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장호준 (aqualux199)
 
           
            ▲ jack fish 전갱이류. (수심 5미터)
               필리핀
               군집 회유성 물고기이다.
               ⓒ 장호준
 

설 차례를 지낸 즉시 나는 누가 말리기라도 하는 듯이 바로 성묘를 다녀 왔다.

벼르던 첫 번째 해외 다이빙의 기회가 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막역한 친구요 다이빙 버디인 P 와 함께 마닐라 행 비행기에 올랐다.

 

영화에서나 봤던 그 맑은 바다 속으로 들어 간다는 생각에 나는 흥분으로 며칠을 밤 잠을 설쳤다.

물 건너 간다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고,

국제선 비행기도 당연 처음이었다.

그때만 해도 국제선 비행기엔 흡연석이 있었다.

우리는 금연석에 앉았던 관계로 P와 나는 수시로 화장실 앞 복도로 가서 담배를 꼬나 물었다.

 

복도에는 백인, 흑인, 황인종, 할 것 없이 여행에 들뜬 젊은 청년들이 떼서리로 몰려서서 담배를 벅벅 피워대고 있었다.

물론 되지도 않는 영어를 씨부렁거리는 재미도 있었다.

“헤이 어데 가노?”

“응, 어디긴 어디야, 필리핀이지.”

“맞아 그렇군.”

우헤헤, 킬킬킬, 푸히히,

젊음은 모두 들떠 있었다.

 

마닐라 아키노공항에서 나를 처음 맞이한 것은 필리핀의 독특한 향료 냄새였다.

필리핀은 공기에서도 그 냄새가 짙게 배여 있었다.

비행기의 트랩을 내려 서기도 전에 필리핀 음식의 그 독특한 향료의 냄새가 코에 와 닿았으니까.

 

필리핀에 대한 나의 첫 느낌은, 뭐랄까? 

아주 익숙한 곳에 와 있다는 느낌이었다.

적당히 칙칙한 분위기에,

공항에는 삼성로고가 찍힌 카트들,

우리보다는 체구가 좀 작은 필리핀 사람들,

러닝셔츠와 반바지를 입은 포터들의 어깨와 종아리에 맺혀 있던 땀방울.

아키노공항은 마치 번잡한 시골 역사 같았다.

  

7,000여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

인구 8,800여 만 명,

한반도의 1.3배,

타갈로그어가 국어이지만 필리핀어와 영어가 매트로 마닐라 전역에 걸쳐 교육과 비즈니스에 사용되고 있는 나라,

실상 이 나라가 영어를 공용어로 한 이유는 부족 간의 말이 달라서 공용어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국민 대다수가 영어를 하지만 국민소득은 높지 않다.

 

우린 지금 온 나라가 영어에 천박한 추파를 날리고 있고,

일부 넋 나간 식자들은 영어를 공용어로 못해서 몸이 뒤틀릴 지경이지만 영어라는 말을 잘한다고 해서 물건을 사주지는 않는다.

 

그건 그거고, 다이버라면 필리핀을 외면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필리핀처럼 다양한 수중 포인트를 가지고 있는 나라는 아마 지구상에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리조트에서 보낸 승합차를 타고 바탕가스라는 항구도시로 이동해서 보트로 우리가 예약한 리조트로 들어갔다.

 

             
              ▲ Lion Fish (솔베감펭 ) -수심 20미터-
                 필리핀 보라카이 부루앙가 포인트 산호밑에서 느긋하게 먹이를 기다리는 솔베감펭.
                 ⓒ 장호준
 

첫 열대바다를 만났던 느낌은 또 뭐 랄까.

눈앞이 확 트이는 느낌이었다.

물이 어쩜 이렇게 맑을 수 있을까라는 신음이 저절로 터졌으니까.

마치 맑은 수족관을 들여다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마침 건기였고 바다도 잔잔했다.

리조트의 다이빙 서비스도 인상적이었다.

동해의 군사작전과도 같은 다이빙에 익숙해 있던 우리로서는 장비 탈, 부착에서부터, 운반, 그리고 식사수발까지 우리나라에선 꿈도 꿀 수 없는 서비스가 제공되고 있었다.

 

물론 그런 서비스를 받아 본 적이 없는 우리는 조금 쑥스럽기까지 했었다.

그들의 서비스는  모든 것을 스스로 함에 익숙해 있던 우리를 허탈하게 한 것이다.

