의 잠수교범(Diving Manual)을 발간했다.

1840년 시이베는 완전방수의 잠수복을 만들고 배출관을 더 부착했다.

시이베의 발전된 잠수복이 오늘날 널리 사용되고 있는 심해잠수복의 원조인 것이다.

 

1840년에 이르러서 여러 종류의 잠수복이 나타났으며, 실제적으로도 잠수작업에 이용되기 시작했다.

그 당시의 대영제국의 공병은 포츠마스항 밖의 함대의 투묘지를 막고 있는 로얄 죠지호라는 침몰된 전함의 인양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 작업의 책임자였던 윌리엄 파리스 대령은 이 작업이 여러 종류의 잠수장구를 공식적으로 시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는 시험 결과 베셀이 만든 잠수장구는 헬멧을 잠수복에 고정시키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복잡하다는 점에서 제외시켰다.       
한편 딘 형제의 장비도 안전성에 대한 세심한 주의를 한 결과 제외 시켰으며, 시이베의 잠수복을 잠수작업의 공인잠수복으로 채택했다.

 파리스대령이 이 계획을 완성시킨 후 정부의 역사가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노련한 잠수사 중에서 관절통이나 감기가 자주 재발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잠수사들은 주로 60 - 70피트의 수심에서 하루에 6 - 7시간씩 작업을 한다."

파리스 대령과 그의 팀은 이러한 관찰이 내포하는 암시를 인식하지 못했다.

여기에서 관절통이라고 나타난 증상은 사실은 훨씬 심각한 생리학적인 문제의 반영이었으며, 수 년 후에는 이 증상은 잠수작업에 있어서의 중대한 위험이라는 것이 입증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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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의 발명가들은 실제적인 잠수복이 완성된 것과 동시에 잠수종의 개량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잠수종을 보다 크게하고 종 속의 물을 배출해 낼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용량을 갖춘 공기펌프를 설치하도록 했다.

이 개량된 펌프에 의해서 해저에서 수중에 노출되지 않은체 작업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큰 챔버의 건설을 가져오게 됐다.

이런 챔버는 오랜 작업기간이 필요한 교각건설이나 터널 굴착공사에서 훌륭한 효과를 나타냈다.

이 건식챔버는 불어로 큰 상자라는 뜻인 케이슨이라고 알려지기 시작했다.


케이슨은 표면으로부터 바닥까지 곧 바로 도달 할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다.

공기통을 사용함으로서 내부의 압력은 잠수사나 쓰레기들이 흘러나가는 경우에도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

케이슨의 발전은 기술 공학의 발전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케이슨의 사용이 확대됨과 동시에 여태껏 알려지지 않았고 설명할 수도 없는 병들이 잠수사들 사이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즉, 그들이 수표면에 돌아 온 후 갑작스럽게 어지럽거나 호흡이 곤란하다거나 또는 관절이나 복부에 심한 통증을 나타내는 등의 증세가 나타났던 것이다.

환자를 안정시키면 대개 회복되기는 했지만, 이런 증상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

잠수사들(특히 Caission Worker)은 작업 중에는 피로를 느끼지 않았지만, 작업이 끝난 후에는 극심한 피로에 시달렸다.

잠수작업이 점점 확대되면서 잠수사들에게 가해지는 수중 압력도 증가되면서 생리학적인 문제도 자주 발생하고 보다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놀랄 만큼 사망하는 경우도 자주 일어났다.

드디어 이 질병은 잠수병 (케이슨 병, 케숑) 이라고 불리기에 이르렀다.

뉴욕의 부록크린 교각공사시 잠수사들에게 일어난 질병을 보다 설명 적인 말인 벤즈( Bends )라고 부른 후 쭉 그렇게 불러오고 있다.

 

이 말은 환자가 고통 때문에 뒤틀린 자세와 비슷했으며, 그리시안벤드(Grecian Bend)라고 불리우던 당시의 매력적인 여성들 간에 유행되었던 윗몸을 조금 앞으로 구부린 걸음걸이와 비슷했으므로 벤즈라고 불리워졌던 것이다.

오늘날 잠수병 (Bends)은 잠수사고 중 가장 잘 알려졌으며, 소설,잡지, 텔레비젼 등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말 놀랍게도 인간이 잠수를 시작한지 수백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잠수병이 알려진 것은 150년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잠함 (케이슨)이 발명되기 전까지는 수중고압환경에서 오랫동안 체류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들 중의 한사람인 파리스도 잠수병을 말할 때는 그것이 소화불량, 관절통 혹은 관절염 이상의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으며, 그 이상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잠수병의 원인이 최초로 임상적으로 기술된 것은 1878년 프랑스에서 생리학자인 폴 버트 (Paul Bert)에 의해서였다.

그는 고압환경이 생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연구했으며, 고압환경하에서는 호흡기체 중 보다 많은 질소가 혈액이나 조직에 용해된다는 것을 알아냈다.

 

압력이 변화하지 않는 한 기체는 계속 용해상태로 존재하지만, 잠수사가 수중으로부터 상승한 후에는 압력이 갑자기 낮아지면서 용해상태의 질소가 기체상태로 돌아오면서 갑자기 인체로부터 빠져나가려고 한다.

전신에서 발생한 기포로 인해 이 병과 관련된 증상이 나타난다.

만일 중요 장기로 가는 혈액순환이 기포로 인해 막힌 경우 마비가 오거나 심지어는 죽게 되는 것이다.

버트는 이를 예방하기 위해 천천히 상승함으로서 단계적으로 감압하는 방법을 추천했다.

 

그는 연구 결과 잠수병의 증상이 나타나자 마자 다시 수중 고압으로 내려감으로써 즉시 소실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수년 후에는 특별히 고안된 재압챔버 (Recompression Tank )를 작업 장소에 배치하여 잠수병 (Bends)치료보다 잘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챔버 속의 압력은 필요에 따라 가감할 수 있다.

이러한 재압챕버를 최초로 성공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1893년 뉴욕과 뉴저지 사이의 허드슨강에 터널을 건설할 때였다.

이를 사용함으로써 잠수병의 발생 빈도를 감소시켰을 뿐 아니라 잠수병으로 인한 치사율을 감소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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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가 추진한 점진적으로 계속해서 상승하는 방법으로는 잠수병을 완전히 예방할 수 없었으며 잠수사들의 일부는 계속 잠수병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 없었으며 잠수병으로 고생했다.

그 당시의 일반적인 견해로서는 인간이 작업할 수 있는 잠수심도는 120피트(실질적인)가 한계선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이유로서는 그보다 깊이 잠수하는 경우에는 잠수병의 발생빈도가 높아질 뿐 만 아니라 효율적으로 작업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120피트에서 작업하는 잠수사 중에서는 의식을 잃은 일도 드물지 않게 일어났었다.

생리학자(J.S Haldane)은 1905년부터 1907년까지 영국 해군 잠수사들과 함께 한 실험을 통해 이런 문제점은 비교적 간단한 원리에 의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즉, 잠수사들의 헬멧속의 공기가 충분히 환기가 되지 못하므로 결과적으로 헬멧 내에 고농도의 탄산가스가 축적된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점은 잠수사가 작업하는 압력 하에서 측정한 공기 속도(매분당 공기의 1.5입방피트)를 표준화시키며, 한편 이 표준공기속도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용량의 펌프(압축기)를 사용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해서 헬멧 속의 공기는 이런 원칙 아래 계속해서 환기가 될 수 있었다.

