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게 흘러가는 바다....
그 속에서 유독 붙박이처럼 알의 곁을 맴도는 존재가 있다.
쥐노래미 아비다.
세찬 물살에도 헤엄쳐와서 알에 지느러미를 대고 작은 알속에 생명을 지킨다.
때를 거스르지 않고 생명의 고리를 이어가는 바다...
10월의 바다에서 어린 쥐노래미 수컷들이 사랑을 연습하는 사이 성숙한 암컷은 건강한 수컷을 찾아 잔뜩 몸이 달아올랐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수컷은 현란한 사랑의 춤을 춘다.
수컷이 마음에 들 경우 그 춤에 화답하듯 암컷이 산란에 동참하면 수컷은 알 위에 방정을 하는 것으로 새로운 생명이 탄생된다.
하지만, 알을 낳으면 그뿐, 암컷들은 자유롭게 떠나가고 알들이 부화할 때까지 살뜰하게 보살피는 것은 오로지 수컷의 몫...
한 달에서 길게는 60일까지 걸리는 고단한 일이다.
아비가 되었다고는 해도 형편이 다 같은 것은 아니다.
경험이 많은 수컷은 전망도 좋고 험난한 파도가 쳐도 비교적 안전한 곳에 알 자리를 두고 있는데,
대개 이런 녀석들은 능력도 뛰어 나서 많게는 스무 마리의 암컷을 유혹해 각기 다른 색의 자식들을 얻는다.
반면, 아빠 경험이 없는 수컷의 집은 한눈에 보기에도 초라하기 짝이 없다.
알에도 유난히 하얀 것이 많은데 수정에 실패한 경우다.
사랑에 서툰 탓에 수정이 안 된 알들은 물어다 버리는 수 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녀석은 결국 첫 자식 농사를 망쳐버린 셈이다.
초보네 집은 알도둑도 끊이질 않는데 잠시 자릴 비운사이 문어가, 불가사리가 안방을 차지하고 앉았다.
녀석은 불가사리 중에서도 최상위 포식자로 아무르불가사리를 몰아내는 것은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다.
주변 경계를 다시 확인한 아비는 자기보다 큰 불가사리를 입으로 물고 난파선 저 너머 어둠속으로 사라진다.
이웃한 초보 아빠네도 역시나 불가사리들이 떡 버티고 앉았는데,
알도둑들을 떼어낸다는 것이 그만 알까지 떨어뜨리는 대형사고로 이어지는 것.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아비,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이웃의 쥐노래미들이 벌써부터 뜯어 먹기 시작한 것이다.
동족의 알을 집어 삼킬 만큼 바다 속 세상은 냉정하다.
누구도 아비의 애타는 심정을 헤아려 주지 않는다.
세상이 침묵하는 밤!
쥐노래미 아비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밤에도 아비들은 알의 곁을 떠날 줄 모른다.
실수로 낮에 알을 잃었던 수컷도 남은 알들 곁에서 잠을 청한다.
아비들은 밤새 새우잠을 자며 밤새껏 알들을 지켜낸다.
반면, 알이 없는 수컷은 깊은 단잠에 빠져있다.
바다에서조차 무자식이 상팔자인가 보다.
수면을 간질이는 햇살에 바다는 눈을 뜨고 물속 주인들도 비로소 기지개를 켠다.
평화롭게 시작된 아침!
느닷없는 불청객이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의 정체는 바다의 못난이 아귀다.
아귀는 그 생김만큼이나 포악한 성질로도 악명이 높다.
아침 식사거리를 찾아 일찌감치 집을 나선 아귀!
너무도 당당하게 아귀가 찾아 든 곳은 쥐노래미가 알을 품는 장소이다.
하지만, 아귀와의 정면 승부란 승산 없는 싸움!
궁리 끝에 쥐노래미가 택한 전술은 꼬리물기 전법!
사정없이 쪼아대는 탓에 허옇게 물집이 잡힌 아귀...
하얗게 살이 드러난 아귀...
소득도 없이 이리저리 바다를 헤매이다 마침내 푸짐한 알자리를 발견하는데 어느새 그 아비가 쫓아와 결사적으로 막고 나선다.
아비의 집요한 공격에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아귀...
쥐노래미의 부성애 앞에 굴복하고 말았다.
우리에게 쥐노래미는 ‘놀래미’라는 이름의 회갈색 바다고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놀래미는 방언이며,
쥐노래미는 노래미와도 엄연히 다른 존재다.
태초에 이들의 조상은 하나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쥐노래미와 노래미는 서로 다른 개체로 분리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10월이 되면 쥐노래미는 회갈색 옷을 벗고 아름다운 황금빛의 혼인색으로 물드는데,
이때부터 아비로서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된다.