갑자기 천박한 귀족이 된 듯한 느낌이었으니까.

 

그러나 사람은 곧 환경에 길들여지는 것이다.

우리는 금방 조국의 현실을 잊어 버리고 조금씩 거드름을 피우기 시작했다.

다이빙하기 전 몸만 일어서면 그들은 달려와 장비를 입혀 줬다.

우린 물로 떨어져서 오리발 질과 눈알만 돌리면 되는 것이었다.

보트로 올라갈 때도 누워 있으면 들어서 올려 지는 느낌을 받았을 정도였으니까.

 

방카(필리핀 전통 배)를 몰고 다이빙을 나가면 다이버 숫자보다 곱절의  리조트 직원들이 따라나섰다.

다이빙을 할 때,

남자들은 우리를 앞뒤에서 가이드를 했으며, 여자들은 섬에 내려 식사를 준비했다.

우리는 그 밥을 먹고는 귀족이나 되는 것처럼 거드름을 부리며 이쑤시개를 우아하게 쑤셔 대곤 했다.

 

방카에서 물위로 떨어져 고개를 박으면 눈앞에 펼쳐지던 수중세계는 우리의 바다 현실과는 크게 달랐다.

수심 3~40미터가 족히 되는 바닥이, 잡힐 듯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었다.

사방이 확 트인 산위의 정자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는 것같이 가슴이 확 트이는 것이었다.

 

물론 이후에 해외를 들락거리면서 경험한 바다는 시기와 상태에 따라 시야가 좋지 못할 때도 많았지만 전체적으로 우리의 바다와는 비교할 수 없는 시야를 가지고 있었다.

“시야가 너무 부러워, 우리나라도 여기 만큼 시야가 된다면….”

내가 부러워서 중얼거렸다.

“그러면 우리나라가 아니지 뭐.”

P가 같잖은 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이 이죽거렸다.

 

하루 3회의 다이빙,

우리는 필리핀가이드의 뒤를 따라 바다 밑으로 내려갔다.

사슴뿔 산호의 군락을 지나,

사람의 뇌와 같이 생겼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뇌 산호,

항아리산호를 지나 바닥으로 내려가면 수많은 물고기들이 스스로의 삶에 바쁜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거의 무채색에 가까운 우리바다의 물고기들과는 달리 열대바다의 물고기들은 화려한 색깔과 무늬로 채워진 몸을 하고 있었다.

 

              

            ▲필리핀 해삼 (수심15미터)

               필리핀 아닐라오

               ⓒ 도현욱

 

그중에서도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해삼이었다.

필리핀의 해삼은 누에를 뻥튀기 해 놓은 모양에 크기가 거의 우리나라의 베게 수준이었다.

나는 물속에서 한국 측 가이드 인 L 에게 저게 뭐냐고  몸짓으로 물었다.

L 이 모래 바닥에 글자를 썼다.

‘해삼’

 

다이빙을 마친 후 L의 보충 설명에 의하면,

그게 바로 우리가 중국 음식점에서 먹는 해삼의 재료란다.

“저걸 말리면 건해삼이 되는데 그걸 중국음식점에서 음식재료로 쓰는 거예요.”

 

수심 삼십 미터,

수심이 깊어질수록 온 세상이 푸르러지고 있었다.

바다라는 거대한 푸른 필터에 막혀 다른 색들이 죽어가는 것이다.

사방 팔방이 푸른색이다.

더 깊이 내려가면 차츰 회색빛으로 어두워지며 이윽고 캄캄한 어둠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을 것이다.

 

간혹 카메라의 번쩍이는 스트로보의 불빛이 한 순간 그들의 본래의 색을 잡아 낸다.

그리고 다시 푸른색이다.

들리는 건 자신이 내뿜는 숨소리 뿐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소리마저 머리 속에서 사라져 버리고 침묵의 세계가 시작되는 것이다.

아우성 치는 침묵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앞서가는 다이버들의 실루엣이 꿈결 처럼 아련하다.

 

가이드는 익숙한 솜씨로 우리를 안내했다.

이곳은 그들이 날마다 떨어지는 일상적인 곳이다.

어디에 어떤 물고기가 있고 어디서 돌아 나와야 하는지를 각인 시켜 놓은 것처럼.

가이드는 반환점을 돌아 정확히 닻을 내려 놓고 있는 방카보트로 우리를 인솔했다.