그밖에 할데인(Haldane)은 그 후에 비록 재검토되기는 했지만, 오늘날의 단계적인 감압법의 기초를 이룬 감압표도 작성했다.

 

할데인의 연구는 즉각적인 효과를 가져와서 공기를 이용한 잠수에 있어서 실제적인 잠수심도를 200피트로 증가시켰던 것이다.

동시에 이 심도에서는 생리학적인 문제점도 일어나지 않았고, 수동식 펌프로도 충분히 공기를 공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잠수심도가 점점 깊어져 가면서 또 다른 원인 모를 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즉, 잠수사들은 무엇엔가 중독된 것처럼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잠수 할 이유조차 잊어 버리는 등 판단력을 상실하는 경우가 자주 일어났다.

 

1920년경 이와 같은 심해잠수시 일어나는 광적인 원인은 고압 하에서 공기를 호흡하는 경우 공기중의 질소에 의한다는 것으로 밝혀졌다.

기술적인 용어로서 이는 질소마취 (Nitrogen Narcosis)라 하며, 이를 질소의 마취적 특성에 의해 일어나고 공기의 압력이 높아질수록 점점 더 심해진다.

오늘날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잠수시에는 공기 대신 특별히 헬륨/산소 혼합기체를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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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대부분의 발명가들이 수중 고압환경에 대해 문외한이기는 했지만, 잠수사들이 압력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견고한 잠수복을 발명했다.

이런 종류의 잠수복은 잠수사로 하여금 대기압과 같은 환경하에서 호흡할 수 있고 충분히 깊은 심도에서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고안되었다.

죤 레스브리쥐가 제작한 원통형 잠수복 (Banel Diving Suit)도 일종의 견고한 잠수복이었으나, 작업심도가 제한되어 있었다.

이런 견고한 잠수복의 대부분은 실용성이 가장 큰 문제였다.

왜냐 하면, 고압에 견딜 수 있도록 고안되었기 때문에 너무나 둔탁하고 복잡해서 작업에 지장이 많았다.

1930년대에 잠수복은 최대로 700피트까지 잠수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으나, 실제로는 그에 미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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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 다이빙의 모든 것 (스쿠버 다이브 지 2012.1/2월호)


최근 국내에서도 동굴 다이빙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높아지고 동굴 다이빙 인구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다이버들 중 극소수 만이 동굴 다이빙을 경험했을 뿐이다.

근래에는 동굴 다이빙의 기본 과정뿐만 아니라 동굴 다이빙 스페셜티인 동굴 스테이지, 동굴 사이드마운트, 동굴 스쿠터(DPV), 동굴 측량 등의 과정도 소개되면서 동굴 다이빙 인구가 예전보다 빠르게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케번 다이빙

동굴 다이빙은 테크니컬 다이빙 기술의 효시라고 알려질 만큼 다양한 기술과 장비가 활용된다. 따라서 동굴 다이빙을 배우면 단지 동굴 다이빙 만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테크니컬 다이빙은 물론 스포츠 다이빙에까지 적용할 수 있는 유익한 요소들을 터득할 수 있다.

TDI에서는 지난 2000년부터 동굴 다이빙 탐사와 교육과정을 통하여 동굴 다이빙을 국내에 체계적으로 소개해 왔다. 따라서 이번 기회에 동굴 다이빙 전반에 관한 소개 및 교육 과정 등을 보다 상세하게 안내하고자 한다. 


동굴 다이빙이란 무엇인가?

수중 동굴은 지하, 해저, 산호초 등에 형성된 동굴로 다이버가 육상에서 직접 접근할 수 없는 수중 통로를 말한다.
동굴로 처음 진입할 때 빛이 비추는 공간을 케번(Cavern)이라고 한다. 그러나 안으로 진입하면서 빛은 점점 약해지고 주위에 빛이 더 이상 유입되지 않는 곳부터 케번에서 동굴로 바뀐다. 따라서 햇빛이 없는 야간에는 케번이라는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스쿠바 장비를 사용하여 이런 독특한 세계를 탐험하기 위해서는 동굴 다이버가 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동굴 다이빙에 대한 오해는 한번도 동굴 다이빙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시작된다. 사람들은 흔히 동굴 다이빙은 물이 채워져 있고 시야가 나쁜 좁은 통로를 작은 라이트를 들고 기어 다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대부분의 동굴 다이빙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많은 동굴들은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깨끗한 시야를 갖고 있고 자동차 여러 대가 나란히 지나갈 수 있을 만큼 넓은 통로를 갖고 있다.
스포츠 다이버들이 동굴 다이버를 바라보는 시각은 일반인들이 스포츠 다이버들이 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참으로 위험한 짓을 한다고 불안하게 바라보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스포츠 다이빙과 같이 동굴 다이빙 역시 적절한 교육과 절차를 따른다면 안전하며 스포츠 다이빙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동을 얻을 수 있다. 

수중동굴은 생각보다 넓다 

 케번에서도 동굴의 감동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왜 동굴 다이빙을 하는가?

사람들이 동굴 다이빙을 하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일반적인 이유로는 아름다운 동굴 조형물을 즐기거나 학술적인 목적 또는 탐험을 즐기기 위해서 일 것이다.


동굴의 아름다움

동굴은 아름답다. 동굴은 동굴 다이빙을 즐기는 다이버처럼 각기 다양한 고유의 특성을 갖고 있어서 동굴마다 그 경관과 느낌이 다르다. 다이버들은 종유석과 석순들처럼 복잡하고 미묘한 동굴 생성물들이나 점토질의 경사면 등을 좋아하기도 하고, 반복적으로 정렬된 생성물들의 형태나 색상을 좋아하기도 한다.


수리학과 지질학

수중 동굴의 수리학과 지질학은 매우 흥미롭다. 동굴 다이빙은 사람들에게 우리가 먹는 물은 어디서 오는지, 지하에서는 물이 어떻게 이동하는지, 흐르는 물의 강력한 힘에 의해 만들어지는 지하의 조각품 등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준다. 

동굴 생성물은 신이 자연이 창조한 예술작품이다

 탐험

동굴은 다이버들에게 탐험과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마법과도 같은 장소이다. 이미 탐사된 동굴조차도 무한한 신비감을 불러일으킨다. 사람들에게 왜 다이빙을 하느냐고 물으면 많은 사람들이 탐험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아무도 가보지 않은 곳을 가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다. 세계에는 아직도 탐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수천 개의 동굴이 존재한다. 동굴은 상상만 해도 흥분되는 대상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대부분의 동굴들은 입구에 도달하기 위해서 장시간 걷거나, 계단을 올라가거나, 배를 타고 가야만 하는 원거리에 위치한다. 따라서 동굴 다이버들은 많은 장비를 효과적으로 옮기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동굴 다이빙 장비들을 동굴까지 옮기는 일이 동굴 다이빙 자체보다도 어려운 경우가 많다. 하지만 때로는 이런 과정 자체 역시 흥미로운 탐험의 일부분이다.
동굴 다이빙 방법은 매우 복잡하며 특히 다이버들이 지하로 더 깊이 들어갈수록 복잡해진다. 많은 사람들은 복잡한 다이빙을 계획하고 안전하게 실행해 나가는 과정을 즐긴다. 신중하게 준비하는 것은 모든 다이빙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더욱이 천정이 있는 환경에서 다이빙을 할 경우에는 특히 더 중요하다.


