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절은 환웅천황이 배달국을 건국한 날


(영화 태왕사신기 1회 캡쳐 화면 : 환웅의 신시 배달국 건국 )글 : 임성용

10월 3일은 우리 국민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개천절 (開天節)입니다.  

개천절 이 시작된 것은 국조단군을 모시는 대종교에서 1900년 1월 15일 교문(敎門)을 다시 열면서 단군조선을 건국하였음을 기리는 날로 정하여 경하식을 거행하는데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의  개천절  행사는 일제강점기의 암울했던 식민지배하의 상황에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상해임시정부에서도 이날을 국경일로 정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정부가 계승하여 음력 10월 3일에 지내던 행사를 양력 10월 3일로 바꾸어 지금의 개천절 이 되었습니다.
 
 
  개천절 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나

단군성조께서 조선을 개국한 날이기에 이 날을 기념하고 기뻐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개천절 이 단군성조께서 나라를 열기 훨씬 이전부터 있어 왔음을 아는 사람은 아주 적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단군왕검께서 조선을 개국하시기 이전부터 동이족의 역사는 존재했었는데,

환국(3301년), 배달국(1565년), 단군조선(2096년)으로 이어져 내려온 시대를 우리는 삼성조 시대라 이야기합니다.
 
바이칼 호수지방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땅을 3301년 동안 7대 환인천제께서 다스렸던 나라의 이름이 환국(桓國-광명의 나라)이었습니다.

백성들은 밝음을 숭상하며 하느님의 자손이라는 긍지를 가지고 천손민족(天孫民族)의 의식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영화 태왕사신기 1회 캡쳐 화면 : 환웅의 신시 배달국 건국 )
 
인류의 시원 문명국가인 이 환국은 약 5900여 년 전,

기후변화로 인해 나라를 이루고 있던 9부족들의 일부가 이동을 하게 됩니다.

이 때 환국의 마지막 환인이신 ‘지위리’ 환인으로부터 정통성의 상징인 천부인 3개를 받은 환웅께서 문명 개척단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지금의 백두산)에 오시어,

신단수 아래 도읍을 정하고 신시를 열게 되었으니 이것이 신시배달입니다.
 
이때 환웅천황은 하늘에 천제를 드리며 나라를 개국하는데, 이 날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10월 3일  개천절 입니다.

신시배달은 환국의 광명사상을 그대로 계승을 하여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 광명개천(光明開天)의 3대 정신으로 백성들을 교화하며 1565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이 배달국을 우리는 진정한 한민족사의 기원으로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개천절 은 단군조선의 건국일이 아닌 신시배달의 건국일이며,

단군의 건국이념으로 알고 있는 홍익인간, 제세이화의 광명사상 또한 배달국의 가르침이라는 것을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 제사 올리는 천제문화
배달국은 인류 시원문명국가인 환국시대 환인천제의 정통정신을 계승한 장자국으로서 하느님께 제사를 올리는 천제의식을 통해 감사를 드리고,

신의 가르침을 받아 인간을 다스려 왔습니다.

그것을 이신설교(以神說敎)라 하는데,

줄여서 ‘신교’라 부릅니다.

신교는 우리 민족의 삶과 함께 해온 종교로서 환국, 배달국 시대에는 신교배달도라 불렀으며,

고조선 때는 풍류도라 하였습니다.
 
이를 두고 신라의 최치원은 화랑의 유래를 밝힌 ‘난랑비서문’에서 ‘우리민족이 닦아온 현묘한 도는 유불선 삼교정신을 모두 포함하는 풍류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시배달의 신교의 맥은 고조선을 거쳐 고구려로 전해졌으나,

당나라의 힘을 빌린 신라의 삼국통일을 계기로 더 이상 전해지지 못하게 됩니다.

대진국(발해)으로 이어진 한 맥도 대진국의 멸망과 함께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다만 그 흔적은 남아서 이후 불교를 국교로 한 고려와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시대에서는 각각 ‘복원관’과 ‘소격서’를 두어 상제님께 천제(天祭, 太乙祭)를 올려 왔습니다.
 