 

다이버들이 지닌 장비 중에도 나침반이 있지만 직선으로 가고 오지 않는 한 출발지점을 찾는 데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가이드들이 지형지물을 정확히 숙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우린 거기서 닻줄을 잡고 5분 간 감압하고 올라 왔다.

 

다이빙시에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물위로 올라오면 전혀 다른 세계로 나온 듯한 느낌을 받는다.

날개가 떨어졌다는 그런 상실감이다.

우리를 따라 나온 리조트의 여자 직원들이 섬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음식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배식이 끝나고 식사가 시작됐다.

 

한참 먹는 데에만 몰두하고 있다가 주위를 둘러 보니 필리핀 스테프들 모두가 한 곳에 모여 밥을 먹는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밥이 목구멍에 걸렸다.

평등이야말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지향하는 목표가 아닌가.

먹는다는 행위에는 개도 차별하지 않는 것이 우리다.

“재들 왜 저래요? 어이, 밥 안 먹어? 같이 먹어요.”

스태프들이 빙긋이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우리가 다 먹고 난 다음에 먹어요. 저 사람들은 손님들과는 같이 식사를 안 해요, 그냥 드세요.”

 

물가도 몹시 쌌다.

외국인을 주로 상대하는 리조트라 상대적으로 비싼 곳인데도

우리는 일일이 고국의 물가와 비교해 보고는

한 병이라도 더 많이 먹는 것이 남는 것이라는 기특한 생각으로 저녁마다 구운 고구마 냄새가 나는

한 병에 우리 돈 삼백 원짜리 산미겔 맥주를 미련하게 마셔 댔다.

아마도 필리핀 스태프들은 우리가 저녁마다 술 먹기 시합을 하는 줄 알았을 것이다.

 

수중사진도 대책도 없이 많이 찍었다.

보는 것마다 처음이었고, 처음인 것마다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마치 장난감에 배고팠던 아이가 너무 많은 장난감을 받아서 어느 것부터 가지고 놀아야 하는지를 모르는 것처럼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오늘 이후 필리핀이 지도에서 사라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는 미련하게 욕심을 부렸다.

당연히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챙긴 것이 없었다.

 

꿈 같은 며칠간의 다이빙이 끝나고 김포에 돌아왔을 때엔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아쉬움이 가득했다.

 

나는 그때부터 필리핀과 열대바다에 대한 열병을 않기 시작했다.

필리핀의 바다를 조국의 바다와 비교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건 절대로 비교할 수도 비교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내가 깨닫게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인생에 공짜로 얻어지는 것은 없다.

나는 돌아 오자 마자 세계지도를 펴놓고 다시 열대로 나갈 궁리에 골몰했다.

이런 내게 P는 큰 힘이었다.

두 달도 흐르지 않아 P와 나는 다시 보따리를 샀다.

 

전 시 회
 
작가: 장호준 (aqualux199)
 

         

         ▲ 비밀의 문 (수심 5 미터)

         동해 영덕 하저리, 

         키가 이삼십 미터씩 자라는 모자반이 물속에서 아치를 만들고 있다.

         ⓒ 장호준

 

매년 전시회가 거듭되자 요령도 늘어났다.

이를테면 죽어라고 열심히 찍어서 나 스스로가 애착이 가는 사진보다도

대중의 기호에 영합하는 것이 관객의 발길을 조금 더 오래 사진 앞에 멈추게 할 수 있다는 것.

 

사진을 움직이는 것은 빛이다.

빛이 모자라는 바다에서 좋은 사진을 얻는다는 것은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는 격이다.

그러니 시야가 좋은 바다를 만날 때에 사진에 집중하라.

그리고 시야가 좋지 않을 때는 딴 짓을 하자는 것,

등등.

 

액자를 폼나게 맞춰야 사진이 산다.

어떤 사람들은 액자에 더 관심이 많다는 것도 알았다.

액자의 선택은 중요하다!!! 중요할까?

액자가 사진을 살리면 그 사진은 뭐야? 

횟수가 거듭 될수록 회의가 밀려 왔다.

도무지 전시회가 뭐란 말이냐? 라는 정체성에 대한 의문에서 부터,

대체 이 따위 사진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일년을 오로지 전시회에 낼 사진을 찍기 위해 다이빙을 다닌다.

사진을 다 찍어 놓은 회원들은 그 해의 다이빙 의무가 다 끝난 것처럼 가슴을 쓸어 내렸다.