과학적인 탐사

동굴은 지구의 역사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축약된 창문이다. 동굴 다이버들은 지질학적인 역사와 물에 의해 만들어진 지하통로에 흥미를 느낀다. 동굴 안에서는 많은 화석과 인위적인 가공물들이 발견되며 대부분 외부의 영향이 없었기 때문에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근래에 과학 다이버들은 수중 동굴 내에서 해당 동굴 환경에서만 존재하는 고유 생물들을 다수 발견하였다. 수많은 종류의 박테리아와 동물들이 새롭게 발견되고 분류되었다. 이런 발견들은 과학의 발전을 촉진시켜서 가혹한 기후에서 생물들이 어떻게 진화하는가에 대하여 새롭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과학 다이버들은 식수의 품질을 보존하는 것, 질산염의 수준을 낮추는 것, 지하수 지역을 보존하는 것들과 같은 환경적으로 중요한 문제들에 관해서도 연구를 한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이런 문제점들은 대부분 과거 수십 년 간에 걸쳐 발생한 결과이다. 과학자들은 실제로 지하수 층에 들어가서 환경을 파괴할 수 있는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방법을 찾거나 인간의 활동에 의한 영향을 직접 관찰하기도 한다. 미래에 다가오는 문제점들은 교육과 환경 관련 법령 제정 등으로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동굴은 과거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역사의 창이다

 간략한 역사

동굴 다이빙의 역사는 매우 방대하다. 짤막한 소개 기사 정도로 동굴 다이빙의 역사를 소개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동굴 다이빙의 기원은 초기 영국에서 썸프(sump) 다이빙을 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육상 동굴 탐험가들은 동굴 통로에 물이 채워져서 더 이상 진입할 수 없는 구간을 여러 가지 특수 기술을 활용하여 통과함으로써 육상 동굴 구간을 더 탐험할 수 있도록 하곤 했다. 초기의 이런 웅덩이에서 실시했던 다이빙은 현재의 동굴 다이빙과는 크게 달랐다.
스쿠바 다이빙 장비가 보급되면서 오늘날과 같은 동굴 다이빙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서 스포츠 동굴 다이빙은 급속히 대중화 되었고 쉑 액슬리(Sheck Exley)와 같은 사람들은 체계적인 동굴 다이빙 절차와 기술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쉑 액슬리(Sheck Exley)가 저술한 기초 동굴 다이빙: 생존의 청사진(Basic Cave Diving : A Blueprint for Survival)에서는 사고 분석을 토대로 도출해낸 여러 가지 절차들에 대하여 기술하였다. 당시에는 동굴 다이빙을 위해 특별히 고안된 장비들이 없었으며 대신 탐험에 필요한 장비들을 다이버들이 직접 개발하거나 라이트, 릴, 부력조절기 등 사용 가능한 장비들을 개조하여 사용하였다.
최근에는 동굴 다이빙 장비와 절차들이 급속히 발전하여 지하 세계로 상당히 먼 거리를 진입할 수 있게 되었다. 라이트는 더 작고, 더 밝으며 고장 날 확률도 더 낮아졌다. 신뢰도가 높아진 다이버 추진장치(DPV)와 재호흡기 등을 사용하여 수중에 더 오래 체류하고 더 멀리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다이버의 동굴 진입 한계는 다이버의 의지와 지원 환경에 따라 결정된다.
동굴 다이빙은 이러한 준비, 노력, 그리고 숙달에 대한 보상이다. 적절한 교육과 경험을 갖추지 않고 단지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기 위한 목적으로 무모하게 시도해서는 안 된다. 동굴 다이버는 자신의 명확한 동기에 대해 자문해보고 함께 동굴에 들어갈 동료들 중에서 이런 잘못된 동기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필요한 모든 준비는 되어 있는지 등을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염분약층에 의해 위쪽의 시야가 흐려진 상태

 동굴의 종류

실제로 동굴은 지구상 어디에나 존재한다. 동굴의 종류는 용해 동굴(solution caves), 썸프(sumps), 갱도(mines), 얼음 동굴(ice caves), 블루홀(blue holes), 바다 동굴(sea caves), 용암 동굴(lava tubes), 산호 동굴(coral caves) 등으로 구분한다.


용해 동굴

용해 동굴(solution caves)은 물에 잘 녹는 암석인 석회암 지역에서 발견된다. 대부분의 용해 동굴은 산성물이 지하에 흡수되어 흐르는 공간의 무기물을 용해시킴으로써 형성된다. 일부 공기 공간이 존재하는 동굴은 강의 골짜기나 협곡과 비슷한 반면에 물로 가득 찬 동굴은 관 모양을 형성한다. 이렇게 암석이 용해되는 과정은 매우 천천히 진행된다. 대부분의 용해 동굴은 수십만 년에 걸쳐서 형성된다.
일부 용해 동굴은 열수(hydrothermal) 활동에 의해 형성되기도 한다. 이런 열수에 의해 형성된 동굴은 일반적인 용해 동굴보다 훨씬 빠르게 형성된다고 알려져 있으며 독특한 형태를 띤다. 용해 동굴 중에는 오랜 기간 동안 지하수에 의해 용해된 다음 공기가 유입되기도 하고 일부 동굴은 계속 물로 채워져 있기도 한다. 동굴 내에 형성되는 동굴생성물들은 동굴이 공기 중에 노출되어 있는 동안 형성된다. 동굴 생성물로는 종유석(stalactites), 석순(stalagmites), 석주(columns), 유석(flowstone), 종유관(soda straws) 등이 있다.
염분약층(haloclines)은 바다와 근접한 용해 동굴에서 발견된다. 해수는 민물보다 무겁기 때문에 아래쪽으로 가라앉고 민물은 위로 올라가는 경향이 있다. 이 두 종류의 수계가 마주치는 층을 염분약층이라고 한다. 해수와 민물은 밀도가 다르기 때문에 염분약층으로 통과하는 빛은 약간 굴절되어 물에 기름이 떠있는 것과 같이 보인다.

용해 동굴은 수중 동굴 종류 중에서 가장 넓다. 대개 통로는 여러 갈래로 분기되며 지하로 수 킬로미터까지 연장된다. 미로와 같은 수중 동굴에서 길을 잃어버리면 매우 위험하다. 동굴 안으로 진입하는 것은 매우 쉽지만 안전을 보장 받기 위해서는 훈련과 주변 인식 능력이 필요하다.

 

일부 수중 동굴은 수십킬로미터까지 연장되는 매우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다.

입구의 형태

육상에서 용해 동굴로 들어가는 입구의 형태는 다양하다. 입구는 종류에 따라 각기 고유의 특성을 갖고 있는데 다이버들은 그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 일반적인 입구 형태로는 샘(springs), 사이펀(siphons), 씽크홀(sinkholes), 씨노떼(cenotes) 등이 있다.



