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차례를 지낸 즉시 나는 누가 말리기라도 하는 듯이 바로 성묘를 다녀 왔다.
벼르던 첫 번째 해외 다이빙의 기회가 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막역한 친구요 다이빙 버디인 P 와 함께 마닐라 행 비행기에 올랐다.
영화에서나 봤던 그 맑은 바다 속으로 들어 간다는 생각에 나는 흥분으로 며칠을 밤 잠을 설쳤다.
물 건너 간다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고,
국제선 비행기도 당연 처음이었다.
그때만 해도 국제선 비행기엔 흡연석이 있었다.
우리는 금연석에 앉았던 관계로 P와 나는 수시로 화장실 앞 복도로 가서 담배를 꼬나 물었다.
복도에는 백인, 흑인, 황인종, 할 것 없이 여행에 들뜬 젊은 청년들이 떼서리로 몰려서서 담배를 벅벅 피워대고 있었다.
물론 되지도 않는 영어를 씨부렁거리는 재미도 있었다.
“헤이 어데 가노?”
“응, 어디긴 어디야, 필리핀이지.”
“맞아 그렇군.”
우헤헤, 킬킬킬, 푸히히,
젊음은 모두 들떠 있었다.
마닐라 아키노공항에서 나를 처음 맞이한 것은 필리핀의 독특한 향료 냄새였다.
필리핀은 공기에서도 그 냄새가 짙게 배여 있었다.
비행기의 트랩을 내려 서기도 전에 필리핀 음식의 그 독특한 향료의 냄새가 코에 와 닿았으니까.
필리핀에 대한 나의 첫 느낌은, 뭐랄까?
아주 익숙한 곳에 와 있다는 느낌이었다.
적당히 칙칙한 분위기에,
공항에는 삼성로고가 찍힌 카트들,
우리보다는 체구가 좀 작은 필리핀 사람들,
러닝셔츠와 반바지를 입은 포터들의 어깨와 종아리에 맺혀 있던 땀방울.
아키노공항은 마치 번잡한 시골 역사 같았다.
7,000여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
인구 8,800여 만 명,
한반도의 1.3배,
타갈로그어가 국어이지만 필리핀어와 영어가 매트로 마닐라 전역에 걸쳐 교육과 비즈니스에 사용되고 있는 나라,
실상 이 나라가 영어를 공용어로 한 이유는 부족 간의 말이 달라서 공용어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국민 대다수가 영어를 하지만 국민소득은 높지 않다.
우린 지금 온 나라가 영어에 천박한 추파를 날리고 있고,
일부 넋 나간 식자들은 영어를 공용어로 못해서 몸이 뒤틀릴 지경이지만 영어라는 말을 잘한다고 해서 물건을 사주지는 않는다.
그건 그거고, 다이버라면 필리핀을 외면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필리핀처럼 다양한 수중 포인트를 가지고 있는 나라는 아마 지구상에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리조트에서 보낸 승합차를 타고 바탕가스라는 항구도시로 이동해서 보트로 우리가 예약한 리조트로 들어갔다.
첫 열대바다를 만났던 느낌은 또 뭐 랄까.
눈앞이 확 트이는 느낌이었다.
물이 어쩜 이렇게 맑을 수 있을까라는 신음이 저절로 터졌으니까.
마치 맑은 수족관을 들여다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마침 건기였고 바다도 잔잔했다.
리조트의 다이빙 서비스도 인상적이었다.
동해의 군사작전과도 같은 다이빙에 익숙해 있던 우리로서는 장비 탈, 부착에서부터, 운반, 그리고 식사수발까지 우리나라에선 꿈도 꿀 수 없는 서비스가 제공되고 있었다.
물론 그런 서비스를 받아 본 적이 없는 우리는 조금 쑥스럽기까지 했었다.
그들의 서비스는 모든 것을 스스로 함에 익숙해 있던 우리를 허탈하게 한 것이다.
갑자기 천박한 귀족이 된 듯한 느낌이었으니까.
그러나 사람은 곧 환경에 길들여지는 것이다.
우리는 금방 조국의 현실을 잊어 버리고 조금씩 거드름을 피우기 시작했다.
다이빙하기 전 몸만 일어서면 그들은 달려와 장비를 입혀 줬다.
우린 물로 떨어져서 오리발 질과 눈알만 돌리면 되는 것이었다.
보트로 올라갈 때도 누워 있으면 들어서 올려 지는 느낌을 받았을 정도였으니까.
방카(필리핀 전통 배)를 몰고 다이빙을 나가면 다이버 숫자보다 곱절의 리조트 직원들이 따라나섰다.
다이빙을 할 때,
남자들은 우리를 앞뒤에서 가이드를 했으며, 여자들은 섬에 내려 식사를 준비했다.
우리는 그 밥을 먹고는 귀족이나 되는 것처럼 거드름을 부리며 이쑤시개를 우아하게 쑤셔 대곤 했다.
방카에서 물위로 떨어져 고개를 박으면 눈앞에 펼쳐지던 수중세계는 우리의 바다 현실과는 크게 달랐다.
수심 3~40미터가 족히 되는 바닥이, 잡힐 듯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었다.
사방이 확 트인 산위의 정자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는 것같이 가슴이 확 트이는 것이었다.
물론 이후에 해외를 들락거리면서 경험한 바다는 시기와 상태에 따라 시야가 좋지 못할 때도 많았지만 전체적으로 우리의 바다와는 비교할 수 없는 시야를 가지고 있었다.