 

일년 동안 단 한 번의 다이빙에서 얻은 한 롤의 필름으로 전시회에 낼 사진 몇 장을 뽑아 내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누구도 거기에 대해서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은 없었다.

이의를 제기했다 하면 원수로 돌변할 수 있는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올 리도 없었다.

예술은 어디까지나 등급을 매길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보편적인 저울이 없으니까.

 

어느 해, 한 번은 누가 봐도 쓰레기 같은 그림이 걸렸다.

몇 몇 사람이 그 그림의 주인 몰래 수군거렸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걸 그림이라고.”

 

그러나 아무도 그걸 말릴 수가 없었다.

출품한 본인은 그 그림에다 아주 특별한 자신만의 의미를 붙여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어느 날 전시회를 찾은 내 친구에게 물었다.

장난 끼가 발동해서 였다.

 

“어느 그림이 젤로 마음에 드노?”

 

그는 서예를 하는, 사진이나 다이빙에는 문외한인 사람이었다.

그는 전시장을 한바퀴 돌아보며 고개를 몇 번 갸우뚱하면서 내 눈치를 살피더니,

바로 그 쓰레기 같다고 한 그림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게 젤로 좋은 것 같은데….”

 

나는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 섰다.

 

“형, 이거 이 따위로 전시회 하면 뭐해요?

그리고 누구 하나 이런 전시회를 바라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아요.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아요.

우리끼리 하는 지랄 아니요?”

“그럼 뭘 바라야 할까? 우린 내 놓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니야?”

 

몇 년이 지난 후에는 전시장도 점점 넓어졌고 횟수가 거듭 될수록 회원들의 얼굴에도 교만함이 떠올랐으나,

그것엔 왠지 쓸쓸함이 묻어나는 것이었다.

창설 초기의 열기는 어디에도 남아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전시회 전문꾼 같은 기분이 들어요, 쩝.”

 

주위의 친구들도 시들해졌다.

한두 번은 가벼운 마음으로 전시장을 찾던 친구들이 슬슬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야, 그거 장날마다 하는 거야?”

 

그래서 아는 사람에게 돌리던 안내장도 멈췄다.

어느 해 전시장을 찾은 한 선배가,

주위를 살피며 나에게 아주 나지막이 이렇게 물은 적도 있다.

 

“어이, 이것(전시회) 하면 뭐 좀 나와요?”

 

그는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이며 물었다.

나는 잠시 어리둥절했다가 피식 웃었다.

전혀 생각하지 않은 물음이었다.

그러나 그건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의문을 가질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 보라카이 크로커다일 아일랜드

         수 많은 고기들이 카메라를 향해 달려 들어 오고 있다.

          ⓒ 장호준

 

그래서 다음 전시회 때에 우리는 작품을 판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작품에 대한 호가는 순전히 각 작품의 주인에게 맡겼다.

몇 번의 문의가 있었으나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오기가 발동한 우리들은 그 다음 해에 파격적으로 가격을 매겼다.

인화 값과 액자 값만 받기로 한 것이었다.

물론 그것도 실패했다.

 

그러다, 전시회가 끝나고 작품에 대한 구매 요청이 들어왔다.

그때 우리들은 한 지방을 정해 한 해 동안 중점적으로 그 지방의 해저 사진을 찍은 적이 있었다.

물론 그 지방 자치단체에서 내어준 화랑에서 전시도 했었다.

근데 그때의 사진을 본 그 지방 자치단체의 수장이 그중 마음에 드는 사진의 구매를 요청해 온 것이었다.

그걸 그 지방 청사의 본관 로비에 걸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는 흥분했다.

그러나 전화를 걸어 온 사람은 내가 잘 아는 그 지방의 다이버였고,

나는 그 사람에게 그 지방에서 다이빙을 할 때마다 신세를 지고 있는 처지였다.

 

“하하하, 돈을 좀 많이 불러 버릴까?”

 

농담이었는데,

상대가 한숨을 쉬는 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렸다.

그는 자신이 지금 해당 관청에 무슨 허가를 신청해 놓고 있다면서,

상당히 중요한 일이라고 하며 더듬거렸다.

 

“그럼, 그냥 액자 값이나 주고 가져 가라고 해요.”

 

커다랗게 뽑은 두 장의 사진을 용달차에 실어서 해당 관청으로 보냈다.

 

“하이고 이 등신아.”