샘(spring)이란 땅 속에서 물이 솟아 나오는 곳을 말한다. 이렇게 솟아나온 물은 대개 강으로 유입된다. 그러나 이런 장소는 샘물 특유의 흐름이 나타난다. 수면은 물이 끓어오르는 것처럼 보이고 물 웅덩이를 형성한다.
역방향 샘(reversing springs)은 동굴로부터 물이 나오는 것을 멈추고 다시 안으로 물이 흘러 들어가게 되는 형태를 말한다. 역방향 샘은 계절적으로, 시간대 별로 또는 돌발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강 바닥의 변화, 해수면의 변화 등에 의해서도 역방향 샘이 발생하기도 한다. 샘(spring)으로 진입하기 전에 가능한 많은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중요하다.
샘(spring)의 입구는 비교적 퇴적물이 적다. 퇴적물이 휘저어진다 해도 대개 흐름을 따라 밖으로 빠져나간다. 샘(spring)에서는 물의 흐름에 따라 입출수할 때 더 힘들 수도 있는데, 이런 문제 등으로 1/3 법칙 이외에 보수적인 절차를 추가하기도 한다.
 

샘으로 진입하는 재호흡기 동굴 다이버

사이펀

사이펀(siphon)은 물이 동굴 안으로 흘러 들어가는 곳이다. 사이펀에서 다이빙 할 경우에는 다이버가 일반적으로 진입할 때보다 출수할 때 더 많은 공기를 소모하게 된다. 동굴 안으로 물이 흘러 들어가기 때문에 입구에서 퇴적물이 휘저어질 경우 동굴 안으로 유입되어 시야가 탁해질 가능성이 있다.
사이펀은 샘(spring)보다 부유물이 많은 경우가 일반적이다. 나뭇가지, 식물, 퇴적물 등이 사이펀 안으로 유입될 수 있으며 엉키거나 상해를 입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씽크홀과 씨노떼

용해 동굴은 서서히 만들어지므로 때로는 변화가 일어난다. 동굴의 천정 부분은 약하기 때문에 무너져서 씽크홀(sinkhole)을 형성하기도 한다. 지상에서 보면 이 구멍은 움푹 들어간 구덩이와 같이 보이고 때로는 물에 잠겨 있을 수 있다. 따라서 물이 가득찬 씽크홀은 연못처럼 보인다.
씽크홀은 동굴 통로의 상대적인 위치에 따라 인라인(inline), 옵셋(offset), 클로즈드(closed)로 구분한다. 인라인(inline)은 동굴 통로 중앙이 붕괴된 형태이며 옵셋(offset)은 통로 옆쪽이 붕괴된 것이다. 붕괴된 부분에 의해 동굴 입구가 막혀있다면 클로즈드(closed)라고 한다. 대부분의 씽크홀에는 천정을 형성하던 많은 양의 토사들이 무너져 내려서 원추형을 형성한다.
일반적으로 씽크홀에는 두 개 이상의 통로가 형성된다. 물의 흐름이 있다면 물이 흘러나오는 방향이 업스트림(upstream)이고 물이 흘러 들어가는 방향이 다운스트림이다(downstream). 이 두 가지 씽크홀의 특성과 위험성은 샘(springs)과 사이펀(siphons)의 특성 및 위험성과 일치한다.

씨노떼(cenote)라는 단어는 스페인어로 우물이나 지하수가 노출된 부분을 의미한다. 많은 씨노떼(cenote)에서는 관광객들이 수영을 하거나 동물들 또는 지역 사람들의 식수원이 되기도 한다.  다이버들은 가능한 최근의 정확한 정보들을 수집하고 다이빙 전에 주변을 자세히 관찰해야 한다. 

씨노떼 입구의 케이번 구간

썸프

썸프(sump) 다이빙은 육상 동굴에서 물이 채워진 통로가 나타날 경우 통과하기 위해 잠수 장비를 사용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대부분의 썸프 다이빙은 물이 채워지지 않은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가로지르기 위해 한다. 일반적으로 썸프 다이버들은 동굴 다이버들과는 다른 장비를 사용한다. 썸프 다이버들은 동굴을 걷고, 포복하고, 기어오르기 때문에 몸에 달라붙고 가벼운 장비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일반적으로 썸프 다이빙은 동굴 다이빙 보다 짧지만 항상 표준 동굴 다이빙에서의 안전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

 

광산(Mines)

근래에는 물로 채워진 광산(Mines)의 광산에서 다이빙 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특히 자연 동굴이 없거나 접근하기 불가능한 지역에서는 더욱 성행하고 있다. 광산에서의 다이빙은 근본적으로 동굴 다이빙과 같지만 다이빙을 시도하기 전에 광산의 안전성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져야 한다.
광산은 인간이 만들어놓은 구조물로 굴착하는 과정에서 폭약이나 대형 기계들이 사용된다. 이런 과정에서 주변 암반의 자연적인 힘의 균형이 교란될 수 있기 때문에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며 특히 설치된 버팀목이 약화된 곳이나 사람들이 방치하여 엉키기 쉬운 전깃줄, 케이블, 로프 등이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광산은 터널 광산, 수직 광산, 노천 광산의 세 가지 형태가 있다. 노천 광산은 천정이 없는 형태이므로 여기서는dureltj이 교재에서는 터널 광산과 수직 광산에 대하여 살펴본다. 터널 광산은 비교적 수평 형태로 지하로 뚫려있다. 이런 터널은 대개 길이가 길고 분기되기도 한다. 때로는 터널 끝에서 수직 갱도와 연결되기도 하고 구조가 미로와 같이 복잡한 경우도 있다.
수직 광산은 수직 형태로 지하로 연결된다. 주로 입구 쪽에 수직으로 짐을 오르내리는 커다란 장치가 설치되어 있다. 이런 환경에서는 구조물이 안정적인지 진입하기 전에 물체가 낙하할 위험성은 없는지 확인해야 한다. 일부 수직 광산은 여러 개의 터널로 연결되기도 한다.

 

얼음 동굴

얼음 동굴(Ice Caves)은 매우 독특한 환경이다. 동굴 다이버들 중에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거나, 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얼음 동굴은 빙하와 빙산 내부로 물이 흐를 때 주위 얼음을 녹여서 동굴 구조가 만들어 지는 것이다. 얼음 동굴은 얼음이 지속적으로 얼거나 녹으면서 스트레스에 의한 균열이나 팽창 등이 발생할 수 있다. 수중 얼음 동굴에서의 다이빙은 붕괴, 저체온, 역류 등의 위험성 때문에 권장하지 않는다.