역대의 제왕들은 제위에 오를 때 반드시 하늘의 상제님께 먼저 제사를 올렸는데,

한말의 고종임금께서도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위에 오를 때 원구단을 쌓고서 천제를 올려 하늘에 알렸습니다.

그 유적은 지금도 서울의 조선호텔 자리에 남아있습니다.

이처럼 천제는 우리에게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신교문화 즉, 상제문화의 발자취인 것입니다.
 
옛날 우리 어머니들이 정갈한 곳에 정화수를 떠놓고 두 손을 비비며 하늘에 정성을 드리는 모습,

관아래 칠성판을 깔고서 그 위에 시신을 얹어 장례를 지낸 것 등도 모두 신교문화의 유산입니다.


 
지배층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제를 지내듯 평민들은 고을마다 제천의식을 행하였습니다.

오곡이 풍성한 가을철에 수확을 하고나서 지신(地神)과 곡신(穀神) 그리고 상제님께 감사행사를 가졌습니다.

10월 상달에 지냈던 이 행사가 우리가 알고 있는 고구려의 동맹, 부여의 영고, 백제의 교천 그리고 삼한의 불구내 등입니다.

사람들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나서 그 뒤풀이로 음주가무의 풍류를 즐겼습니다.
 
이런 관습은 오늘날의 추석명절 속에 그 자취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해 수확한 햇곡식을 조상에게 먼저 천신(薦新)한 다음 온 가족이 음복(飮福)을 하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 줄다리기나 씨름, 강강술래 등의 놀이를 통해 흥을 돋우는 풍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올해는  개천절 과 추석이 연이어 있어 국내외 여행지를 찾는 사람이 많아 항공편 티켓을 구하기 힘든 상황이라 합니다.

오랜만에 맞은 긴 연휴를 이용해 여행을 떠나는 것도 좋지만, 이 땅에 나라를 열고, 하늘의 상제님께 천제를 올리고, 또 나의 뿌리 되는 조상님께 제사 올리던 그 정신마저 퇴색되는  개천절 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신과 민족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올바른 역사관을 바탕으로 미래를 바라볼 때 비로소 스스로의 자긍심은 물론이요, 후손들에게도 더욱 떳떳하고 값진 재산을 물려줄 수 있습니다.

한민족의 역사가 열린  개천절을 맞이하여 선조들의 그 정신을 다시금 되새겨 봅니다.

글 원출처 :
 ⓒ증산도 본부, 월간개벽 2006.10월호

왜 터키는 우리의 형제국인가?

'터키'라는 국가를 말하면 우리는 이스탄불, 지중해의 나라,
형제의 나라 등 여러 수식어를 떠올리지만
정작 우리나라와 터키가 왜 '형제의 나라'라고 불리워지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아느냐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6.25 때 미국, 영국, 캐나다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은 병력을 파견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고.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사실은
파병 된 15,000명이 넘는 터키군 대부분이 자원병이였으며,
그 중 3,500명이 사망(미국 다음으로 많은 사상자)할 정도로 그들이 열심히 싸웠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많은 병력을 파견했으며,
'왜' 그렇게 목숨을 걸고 싸웠을까요.

터키에 가면 관공서나 호텔의 국기대에 터키국기와 태극기가 나란히 게양되어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터키인들 역시 한국인에게 굉장히 우호적이며,
그들은 모두 한결같이 대한민국 '코리아'를 Brother's country 라 부릅니다.
또, 한국말과 비슷한 단어가 많은 헝가리 사람들 역시 한국이랑 헝가리랑 sister다 라는 얘기를 합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요.

여기, 한 아침 라디오방송에서 나온 이야기를 잠시 참고 해 보도록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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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투르크'라고 부른다.
우리가 코리아를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것처럼.