 

위의 내용을 들은 동아리의 선배가 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 선배가 그런 관계에 있었다면,

아마 액자까지 자신의 돈으로 만들어서 보냈을 것이다.

 

설날 다이빙

 

동아리를 출범시키고 어느덧 한 해가 저물어갈 무렵,

중년의 한 조그만 사내가 우리 수중사진동아리의 사무실로 찾아왔다.

그는 부산에서 치과를 개업하고 있는 의사였다.

 

그의 말인즉 자신도 수중사진을 한다면서 혼자서는 아무래도 한계를 느껴 이 동아리를 찾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은 아직 다이빙 경력도 얼마 되지 않는다면서 겸손해 했다.

우리는 박수를 치며 환영했음은 물론이다.

 

그로부터 이분의 월례회 참석이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칠년을 계속해 이어졌다.

그는 월례회가 있는 매월 두 번째 물(수)요일날에는 만사를 제쳐 놓고 올라왔다.

네 시쯤에 자신이 부산에서 운영하는 병원 문을 닫고는 열차를 타고 올라 왔다.

그리고 소주 한 잔을 급하게 마시고는 다시 열차를 타고 내려 가는 것이었다.

 

“고단하지 않나요?”

“응, 아니야, 이게 내 스트레스를 확 날려 버리는 일이야.”

 

그는 다이빙도 열심이었고,

월례회 마다 내는 사진도 범상한 것이 아니었다.

경력도 일천하면서 그가 내는 마크로 사진은 하나같이 일품이었다.

 

“마크로 사진에서 저 양반은 대한민국 일등인 것 같아.”

“그래요, 정말.”

 

         

         ▲ 물고기 초상 (마크로 촬영)

         물고기의 얼굴을 카메라로 바짝 당겼다.

         ⓒ 김인영

 

설날이 코앞에 닥친 오늘 같은 날은 그 분이 생각이 난다.

어느 해 설날 아침 그는 도저히 다이빙을 하고 싶은 욕구를 누를 길이 없어서,

장비를 싣고 부산을 출발해서 영덕을 찾았다.

그러나 자신도 다이빙 숍 앞에서는 좀 망설였단다.

 

“아무래도 좀 거시기 하더구만.”

 

적지 않은 나이에· 자신의 욕망을 들킨다는 것에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다이빙이 더 급했다.

 

“아니, 오늘 같은 날 우짠 일이니껴?”

 

그가 자주 가던 다이빙 숍의 주인이 차례를 막 지내고 나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늘은 다이빙이 안 되는가요?”

 

겸연쩍게 말하는 그를 보며,

다이빙 숍의 주인은 사태를 알아 차렸다.

 

“왜 안 돼요, 오늘 같은 날 용왕님께도 세배를 하면 존 니더, 하하하,

그러나 일단 올라 오셔서 떡국이나 한 그릇 하시고 들어 가이소.”

 

열정과 집중이야 말로 무엇인가를 만들어 낸다.

명절은 나에게도 알토란 같은 시간이었다.

차례를 마치고 나면 나는 다이빙 보따리를 들고 투어에 들어가곤 했다.

명절 전후의 휴가기간이야 말로 다이빙을 몰아서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으니까.

 

<다음에 계속...>

 

출처:오마이뉴스

인화 값 하고 액자 값은 좀 내라,  응?

 

작가: 장호준 (aqualux199)

 

              

       ▲ 해저동굴 (수심 15미터)

       울릉도 남양.

       산호가 늘어져 있는 동굴 바깥으로 돌돔 한마리가 카메라 앞을 지나가고 있다.

       ⓒ 장호준

 

다이빙이 끝나고 출발지로 돌아오면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들리는 곳이 있다.

D.P.E.점(Developing, Printing & Enlarging, 일반적으로 현상소를 뜻함)이다.

기대와 희망으로 가득 찬 가슴을 안고 우리는 필름을 맡기러 갔다.

우리만이 아니었다.

카메라에 중독 된 일련의 사람들은 마약에 취한 것 처럼 필름 현상소로 직행을 하는 것이다.

인화된 사진이 나오기 전까지 사람들의 바람은 장밋빛이다.

 

"요번에 있잖아요, 물고기가 새우를 먹으려는 순간, 입으로 들어간 바로 그 순간, 한방

찍어버렸지, 오매 미치지, 이것만 나온다면 쥑이는 건데."

 

물론 사진이 나오고 나서 그 사람으로 부터 그 사진에 대한 어떤 결과도 들을 수가 없었지만,

듣고 있는 사람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더 했다.