“시야가 너무 부러워, 우리나라도 여기 만큼 시야가 된다면….”
내가 부러워서 중얼거렸다.
“그러면 우리나라가 아니지 뭐.”
P가 같잖은 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이 이죽거렸다.
하루 3회의 다이빙,
우리는 필리핀가이드의 뒤를 따라 바다 밑으로 내려갔다.
사슴뿔 산호의 군락을 지나,
사람의 뇌와 같이 생겼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뇌 산호,
항아리산호를 지나 바닥으로 내려가면 수많은 물고기들이 스스로의 삶에 바쁜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거의 무채색에 가까운 우리바다의 물고기들과는 달리 열대바다의 물고기들은 화려한 색깔과 무늬로 채워진 몸을 하고 있었다.
▲필리핀 해삼 (수심15미터)
필리핀 아닐라오
ⓒ 도현욱
그중에서도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해삼이었다.
필리핀의 해삼은 누에를 뻥튀기 해 놓은 모양에 크기가 거의 우리나라의 베게 수준이었다.
나는 물속에서 한국 측 가이드 인 L 에게 저게 뭐냐고 몸짓으로 물었다.
L 이 모래 바닥에 글자를 썼다.
‘해삼’
다이빙을 마친 후 L의 보충 설명에 의하면,
그게 바로 우리가 중국 음식점에서 먹는 해삼의 재료란다.
“저걸 말리면 건해삼이 되는데 그걸 중국음식점에서 음식재료로 쓰는 거예요.”
수심 삼십 미터,
수심이 깊어질수록 온 세상이 푸르러지고 있었다.
바다라는 거대한 푸른 필터에 막혀 다른 색들이 죽어가는 것이다.
사방 팔방이 푸른색이다.
더 깊이 내려가면 차츰 회색빛으로 어두워지며 이윽고 캄캄한 어둠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을 것이다.
간혹 카메라의 번쩍이는 스트로보의 불빛이 한 순간 그들의 본래의 색을 잡아 낸다.
그리고 다시 푸른색이다.
들리는 건 자신이 내뿜는 숨소리 뿐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소리마저 머리 속에서 사라져 버리고 침묵의 세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아우성 치는 침묵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앞서가는 다이버들의 실루엣이 꿈결 처럼 아련하다.
가이드는 익숙한 솜씨로 우리를 안내했다.
이곳은 그들이 날마다 떨어지는 일상적인 곳이다.
어디에 어떤 물고기가 있고 어디서 돌아 나와야 하는지를 각인 시켜 놓은 것처럼.
가이드는 반환점을 돌아 정확히 닻을 내려 놓고 있는 방카보트로 우리를 인솔했다.
다이버들이 지닌 장비 중에도 나침반이 있지만 직선으로 가고 오지 않는 한 출발지점을 찾는 데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가이드들이 지형지물을 정확히 숙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우린 거기서 닻줄을 잡고 5분 간 감압하고 올라 왔다.
다이빙시에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물위로 올라오면 전혀 다른 세계로 나온 듯한 느낌을 받는다.
날개가 떨어졌다는 그런 상실감이다.
우리를 따라 나온 리조트의 여자 직원들이 섬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음식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배식이 끝나고 식사가 시작됐다.
한참 먹는 데에만 몰두하고 있다가 주위를 둘러 보니 필리핀 스테프들 모두가 한 곳에 모여 밥을 먹는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밥이 목구멍에 걸렸다.
평등이야말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지향하는 목표가 아닌가.
먹는다는 행위에는 개도 차별하지 않는 것이 우리다.
“재들 왜 저래요? 어이, 밥 안 먹어? 같이 먹어요.”
스태프들이 빙긋이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우리가 다 먹고 난 다음에 먹어요. 저 사람들은 손님들과는 같이 식사를 안 해요, 그냥 드세요.”
물가도 몹시 쌌다.
외국인을 주로 상대하는 리조트라 상대적으로 비싼 곳인데도
우리는 일일이 고국의 물가와 비교해 보고는
한 병이라도 더 많이 먹는 것이 남는 것이라는 기특한 생각으로 저녁마다 구운 고구마 냄새가 나는
한 병에 우리 돈 삼백 원짜리 산미겔 맥주를 미련하게 마셔 댔다.
아마도 필리핀 스태프들은 우리가 저녁마다 술 먹기 시합을 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수중사진도 대책도 없이 많이 찍었다.
보는 것마다 처음이었고, 처음인 것마다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마치 장난감에 배고팠던 아이가 너무 많은 장난감을 받아서 어느 것부터 가지고 놀아야 하는지를 모르는 것처럼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오늘 이후 필리핀이 지도에서 사라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는 미련하게 욕심을 부렸다.
당연히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챙긴 것이 없었다.
꿈 같은 며칠간의 다이빙이 끝나고 김포에 돌아왔을 때엔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아쉬움이 가득했다.
나는 그때부터 필리핀과 열대바다에 대한 열병을 않기 시작했다.
필리핀의 바다를 조국의 바다와 비교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건 절대로 비교할 수도 비교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내가 깨닫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인생에 공짜로 얻어지는 것은 없다.
나는 돌아 오자 마자 세계지도를 펴놓고 다시 열대로 나갈 궁리에 골몰했다.
이런 내게 P는 큰 힘이었다.
두 달도 흐르지 않아 P와 나는 다시 보따리를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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