역사를 배웠다면
과거 고구려와 동시대에 존재했던 '돌궐'이라는 나라를 알고 있을 것이다.
투르크는 돌궐의 다른 발음이며,
같은 우랄 알타이 계통이었던 고구려와 돌궐은 동맹을 맺어 가깝게 지냈는데,
돌궐이 위구르에 멸망한 후,
남아있던 이들이 서방으로 이동하여,
결국 후에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원래, 나라와 나라 사이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는 법이지만,

돌궐과 고구려는 계속 우호적이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를 '형제의 나라'라 불렀고,
세월이 흘러 지금의 터키에 자리잡은 그들은 고구려의 후예인 한국인들을 여전히, 그리고 당연히 '형제의 나라'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즉,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형제의 관계였던 것이다.
6.25 때부터가 아니고………

그렇다면 의문점 하나.
우리는 왜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까?
그리고 터키인들은
왜 아직도 우리를 형제의 나라라고 부를까?
답은 간단하다.
역사 교과서의 차이다.

우리나라의 중,고 역사 교과서는 '돌궐'이란 나라에 대해 단지 몇 줄만 할애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돌궐이 이동해 터키가 됐다느니,
훈족이 이동해 헝가리가 됐다느니,
하는 얘기는 전무하다.

터키는 다르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경험했던 터키는 그들의 역사를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학교에서 역사 과목의 비중이 아주 높은 편이며 ,
돌궐 시절의 고구려라는 우방국에 대한 설명 역시 아주 상세하다.
'형제의 나라'였다는 설명과 함께.

그래서 대부분의 터키인들은 한국을 사랑한다.
설령 한국이 그들을 몰라 줄지라도......  
실제로 터키인들은 한국인들 역시도 그들과 같은 생각을 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인들도 터키를 형제의 나라라 칭하며 그들을 사랑할 것이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때 터키의 한 고위층 관계자가 한국을 방문했다.
자신을 터키인이라 소개하면 한국인들에게서 큰 환영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은 데 대해 놀란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물었다.

'터키라는 나라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돌아온 답은 대부분 '아니오'였다.
충격을 받고 터키로 돌아간 그는 자국 신문에 이런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한다.

'이제.. 짝사랑은 그만 합시다..'

이런 어색한 기류가 급반전된 계기는 바로 2002 월드컵이었다.
'한국과 터키는 형제의 나라,
터키를 응원하자'라는 내용의 글이 인터넷을 타고 여기저기 퍼져 나갔고,
터키 유학생들이 터키인들의 따뜻한 한국사랑을 소개하면서,
터키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이 증폭되게 되었다.


6.25 참전과 올림픽 등에서 나타난 그들의 한국사랑을 알게 된 한국인들은 월드컵을 치르는 동안 터키의 홈구장과 홈팬들이 되어 열정적으로 그들을 응원했다.

하이라이트는 한국과 터키의 3,4위전.
자국에서 조차 본 적이 없는 대형 터키 국기가 관중석에 펼쳐지는 순간
TV로 경기를 지켜보던 수많은 터키인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한다.
경기는 한국 선수들과 터키 선수들의 살가운 어깨동무로 끝이 났고,
터키인들은 승리보다도 한국인들의 터키사랑에 더욱 감동했으며,
그렇게.. 한국과 터키의 '형제애'는 더욱 굳건해졌다.

우리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터키가 형제의 나라가 된 궁극적인 이유를 모르면
KBS의 어느 아나운서가 패널이었던 터키인에게 '아우님'이라 불렀던 어리석은 짓도 가능한 것이다.
형제는 '형과 동생'을 따지자는 말이 아니다.
그들에게 형제는 곧 친구며 우방이니까.

- 10월 16일 CBS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대전지역 98.1MH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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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의 언어에는 순우리말과 비슷한 단어가 참 많습니다.
말 뿐 아니라 음식, 문화, 습성, 국민정서 (터키인 우월주의에, 감정적 다혈질이면서 반대로 다정다감하고, 거나하게 놀기 좋아하고, 어쩜 그렇게 성질 급한 것까지..)도 상당히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유럽인 치고는 흔하지 않게 몽고반점도 있습니다.