35mm 표준렌즈로는 스트로보가 미치는 범위 내에 다이버를 구겨서 넣기도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인화 된 사진을 찾아서 콩닥 이는 가슴을 진정하며 구석으로 가서 부리나케 사진을 훑어 보면 실망으로 벌겋게 상기된 얼굴을 하고 돌아 나와야 했었다.

사진 전면에 걸쳐 막걸리를 먹다가 재채기 한 것처럼 뿌연 점들이 덮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하도 답답해서 선배 '찍사'들에게 물었다.

 

"이거 왜 이래요?"

"부유물 때문에 그렇지요."

 

글쎄 그걸 누가 모르나?

누구도 제대로 답변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가르쳐 주기 싫어서 그러는가 싶어서,

그 말을 물을 때면 그 사람의 눈빛까지 살피기도 했었다.

카메라의 매뉴얼도 구하지 못하던 때였다.

 

시야가 5m도 안 나오는 2~30m의 수심에서 애초에 사진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고 매주 맑은 바다를 찾아 멀리 갈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시야가 흐린 날,

바다 위에 섰을 때의 그 아득함이라니….

물 먹은 카메라를 방파제의 시멘트 바닥에 내동댕이 친 L이 말했다.

 

"나 이제 안 해, 나 정말 안 해."

 

수없이 현상소를 드나들며 '똥 씹은' 얼굴을 하다가

카메라까지 물에 침수되자 그의 인내가 한계에 다다른 것이었다.

나도 정말 그렇게 하고 싶었다.

시원하게 한 번 '때기장'을 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는 L의 눈치를 봐 가며 부서진 카메라를 챙겼다.

카메라는 고쳐야 하고,

L은 다시 카메라를 들고 물로 들어 갈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발기인 모임이 열리고 한 달 후 우리는 클럽을 출범시켰다.

나도 두말없이 합류했다.

전국에 걸쳐 있던 아는 '찍사'들이 모여 들었다.

제주도, 영덕, 마산, 부산, 울진, 포항. 매년 두 차례 이상씩 정기 다이빙을 가지며,

매월 한 차례 물(수)요일 날 모임을 갖기로 하고 그 때 마다 사진 콘테스트를 하기로 방침도 정했다.

물론 매년 한 번씩 전시회를 열기로 합의도 봤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렇듯이 일 년이 다 가기도 전에 회원의 숫자가 반타작이 되었다.

그 때의 발기인이 지금은 몇 명 남지도 않았다.

물론 새로운 사람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직업도 다양했다.

백수에서부터 교수, 의사, 상인, 회사원, 다이빙 숍 주인 등...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 그렇듯이 개인의 직업이나 나이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고,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들은 같은 다이버였으며 같은 '찍사'였기 때문이었다.

물은 우리들의 종교였고 우리는 열렬한 신자들이었다.

 

그 때부터 십 몇 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사람 사는 게 그렇듯이 당연히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있었다.

서로 뒤돌아 선 사람들도 있었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서로에게 은혜를 입었다.

30대 새파란 나이에 북망산으로 간 사람도 있고,

60이 넘은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하는 분도 있다.

모두가 소중한 인연이었다.

 

        

         ▲ 쏠베감펭

         쏠이나 쑤 혹은 쏘가 붙은 물고기들은 쏘는고기 들이라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다.

         ⓒ 장호준

 

동우회의 창립 다음달부터 콘테스트가 열렸다.

회원 전체가 심사위원이 되어 그달의 금, 은 동을 뽑았다.

단연 발군의 실력을 뽐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카메라를 만진지 오래되고 날마다 물로 들어갈 수 있는 다이빙 숍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들로부터 배우고, 익히며, 또 부러워했다.

 

'學而時習之(학이시습지)하니 不亦悅乎(불역열호)'이라.

모임이 끝나고 먹는 저녁밥과 술자리는 더 없이 행복하기만 했다.

이 때쯤이면 다이빙과 사진에 대한 각자의 다양한 의견과 경험담이 쏟아졌다.

안주는 물론 다이빙이었다.

 

"필름을 한 몫에 다 쓰지 말고, 다이빙이 끝나고 올라 올 때는 두서너 장을 항상 남겨두는 게 좋아."

"왜요?"

"가령에 말이야, 올라오다가 해파리에 달라붙은 '물렁돔'을 만났다, 우짤래?"