블루 홀

블루 홀(Blue Holes)이란 해저 바닥이 둥글게 파인 곳을 말한다. 이렇게 파인 곳이 깊은 수심으로 연결된 경우에 어둡고 푸른색을 띄기 때문에 블루 홀이라 불린다. 이런 동굴들은 해수면이 지금보다 훨씬 낮았던 빙하기에 형성되었기 때문에 바닥이 200m 이상의 깊이까지 연결되기도 한다.
블루 홀의 형성 과정은 용해 동굴과 유사하며 내부에는 비슷한 동굴 생성물들이 나타난다. 블루 홀에서 다른 수평 통로로 연결되기도 하며 상당히 긴 거리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이런 동굴에서는 시야, 수류, 파고 등이 빠르게 변할 수 있다.
모든 바다 동굴에는 다양한 생물들이 살고 있다. 그러나 일부 블루 홀에는 산소가 결핍되어 생물이 살지 못한다. 다이버는 지역의 동물상에 익숙해져야 하며 블루 홀에 진입하기 전에 안전과 관련된 규칙들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바다 동굴 

바다 동굴(Sea Caves)은 파도, 조석 등에 의한 침식작용으로 형성된다. 이들 바다 동굴은 대개 길이가 길지 않지만 많은 해양생물들이 서식하고 있다. 바다 동굴을 형성시킨 요인인 파도, 조석 등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용암 동굴 

용암 동굴(Lava Tubes)은 형성기간이 가장 빠른 동굴이다. 용암이 지표면을 흘러내려갈 때 외부 표면이 식으면서 딱딱한 껍질이 형성된다. 그러나 아직 식지 않은 내부의 용암은 계속 흘려내려 속이 빈 터널을 형성하게 됨으로써 용암 동굴이 만들어진다. 용암 동굴은 화산 활동에 의해 형성된 섬 내부 또는 주위에 주로 분포한다. 용암 동굴은 여러 개의 층으로 형성되거나 복잡한 미로와 같이 형성되기도 한다. 

TDI에서 2006년 최초로 탐사한 제주 우도동굴은 용암 동굴이다.

 

용암 동굴 제주 우도동굴의 동굴생성물

산호 동굴 

산호초는 초보 다이버에서부터 숙련된 다이버까지 대중적으로 다이빙을 즐기는 장소이다. 산호초들은 통과할 수 있는 아치 형태의 통로를 형성하기도 한다. 이들 아치들은 대부분 다이버가 입구에서 출구를 볼 수 있을 정도로 짧다. 그러나 일부 산호초의 통로들은 자연광이 미치지 않는 곳도 있다. 이런 형태의 터널을 산호 동굴(Coral Caves)이라고 한다. 이런 동굴에 진입하는 다이버들 역시 일반 동굴에서 필요한 안전 규정들을 준수해야 한다.
동굴은 그 생성요인과 장소에 따라 매우 다양한 모습을 띠고 있다. 따라서 다이버가 느끼는 감동도 동굴에 따라 다르다. 모든 탐험이 그렇듯 잘 모르고 익숙하지 않을 때는 두려움이 앞선다. 그러나 단계적으로 차근차근 배워 나가고 경험을 늘려가면 두려움은 호기심과 감동으로 변하며 그 중독성은 마치 마약과 같다.
동굴 다이빙은 특별한 사람들이 즐기는 극한의 모험이 아니라 남녀노소 누구나 케번에서 풀케이브까지 자신의 수준에 맞게 즐길 수 있는 다이빙이다.
다만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아서 멀고 어렵게만 느껴질 뿐이다. 따라서 동굴 다이빙의 감동은 용기 있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신의 선물이기도 하다.
다음 호에서는 동굴 다이빙을 즐기기 위해 거쳐야 하는 교육 과정에 대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동굴 다이빙을 즐기는 여성 다이버

※ TDI에서는 매년 동굴 다이빙 교육과 멕시코/플로리다 원정을 진행하고 있다. 올해는 5월 18일~27일 멕시코 동굴 다이빙을 진행한다. www.tdisdi.co.kr

글 성재원 / 사진 오경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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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킨 스쿠버 다이빙의 역사 



 

1. 다이빙의 역사   

 

지구는 45억년전에 생성 되었고 바다가 생기는 데에는 그로부터 무려 수억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아직까지도 논란의 여지는 남아 있지만 긴 지구의 역사와 비교 한다면 불과 얼마 전인 약 600만년전 쯤에 직립 보행을 하는 인류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유인원들이 지구상에 출현하기 시작 하였다.

물론 지구 최초의 동물다운 바다동물은 인류의 조상보다는 10억년 전 쯤에 바다에 나타났다.
따라서 생명의 기원이 바다인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 이지만, 

지능을 가진 인류의 직계 조상들도 바다로부터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학설도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인간이 바다와 깊은 연관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인간과 비슷한 사고를 가진 인어부족이나 영화 어비스(Abyss)에 나오는 물인간 등을 주제로 한 공상적인 글이나 영화들이 만들어져 바다의 신비를 더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전설이나 소설과는 달리 실제로 과거에 존재하였던 사실은 현재에 기록으로 남아 있거나 과거를 과학적으로 입증할 만한 증거가 있을 때에만 역사가 되어 전해질 수 있다.

 

현생 인류와 가장 많이 닮은 직계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원시인들은 지금으로부터 약 10만년 전에 지구상에 살았던 호모(Homo 라고 일컫는 속에는 서로 다른 원시인류의 무리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한 무리가 오늘날 인류로 진화 하였다. 인간의 학명은 Homo sapiens 임)인인데,

이들을 인류라 한다면 아마 물가에 살았던 최초의 무리에서 최초의 다이버가 나왔을 것으로 짐작된다.

 

입증을 할 수는 없지만 먹이가 됨직한 물고기나 조개를 잡기 위해서 또는 적에게 쫓겨 우연히 물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을 계기로 해서 다이빙에 익숙해지고, 점차 그 기술을 발전시켜 후손들에게도 전수하였을 것이다.

 

어쨋든 그 시절의 다이빙은 생존의 한 방편이었지, 레져나 연구의 목적은 아니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물가에 살았던 무리들의 아이들에겐 다이빙이 좋은 놀이 중 하나였을 지도 모른다. 

미국지리학회(National Geographic)의 "자연과 사람들"이라는 TV 시리즈물 중에 "알 기딩스의 상어 이야기"에 나오는 요즘의 타이티 어린이들 처럼 거북이나 상어의 등을 타고 잠수 놀이를 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직업적인 다이빙은 5,000년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그 당시의 잠수는 매우 얕은 물에서 이루어졌는데, 사람들은 숨을 참고 가능한 많은 시간을 얻고자 함이었다. 

가장 원시적인 이러한 방법으로 그들은 해산물 채취나 간단한 수중 작업 등을 하였다.

 

언제부터 사람들이 수영을 했는지 기록되어 있진 않지만, 기원전 6세기경부터 원시 예술 작품(벽화)에 초기 물에서 활동을 한 그림이 전해진다. 

카이로에 있는 역사 박물관에서 기원전 1,500년경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3,500년전에 이미 진주조개잡이 다이버들이 홍해에서 활약하였다는 옛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도 최초의 다이빙 기록과는 많은 시차가 있는데, 

기원전 3,000년전에 이미 그리스의 크레타(Crete)에는 스폰지(Sponge:바다 속에 사는 해면동물을 일컬으며 지중해 연안에서는 오랜 옛날부터 마모용 또는 수분 흡수용으로 사용하였음. 

합성 스폰지도 이 동물의 이름에서 유래하였음)채취 다이버가 있었다고 한다.