과거 돌궐(투르크 => 터키)과 고구려는 그냥 우방이 아니라,
이와 잇몸 같은 관계였다고까지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돌궐의 공주와 결혼을 하였을 정도니까요.
고구려 멸망 후 돌궐도 망했으며 서쪽으로 옮겨 서돌궐을 건국하게 됩니다.
서돌궐이 훗날 오스만 제국. 그리고 터키가 됩니다.
혈통이 고구려와 혼혈이라고 생각하시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역사 교과서에서 돌궐을 다루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돌궐의 위치 때문이 아니였나 생각됩니다.
사서에는 고구려와 돌궐이 국경을 맞대고 있는 것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당시 돌궐은 중앙아시아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영토가 중앙아시아,즉 실크로드(서안) 부근까지가 영토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리고 돌궐은 만주 지역에까지 영토를 넓힌 적도 없습니다.
따라서 고구려의 영토가 만주와 한반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중앙 아시아 까지(돌궐과 맞닿은) 매우 방대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중국이 동북공정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이유도 여기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보면,
'터키'라는 나라는 과거 청동기시대인 배달국, 고조선,부여 시대에는 동이족에 속해 있다가 고구려의 세력이 확장되면서 고구려가 부여를 정벌하자 그곳에 살던 원주민(예맥 동이족)들이 요하를 건너가 이루게된 민족입니다.
돌궐족은 중국의 대부분을 수나라가 통일하자 고구려와 돌궐은 연합하여 수나라를 공격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히려 수나라의 침략을 받아 요서지방은 수나라에 점령되고,
돌궐은 서쪽으로 쫓겨나게 되는데,

그들이 서쪽으로 이주해 정착하여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건설하였고,

아랍과 발칸반도를 지배하며 강성했던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19세기 중반부터 쇠퇴하면서,
주변의 영토를 잃고(소수민족 모두 독립) 지금에 터키만 남게 된 것입니다.


같은 우랄-알타이 계통의 언어를 사용했지만,
통일신라시대 이후 우리는 중국의 영향으로 한문을 사용했고,
터키는 아랍의 영향을 받아 언어는 전혀 다르게 발전하게 됩니다.

유전학이나 인류학적으로도 터키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몇개 안되는 북방계 몽골리언국가(몽고, 한국, 일본, 에스키모, 인디언)중 하나로,
헝가리 와 함께 북방계 몽골리언의 유전자가 많이 남아있는 유럽국가입니다.

터키인은 '코리아'의 어원이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의 영문표기라는 것까지도 알고 있습니다.
대단한 형제사랑이지요.


그렇다면, 북한도 같은 민족인데 어째서 한국과 형제인 터키가 6.25 때 남한편에만 병력을 파병했을까.
한국일본의 관계 만큼이나 아르메니아인들과 터키는 견원지간입니다.
아니 원수지간이라는 말이 더 적절하겠네요.


과거 아르메니아인(오스만 기독교인들)들이 터키인(투르크 이슬람교도)에게 대학살을 당했기 때문이지요.

과거 오스만터키에서 소수민족들이 독립을 하면서 쇠약해진 국력과 맞물린 굴절된 민족주의로 말미암아 아르메니아인 수천명이 죽임을 당하는 1차 대학살의 참사가 벌어집니다.
유럽으로 남진하려 하는 러시아의 힘을 얻어 루마니아세르비아가 독립을 하게 되고,
오스만터키의 아르메니아 영토 대부분을 러시아가 차지하는 셈이 되자,

이에 분노한 투르크인들이 러시아와 붙어 먹은 아르메인들을 표적으로 인종청소라는 대학살을 감행한거죠.


1차 대학살 20년후 또 다시 오스만터키 정부의 도움을 받은 투르크 이슬람교도들은 아르메니아인 5만명에 대학살을 자행합니다.
(2차대학살)

게다가 정부는 학살된 아르메니아인 외 175만명을 추가로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로 추방하고,
그 추방하는 과정에 60만명이 사막에서 목숨을 잃게 됩니다.
(1894년~1915년까지 250만명이였던 아르메니아인은 30만명 만이 살아 남게 됩니다.)