 

다음 다이빙부터 나는 필름을 남겨 올라 왔다.

그러나 해파리는 좀체 만나지 못했다.

돈을 생각하면 아깝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콘테스트는 계속되었지만 나는 일 년이 다 가도록 금, 은, 동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적잖이 상처를 받았다.

워낙에 날고 기는 사람들의 모임이었지만 그래도 내게 뭔가 문제가 있었다.

 

"왕도가 없나?"

"그런 게 있나, 자주 들어가는 수밖에 없지."

 

나는 열심히 물로 들어갔다.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내 눈 앞에는 맑은 시야로 온 몸을 열어 젖히고 있는 열대의 바다가 어른 거렸다.

 

첫 번째 전시회 날짜가 잡히고 회원들이 바빠졌다. \

전시회 경험이 있는 회원들의 진두지휘로 전시회장을 잡고 팸플릿을 만들고,

알음 알음으로 일본의 유명한 수중사진가 두 명을 초청해 그들의 사진도 출품 받았다.

다이빙 관련업체와 서울의 다이빙전문 잡지사 발행인들과 다이버들을 초청하고 드디어 전시회가 열렸다.

              

            ▲ 문섬 쏨뱅이 (수심 20미터 )

            자신이 가진 무기를 믿고 카메라 앞에 당당히 포즈를 잡고있다.

            ⓒ 장호준

 

회원들은 모두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전시회장을 누볐다.

 

"아니, 사람들이 사진 앞에 영점일초도 안 서 있잖아."

 

관객들의 동향을 눈여겨 보던 한 회원이 섭섭한 듯 소리 죽여 불평했다.

 

"하하하, 글쎄 말이야, 그라마 다 본거 아이가."

"그래도 우리는 저거 한 장 찍을라꼬 죽을 고생을 했는데"

 

그래, 그것은 관객들의 몫이었다.

전시회장을 찾았던 친구들로부터 사진 주문이 들어 왔다.

 

"야 저거 내 꺼니까, 니가 알아서 기라, 알았제?"

 

친구들이 오만한 얼굴로 자신의 마음에 드는 사진을 손가락질하며 한마디씩 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이들의 요구를 들어줬다.

전시회가 끝나자마자 내가 건 작품들을 차에 싣고 이들의 집까지 배달해 주는 것이었다.

물론 공짜였다.

받는 사람들도 아주 당당했다.

마치 네 작품을 내가 요구한 것만으로도 너를 인정한 것이니까 도리어 고마워해야 한다는 식이었다.

물론 나도 그것을 기쁘게 받아 들였다.

해가 거듭되면서 전시회 횟수가 늘어가자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형님, 이제 나는 남한테 사진 안 줘요"

"와?"

 

그의 말인즉 어느 날 자신의 친구 집을 방문했더니 자신이 준 액자에 사진을 들어내고 거기에다

다른 사진을 붙여놓은 것을 봤다는 것이었다.

 

"그게 어떻게 찍은 사진들인데"

 

그는 분노했다.

내가 돌린 수많은 사진들을 생각하자 나도 불안해졌다.

수중사진을 찍는다는 것이 알려지자 만나는 친구마다 사진을 요구해 왔다.

물론 나는 그 요구를 다 들어줬다.

사진보다는 친구들이 더 소중한 것이니까.

그러다가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녀석들이 자신들이 누구에게 보낼 선물로 내 사진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몇 장 좀 만들어 놔라"

 

액자까지 맞춰 놓으라는 것이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그들의 변명은, 자신들은 액자 집을 잘 모른다면서 어디까지나 네가 전문가이니까,

전문가가 알아서 해놓으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몇 번이나 전문가를 강조했다.

제길, 그렇다고 '쪼잔하게' 재산권 이야기를 하겠는가.

 

그런 요구가 거듭되자 나는 드디어 두 손을 들고 항복했다.

 

"내 좀 살리도, 죽겠다. 음, 그러니까 자네도 알다시피 내가 뭐 돈을 남기자는 것이 아니고,

인화하는 값하고 액자 값은 좀 내라, 응? 이해할 수 있지?"

 

친구가 이해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야 임마! 그 한 장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내가 들인 노력을 언제 이야기 하더냐.

그리고 그것은, 너에게만 이야기 하지만 말이야,

내게 있어서는 자식들과 같은 것인데 집까지 묻혀 줄 수는 없잖아.

이해해줘! 응?'

 

 

* 다음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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