이들이 기록으로 남은 역사상 세계 최초의 산업 다이버(Commercial Diver)이리라.

 


초기 다이버들은 군사 활동을 목적으로 하였다. 

즉 닷줄을 끊는 것이나, 선체에 구멍을 뚫는다 든지, 항구 보호 시설 건설 등의 활동이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지금의 레바논인 페니키아의 도시(튀르스)를 정복하려 했을 때 적지의 수중 장애물을 다이버를 보내 제거하였다. 

역사적 기록에는 기원전 333년에 유리로 된 다이빙 벨(Diving Bell)을 타고 알렉산더 대왕 자신이 직접 수중으로 들어가 자신의 다이버들이 일하는 것을 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 고대 앗시리아인들(Assirians)은 다이빙을 할 때 짐승의 내장으로 만든 공기주머니를 사용하였는데 이것이 최초의 인공호흡기의 형태가 아닌가 한다.



 


 

2.수중호흡장치의 개발

 

1531년경에 최초의 실용면을 고려하여 개발되어진 형태가 종의 모양처럼 생긴 잠수종 이었다.

이 모양의 잠수기는 단순히 종을 물 속에 담그면서 남아있는 종 속의 공기를 사용하는 잠수 형태로 발전을 거듭하여 16,17,18세기 동안 종 모양의 잠수기는 계속 발달되었고, 상업적으로도 널리 사용되었다.

 

이런 형태의 종 모양 잠수기는 어느 정도의 시간 즉 몇 분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 다이버를 수중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었다. 

초기 종모양 잠수기는 일정시간 동안 다이버가 숨을 쉴 수 있도록 공기를 잡아두기 위해 물통을 수직으로 가라 앉히기 위해 자체적으로 중량을 가진 물체로 만들어져야만 했다. 

이 원리는 물이 가득한 통에 컵을 거꾸로 가라앉혀서 컵속의 공기를 사용하는 잠수 방법이라면 이해를 쉽게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컵 안의 공기는 주위의 물의 압력을 받고 갇혀 있으나 또한 주위를 둘러싼 물의 압력을 받는 것이다. 

배나 움직이지 않는 수면 구조물에서 케이블로 매달려지는 종모양 잠수기는 지상에서 단순히 종을 들어주는, 거의 움직임이 없는 고정된 장치로서 그 속의 잠수부는 움직임이 한정된다.

그리고 자신을 지탱해 줄 수 있는 장치를 가진 도구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종처럼 생긴 잠수기 안에 매달려 있으면서 잠수기 속에서 머무르고 작업을 했다. 

또는 숨을 참고 짧은 거리를 움직일 수 있는 정도였다.

 

1680년대 William Pphipps가 카리브해에서 전설로 전해진 보물을 찾기 위해 고용된 자신의 일꾼들에게 공기를 공급 할 목적으로 좀 더 무게가 있는 통을 만들어 냄으로써 잠수기를 개선시켰다.

 

1690년대에 에드먼드 할레이(Edmund Halley:유명한 천문학자)는 지상으로부터 공기를 공급해 줄 수 있도록 고안된 공기를 담은 무거운 큰 통들을 연결하여 공기를 공급할 수 있는 종모양 잠수기를 개발하였다.

 

그가 디자인한 잠수기에 Halley와 4명의 동료가 템즈강 20(60피트)미터 밑 수중 바닥에서 1시간 30분 가까이 머물러 있을 수 있었고,

 26년 후에 그의 종모양 잠수기를 개선하여 23미터(66피트) 깊이에서 4시간 이상 머물렀다.

1715년에 존 레드브릿지(John Lethbridge:다른 영국인)는 완벽하게 밀봉된 개인용 다이빙 캡슐을 개발하였다. 

물의 압력을 이겨낼 수 있는 보강된 통에 가죽으로 감싸서 만들어졌는데, 

방수 소매로 팔을 감쌌고 유리로 된 창을 가졌었다.

 


 

그 시대의 대중 잡지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기구들을 사용하여(입었다기 보다는 그안에서) 12 fathoms가 한계인데, 

보통 10 fathoms (60feet)에서 작업하면 작업시간은 적어도 30분 정도라고 묘사했다.

Lethbridg의 디자인에 의거한 몇 개의 유사한 고안품들은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신선한 공기 공급과 기동성 부족이라는 근본적 문제점을 감수 해야했다.

 


근대적인 잠수장비의 등장은 18세기가 시작될 시기에 그 동안 사용되던 방식이 아닌 새로운 발명품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다이빙을 하도록 바꿔 버렸다.

즉 기술의 발달로 새로운 장비들이 잠수 활동에도 사용되어졌는데, 

그 중에서도 압축기의 개발은 새로운 장을 열게 하였다.

 

즉 수동작업에 의한 공기 펌프는 압축된 공기를 다이버에게 공급해 주는 것을 가능하게 했는데 (비록 초기에는 압력 한계가 있었지만) 이로 인해 최초로 실용적인 다이빙용 잠수복이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진보와 개발을 통해서 인양작업 등 수중작업이 쉬워지고 활발해 지기 시작했다. 

대영 제국 연안에는 그 동안 상업활동과 전쟁을 통해서 난파된 많은 선박들이 좌초되어 있었는데, 

모험심 강한 많은 다이버들이 새로 개발된 이러한 장비들을 사용하여 인양하고 이익을 서로 나눔으로써 많은 다이버들이 부자가 되었다.

 

오거스트 시에드(August Siede)는 초기에 실용적인 잠수복을 개발하여 잠수계에 유명해지기 시작했는데 Siede와 몇 사람들이 힘을 합쳐 1800년대 초기에 성공적인 다이빙 장비를 제작하게 되었다.

 

딘 형제(존과 찰스:John & Charles)는 화재로 인하여 연기가 가득한 화재 현장에 들어가 구조할 목적으로 장비를 개발하여 특허를 받았다.

 

이 후에 이 형제는 물 속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장비를 개조하여 이를 Deanes’Patent Diving Dress로 이름이 붙여지고 시중에 알려지게 되었다.

 

Deane형제의 다이빙복은 다이버의 보호를 위한 무거운 천과 밖을 볼 수 있는 몇 개의 창을 가진 헬멧 그리고 압축된 공기를 전해주기 위해 연결된 호스로 구성되었다. 

헬멧은 다이버의 어깨에 장착되어 자체 무게와 허리띠로 쓰이는 가죽으로 고정되었다.

이런 배열의 장비는 자체에 중대한 결점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다이버가 실수로 몸을 기울이게 되면 헬멧에 물이 차고 공기가 빠져 나간다.
이러한 다이버의 실수를 예방하고 대처하기 위해 Deane형제는 장비의 사용법을 정리하여 그들의 다이빙복에 대한 교육책자를 만들었고 이 교재가 다이빙계에 화제가 되었다. 

이로 인해 그 책은 활자화 된 최초의 다이빙 입문서가 되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August Siebe의 개조품은 색상을 가진 허리까지 내려오도록 만들어진 방수가 되는 천으로 헬멧을 봉인했다. 

Siebe는 잠수복을 개선한 사람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헬멧 조립을 연구한 가치가 인정되고 초기의 표준이 되는 깊은 수심용 다이빙복의 원조처럼 인식되어졌다.