그후 1912년 발칸전쟁 때 몬테니그로, 불가리아, 그리스가 오스만터키에서 독립할 때도 알게 모르게 러시아가 개입하여 아르메니아인을 도와줍니다.
따라서 러시아가 북한을 지원하기 때문에 당연히 터키는 그 반대 쪽인 남한에만 병력을 파견한 거지요.

물론 혹자는 당시 터키가 미국과의 우방적 연계로 말미암은 국제적 이득을 노린 선택일 뿐이였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역사의 흐름이라는 큰 범주에서 바라 본다면,
터키가 2차 세계대전 때 우리의 동맹국 중의 하나였던 이유가 필연적으로 러시아와 적대 관계일 수 밖에 없는 과거사 때문이였다고 보는게 타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형제의 나라.
한국의 경제성장을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자부심을 갖는 나라,
2002년 월드컵 터키전이 있던 날
한국인에게는 식사비와 호텔비를 안받던 나라.
월드컵 때 우리가 흔든 터키 국기(國旗)가 터키에 폭발적인 한국 바람을 일으켜,

그후 터키 수출이 2003년 59%, 2004년 71%나 늘어났다는 KOTRA 통계가 있습니다.


이런 관계를 지닌, 자기 나라로부터 수백만리 떨어진 곳에서 보내는 의리와 애정을 받는 나라가 세상에 몇이나 되겠습니까.

세계 역사를 좌지우지하는 대부분의 위인들은 평생 독서를 즐겼으며,
그들이 가장 즐겨 읽었던 분야는 역사라고 합니다.


우린 세계사를 떠나 국사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관심이나 있을까요.
아니, 제대로 된 우리의 국사나 현대사를 과연 배운 적이나 있었나요.


내 나라 역사조차 바로 알지 못하면서 남의 역사를 논했던 제 모습에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끼는 새벽입니다.
우리가 보통 터키를 형제의 나라라 생각했던 이유는 단지 한국전쟁의 인연으로 만 생각해 왔었는데,
그 보다 더 오래된 사연(?)이 있었군요.

한가지 묻고 싶은 건
"만약 터키가 다른 나라와 전쟁을 벌린다면"
여러분들은 과연 어떻게 생각 할런지가 궁금하군요.
우리에게 해준 것처럼 자원하여 도와줄 것인지...
그 전쟁이 어떤 상황에서 벌어진 전쟁인지를 파악하고 행동하겠는지....

즉 명분이겠죠.
아님 그냥 바라만 볼 것인지..

 

여러분의 판단이 궁금하군요.

 

글쓴이:참인님 

6월6일이 현충일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왜 이날로 정해졌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부산지방보훈청 6일 "6.25전쟁이 터진 6월과 24절기 중 망종일(芒種日)을 고려해 정해진 것"이라고 밝혔다.

      현충일인 6일 이른 아침부터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은 추모객들이 가족과 벗의 묘역을 찾아 헌화하며 고인의 넋을 달래고 있다. /뉴시스


    "6월은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많은 장병들이 산화한 달이며, 매년 양력 6일경은 24절기 중 망종일로서 제사를 지내는 옛 풍습이 있다"면서

    "고려 현종 5년에는 6월6일에 조정에서 장병의 뼈를 집으로 보내 제사를 지내도록 했던 기록이 문헌에 있다"는 것.

    이에 현충일이 처음 제정된 56년 6월6일도 음력으로 망종일이었다는 것이다.

    부산보훈청 추헌용청장은 "현충일이 처음 제정된 당시에는 6.25전몰군경을 추모하는 날로 받아들여졌는데 91년 현충일 기념행사때부터 모든 순국선열 및 호국영령을 추모하는 개념으로 바뀌어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고 전했다.

     

    출처:뉴시스 < 2007.06.06 13:11>

    출처 : 다이빙 라이프
    글쓴이 : 엉터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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