알을 얻는 그때부터 아비는 한순간도 자유로울 수 없다.
지느러미 부채질로 알에게 신선한 산소를 공급해 줘야하고 틈틈이 이물질도 제거해주어야만 한다.
게다가 알을 돌보는 동안엔 잘 먹지도 않는다.
그토록 좋아하는 새우를 줘 봐도 입도 대지 않는다.
위기는 한순간에 찾아온다는 것을 경험으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알 곁에 거울을 놓았더니 거울 속 제 얼굴을 침략자로 오인하고는 난폭해졌다.
하긴 제 얼굴을 봤을 리 없으니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알을 낳는 그 순간부터 도처에 널린 것이 알도둑,
날카로운 가시의 성게는 결코 만만한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아비의 자식 사랑에는 거칠 것이 없다.
비록 전쟁을 치르다 입술 깊숙이 가시가 박힐지라도....
잠시 숨을 고른 아비가 또 다시 성게를 공격한다.
결국 성게도 부성애 앞에서 발길을 돌렸다.
그날 오후, 바다 속 분위기가 왠지 심상치 않다.
모든 것을 날려 버릴 듯 한 거친 소용돌이...
큰 파도가 밀려오기 전,
바다는 심하게 몸살을 앓는데 이런 날이면 아비들의 마음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거세게 흔들리는 물살을 따라 새끼들의 운명도 위태롭게 흔들린다.
그 어떤 침입자가 와도 용감하게 맞섰던 아비인데,
거대한 자연의 소용돌이 앞에선 그저 무력한 존재가 되고 만다.
근처에 있던 노래미의 아비도 불안하긴 마찬가지...
오직 알들이 강한 물살을 잘 견뎌내 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걱정스레 알자리를 둘러보던 아비가 어쩐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있어야 할 자리에 알이 없었던 것이다.
이미 바닥으로 떨어져버린 알들....
투박한 아비손으로 애지중지 키워온 알들인데 한순간에 자식농사가 물거품이 됐다.
알이 붙어있던 자리를 몇 번이고 더듬거리는 아비.
그날 늦게까지 쥐노래미는 망부석처럼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고,
바다에는 거센 파도가 울부짖듯 몰아쳤다.
큰 파도가 지나간 바다, 그 속은 어떤 모습일까?
바다에는 아직도 파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파도에 유실된 폐그물은 쥐노래미에게도 죽음의 덫이 됐고,
바다의 장의사라 불리는 게와 고동이 몰려와 죽은 살점을 나눈다.
아비를 잃은 알들도 역시 같은 운명을 맞았다.
이어지는 또 다른 희생...
지켜야할 알이 없었더라면 아비는 그물을 피해 달아 날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도 알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아비...
아비가 그물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알들도 빠르게 죽어갈 것이다.
그물에 걸린 최악의 상황에서도 부성애는 계속된다.
행여 다른 녀석이 자신의 알을 해칠까 두렵기 때문이다.
강한 부성애의 끝,
아비의 집착은 풀 수 없는 올가미가 되어 아비의 숨통을 조르고 있었다.
자연은 시련을 딛고 살아남는 자에게만, 그 생명의 길을 열어준다.
알이 부화하는 그 날까지 아비는 무수한 전쟁을 치를 것이다.
바다의 포식자... 대왕문어와의 싸움도... 시간은 흐르고 삶은 계속된다.
쥐노래미 새끼들이 깨어날 무렵이면 난파선 주변 멍게 군락지에도 생명 탄생의 신비가 시작된다.
멍게는 암수가 산란과 방정을 동시에 진행하는데 물결을 떠돌다 수정이 이뤄지면 조류는 이들을 보듬고 멀리 날아가 생명의 싹을 틔어 줄 것이다.
바다의 생명들은 만남과 헤어짐에 익숙하다.
부화를 마치면 아비는 곧 황금옷을 벗고 고단했던 아비로서의 짐도 벗게 될 것이다.
치열했던 쥐노래미의 전쟁을 오직 기억으로만 남는다.
하지만, 또다시 10월이 오면 아비들은 기꺼이 황금옷을 입고 새끼들을 위해 전쟁을 치를 것이다.
그들의 아비가 그러했던 것처럼.....
- 지금 경상북도 울진 나곡에 가면 3마리의 쥐노래미 수컷이 알을 지키고 있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게재된 사진은 11월 초에 나곡 난파선 포인트에서 촬영된 것이다.
현지 다이빙 가이드들의 말에 따르면 12월 중순까지는 이들의 모습을 관찰해 볼 수 있으며,
아직 산란을 하지 않은 쥐노래미들이 순차적으로 산란을 하면 넉넉히 1월 중순까지는 그들의 부성애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출처: 수중세계 글쓴이: 김흥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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