 

2명의 프랑스인 로그아롤(Messrs Rouquayrol)과 드네이로스(Denayrouse)는 지상으로부터 공기 공급을 받는 형태의 잠수 장비인 공기 공급 호스를 가진 헬멧형 다이빙복을 고안했는데, 

이 장비의 특징은 비상시에 사용자에게 공기를 공급할 수 있도록 등쪽에 장착된 자체적인 공기 저장 장치를 가지고 있었다.

 

Rouquayrol / Denayrouse 의 개발 장비는 다른 여타의 고안된 잠수 장비와 다른 자동 요구식 밸브를 사용함으로 해서 구분될 수 있다.

1878년에 헨리 프뢰스(Henly Fleuss)가 약 450psig 압력을 가진 통에 압축된 산소와 이산화탄소가 주기적으로 섞이도록 하는 공기 저장통을 사용한 미개방 형태의 장비를 발명하였다.

 

Fleuss의 장비는 영국의 다이버 알렉산더 램버트(Alexander Lambert)가 7번 가 밑의 터널에서 부서져 열린 철문을 닫기 위하여 터널을 걸어 다닐 수 있도록 고안되어 1880년경에 성공적으로 이용되었다.

 




 

3.스쿠버(수중 자가 호흡 장치)의 개발



1926년에 함장 쁘리에(Prieur)는 마우스피스와 공기 호스를 장착한 등에 매는 압축공기통을 구상하고 설계하여 특허를 얻었다. 

Le Prieur 장비의 공기통은 2000psig의 압력 공기를 가졌다. 

그러나 자동 요크식 밸브가 장착되어 있지 않아서 많은 공기가 물 속에서 낭비되었다.

 


1943년 에밀 까냥(Emile Gagnan)과 선장 쟈끄-이브 쿠스토(Jacques-Yves Cousteau)가 자신들이 개발한 장비를 아쿠아-렁(Aqua-Lung)이라고 불렀다. 

이 잠수 장비는 압축된 가스 통에 2500psig이상의 압력을 저장하는 압축공기탱크가 2∼3개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 장비의 특징은 흡입식 요구 밸브인 레귤레이터을 사용함으로 해서 그동안 문제점으로 지적된 공기의 사용을 조절할 수 있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Gagnan과 Captain Jacques-Yves Cousteau 장비들은 최초의 실용적인, 즉 지상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을 주는 스쿠바 장비가 되었다. 

스쿠바 역사에는 많은 프랑스인들이 공헌하였는데 위에서 언급한 잠수장비의 발전뿐만 아니라 수영 핀의 발전에도 큰 역할을 하였는데, 

1930년대에 부함장 카를리에(Carlieu)가 Le prieur의 Scuba 장비를 착용하고 물 속에서 수평으로 이동 할 수 있도록 핀을 만들어 냈다.

 


다이빙의 역사는 발명, 발전 그리고 진취적인 사상이 담긴 여정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수중장비의 발전과 탄생은 전쟁과 많은 연관이 있어 왔다는 사실이며,

전쟁을 통해서 짧은 다이빙 역사에 장비의 진보와 이론적 체계를 만들어 왔다는 것이다.

 

앞서 열거한 바와 같이 다이빙의 역사에서도 분야별로 최초의 기록들이 다양하며,

각각은 한편의 드라마와 진배없는 것으로 생존과 모험을 위해 험난한 바다에 도전하여 위험을 극복하면서 작성된 것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다이빙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킨 것은 서양, 특히 유럽이었기 때문에 과거의 다이빙 역사는 자연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유럽의 역사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5.우리나라의 스쿠버다이빙역사


세계 다이빙의 역사를 나열하다 보면 자연 "우리나라 최초의 다이버는 누구일까?" 하는 의문을 떠올리게 되고 더 나아가 우리나라 다이빙의 역사를 더듬게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되었던 석기시대 또는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판정된 바닷가 옛 살림터 주변에는 조개무덤(貝塚)이라는 것이 남아 있어,고대 한국인의 식생활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이곳에서 나온 바다생물의 대부분은 얕은 곳에서 쉽게 채집되는 종류들이긴 하나 다이빙을 하여 채취하였으리라 믿어지는 것들도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기록에 남아 있지는 않지만 우리의 조상도 기원전 3,000년경에 이미 다이빙을 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최초의 다이버는 여자일 가능성이 높다.
"해녀 연구(강대원(1973).한진 문화사.서울)"에 따르면 4세기경에 해녀(해녀는 일본식 용어임. 일본에서는 해녀를 해인(海人), 잠녀(潛女)라고도 하였으나, 우리나라 에서는 잠수(潛嫂)라고 하였음)가 있었다는 고고학적 자료를 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우리나라 해녀가 일본 해녀보다 체질적으로 물에 대한 적응 능력이 월등하고, 

1970년대 당시 한국과 일본 해녀가 모두 3만명인데, 제주도에만 11,000명이 거주하였던 점이나 해녀가 활동하던 지리적인 여건으로 보아 제주도가 해녀의 발상지일 것으로 추정 하였다.


따라서 세계 최초의 여성 다이버는 제주도 출신의 해녀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조선시대에만 하여도 제주도 외에 육지의 남해안에도 많은 해녀들이 활약하였으며, 

당시에도 나잠(裸潛)을 하였던 것 같다.


그러한 근거로써 다산 정약용(定若鏞)이 경상남도 장기현에 유배되었을 당시에 지은 "잠수하는 아가사(兒哥詞)"라는 시가가 있는데 잠수하다 죽은 며느리를 기리는 어느 시아버지의 심정을 적은 것으로 잠수하는 상황을 비교적 잘 묘사하고 있다.



우리나라 다이빙 역사 또한 해군의 유능했던 다이버들에 의해 민간인들에게 전파되었으며,

대학의 모험심 많은 젊은이들에 의해 도입되었고 보급되었다.

 

1963년 3월 대학의 모험심 많은 개척자들에 의해 남대문 근처의 골방에서 "한국스킨스쿠바클럽" 이 창설되었다. 

(김상겸, 이병두) 고려대학교(이병두, 황치효), 연세대 (윤석민, 오윤배), 한양대(노건기, 김광휘), 동국대(차 광), 중앙대에서 스킨스쿠바 다이빙 써클이 생겼다.(1968∼1969)


이 시기의 서울의 다이버라야 100∼200명이었으며, 활동적인 다이버는 고작 30명 내외였고, 

잠수 이론서는 없었으며 장비 또한 형편없었다. 

그러나 다이버들 간에는 매우 우호적이고 낭만적이었다고 원로들은 얘기하고 있다. 

이때 서울에는 (주)엑심 (김광휘) 이라는 장비수입을 겸한 건축자재 수입 가게가 한남동에 있었고, 

우정사(임성기)와 반도스포츠(유영제)가 서울 남대문 시장 앞에 있었다.(한국 최초의 장비점들)

 

1971년 제주도 수중비경을 맛보고, 

1972년 일본인 다이빙 강사와 다이빙을 해 본 김광휘는 1973년 스쿠바 다이빙을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1973년 한국에서도 외국단체로는 처음으로 PADI(코스디렉터: 윌리암스)가 들어와 강사들을 배출하였다.


일본에서 귀국한 김광휘는 1975년 한국에서는 최초로 서귀포 파크관광호텔에 코리아다이빙센터 라는 RESORT SHOP을 창업했다.(김광휘, 이철우, 황치전) 

서로가 합심하지 아니하면 물속을 구경할 수 없었던 그 시절 서울에서는 모든 다이버들이 우정사를 중심으로 장비도 구입하고 정보도 교환을 했다.


안정훈, 정일만, 현용부는 임성기(우정사 대표)를 시켜 홍보하면서 한국 최초의 순수 스쿠바 다이빙 클럽인 "한국잠수동호회"가 1976년 설립되었고(현용부, 정일만, 안정훈, 김인배, 고창근, 임성기, 양태빈, 박순원, 홍근원, 오성원, 김인영, 오윤배, 정연평, 이건, 한형도, 장석은, 김과윤, 오경민, 장준량, 이병수, 김희일) 현재까지 일부 회원이 남아 있다.


이때 경북에도 경북잠수동호회(대구잠수동호회)가 생겼으며, 

자매결연을 맺어 서로 참목을 도모하고, 

경북의 스포츠 스쿠바 다이빙 보급에 일익을 담당했다.(정호응, 변춘부, 김호상, 임성지, 박병훈, 배칠근, 이태균, 시흥기, 이석근)


1977년 김광휘와 조길도, 김현웅이 배출시킨 김영수외 그 문화생들로 우리나라 2번째 순수취미 스쿠바 다이빙 클럽인 "판코리아다이빙클럽"이 결성되었고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한편으로, 연세대 스킨스쿠바 써클 창설의 주축중 한 사람이었던 윤석민을 중심으로 오윤배, 안정훈, 이요섭은 미도파백화점 부근에 스쿠바 다이빙 샵인 "바다상사"를 창업했으며, 

윤석민과 이요섭은 전길남 NAUI 강사(재미 공학박사)로부터 강사자격을 취득했다.(1978년) 

이들이 현재"NAUI KOREA"의 주축 멤버들이다.

 

잠수동호회 멤버였던 김인영은(SCUBA DIVER지 발행인) 1979년 잠수이론이 체계화되지 못한 이땅에 "스킨,스쿠바 다이빙 원리"라는 잠수 이론서를 최초로 집필하여 발행하므로써 잠수계에 기원이 되는 한획을 그었다.(80년대 잠수이론 교육시 단체와 상관없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책 임)


1979년 김봉제, 조현종, 차광, 김창환을 중심으로 창설된 "KUDA(한국잠수협회)"가 유일하게 문교부에 사단법인으로 등록되었다. 

한때 무분별한 강사 자격증의 남발로 잠수계에 비난을 받았던 KUDA는 지봉규(PADI강사, 조오련 수영코치, IDEA KOREA 초대대표)원로가 KUDA 기술위원장이 되어 1989년 DITC(Diving Instructos Training College) 제도를 만들어 92년까지 이론과 기술을 겸비한 강사들을 배출하므로써 KUDA 인물 역사상 한 획을 그은 사람이다.

1950년 6.25사변과 함께 우리나라 해군에 스쿠바 다이빙 보급되어 군복무 중 다이빙을 배워 전역후에도 계속하였거나, 그들로부터 배운 젊은이들, 그 모험심 많은 젊은이들이 써클과 클럽을 만들었던 1960년대 까지를 스쿠바 다이빙의 도입기로 본다면, 1970년대는 초창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때 뿌리를 내린 단체를 중심으로 1980년대에는 스쿠바 다이빙이 광범위하게 보급되었다.


1981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강사(기형희)가 탄생되었고 

1983년에는 윤희성, 김재영, 김용중, 박종섭,하승수 를 중심으로 10여개 대학을 묶은 "전국대학잠수연합회"가 결성 되었으며, 

1990년까지 한강수중탐사, 휴전선에서 여의도까지 수중탐사, 일본원정 등 많은 일화를 남겼다.


"전.대 잠수연합"을 창설했던 이들은 1989년 일본으로 건너가서 BSAC 강사가 되었으며 

BSAC를 국내에 도입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1994년 7월 BSAC는 "BSAC KOREA"(대표 박종섭)로 독립하게 된다.

1987년 이전까지는 잠수하면 수중사냥과 채집이 거의 전부였다. 

1980년 초까지는 어촌의 인심도 좋았으나 무분별한 남획으로 잠수할 수 있는 POINT가 없어지던 이시기에 초창기 잠수를 도입했던 우리나라 잠수계 엘리트들을 중심으로 1987년 "한국수중사진연구회(한국수중사진영상협회)"가 창설되었다.


이와 때를 같이해서 스킨스쿠바다이빙원리라는 잠수이론서를 집필했던 김인영은 1987년 9월에 수중전문지 "SCUBA DIVER"를 격월간으로 발행하게된다. 

잠수관련 소식이 전무했던 그 시절 잠수이론, 수중사진, 외국소식등을 전달하여 우리나라 수중인들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렸으며 지금까지 많은 잠수인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1990년 이전에는 잠수하면 일부 특수계층에만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으나, 

90년 이후 국가의 발전과 각종 메스컴들의 영향으로 회사원, 자영업을 하는 일반인들에게까지 급속도로 보급되었다.

 

1992년 6월26일 드디어 한국에도 수중계의 두뇌 집단이 생겨났다.

잠수와 관련된 의학자, 생물학자, 공학자, 학술계, 수중영상전문가, 잠수관련 특수부대 책임자들이 모여 "한국수중과학회(KOSUST)"를 창립했다.(고철환 서울대교수, 제종길 해양연구소 연구원, 윤석근, 이병두, 정의욱, 김광택등 33명)


1992년 7월 썬스포츠 김광휘는 SCUBAPRO에서 보급하는 "SEA(SCUBAPRO EDUCATIONAL ASSOCIATION)"을 도입했으며, 1983년 전국대학잠수연합을 주도했던 김재영은 1994년 일본에서 SSI를 도입하였다.

 

또한 한국잠수협회(KUDA) 위상을 한단계 높였던 지봉규는 1997년 미국 잠수교육 협회인 " IDEA(International Diving Educators Association) "을 김석철(현 IDEA-ASIA대표)로 하여금 국내에 도입케 하였다. 

그후 PDIC, NASE등 외국의 다이빙 단체들이 국내에 도입 되었으며, 앞으로로 계속 도입될 전망이다.

잠수장비가 부족했고 검정 슈트가 유행했던 50,60,70년대를 거쳐 잠수가 본격 도입되었고, 

장비들이 좋아졌던 80,90년대 초반에 이어 우리는 이제 컴퓨터게이지 시대를 지나서 NITROX, 재호흡기 시대를 살고 있다.

 

1970년대 말에 수 백명도 안 되던 스포츠다이빙인구는 1980년대 말에 6-7천명 정도로 늘어났으며,

1990년대에 들어 와서는 과거 20년 동안 생겼던 다이버가 한 해에 생기기 시작했으며, 

IMF직전에는 한 해에 1만명 정도씩 탄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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