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우리나라 다이빙의 역사를 찾아 올렸읍니다.

 

이번에 글은 잠수가 산업에 미치는 영향이 크고

또 남이 하지 못하는 위험하고 힘든 일을 묵묵히 수행해 나간

산업잠수사를 위해 글을 찾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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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조직이든 대대로 내려온 계보라는 것이 있는데
그 계보가 언제 시작되었느냐 하는 것은 의견이 분분할 수 있다.


우리 나라의 잠수역사를 정리하다 보면 아주 기초적인 자료조차 정리되어 있지 않은 데다
저마다 '정통'과 '원조'를 강조하는 바람에 매우 혼란스럽고
워낙 군소집단의 이합집산이 심해 계보의 추적이 힘들어 실체 파악이 어렵다.
그것은 조금만 숫자가 많아지면 파벌을 형성하고 분열을 거듭하는 못난 성향이 우리 민족에게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어느 전문지에서 시대별 세대별 스쿠버 잠수역사에 대해 정리한 글을 읽었는데,
역시 역사라는 것은 보는 시각과 관념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사람의 주장이 맞든 안 맞든 또는 정설이든 가설이든 간에 물증만 제시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없을 텐데
아무런 물증도 없는 상태에서 객관성마저 결여된 글을 읽었기에

읽고 난 뒤 뒷맛이 영 개운치 않았다.
필자의 「한국의 산업잠수 발전사」도 읽은 사람의 각도에 따라 주장과 해석이 다를 줄 안다.
또 반론을 제기할 것을 예상하고 있으므로

필자의 부족함을 보충해줄 수 있는 확실한 자료와 충언을 기대한다.

그리고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짚고 넘어갈 게 있다.
영어의 "컴머셜(Commercial Diving)"을 우리말로 "산업잠수"라고 어느 전문지에 최초로 쓴 사람이 필자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컴머셜다이빙을 상업잠수라고 한다.
컴머셜을 상업으로 번역하든 산업으로 번역하든 간에 틀린 것은 아니지만
우리말의 상업은 오히려 레저잠수에 어울리는 용어다.
따라서 컴머셜 다이빙은 산업잠수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법률상 산업잠수사는 산업안전보건법에 저촉을 받고
해산물을 채취하는 잠수사는 수산업법에 저촉 받는
사실을 참고로 알아둬야 할 것이다.

우리 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 쌓여 있는 해양국가의 유리한 조건하에 있으면서도
해양개발에 대한 의지와 지식, 정책부재 등의 소극적 자세 때문에 질적 양적인 변화 없이 지금까지 유지해 온 반면

해양선진국들은 끊임없는 도전과 모험 속에서 잠수분야를 급속도로 성장시켜 왔다.


우리 나라의 잠수역사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기록 자체가 전무할 뿐만 아니라 계보의 자료조차도 빈약한 실정이다.


더욱이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우리 나라는 46년간 일제의 식민 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 계보의 추적이 어렵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 나라의 잠수계보는 결국 일본잠수계보를 참고할 수밖에 없다.
일본은 주위가 바다로 둘러 쌓인 섬나라로 옛날부터 바다와 특별히 깊은 관계를 가져왔다.

일본의 잠수 역사에서 잠수사라는 직업이 정착한 것은 메이지(明治)시대라고 한다.

이때에 제조된 잠수기구만 수 천대에 달했다고 하니

잠수가 차지하는 비중과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가름할 수 있다.
일본은 메이지 시대부터 이어온 수준 높은 잠수기술과 지속적인 장비개발로 인해

러일전쟁 때 여순 항에 침몰된 배를 성공적으로 인양할 수 있었고

오늘날 일본의 잠수어업과 수중토목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일본의 잠수기술과 개발된 장비는 짐작컨대 36년간 식민치하에 있던 한국인에게 고스란히 전수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같은 추측은 현재도 당시에 사용했던 재래식 헬멧장비로 교각건설(우물통), 수중 고르기, 피복석 거치 등 수중토목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고

수중토목분야 만큼은 현대식 장비가 오히려 불편하다고 할 정도로 사용 빈도가 높아 왔다.


일제시대부터 재래식 헬멧장비를 사용한 재래식 헬멧잠수사의 신분은 대개 하층계급의 부자관계, 형제관계, 친인척에 의해 사용되었거나 대물림 해 왔다.
지금은 품질이 우수한 장비의 출현과 산업구조의 급속한 변화에 밀려 기술전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재래식 헬멧장비는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1840년 시베가 발명한 것으로

일본을 비롯해 전세계가 약 150년에 걸쳐 잠수산업에 애용해 왔다.

재래식 헬멧장비는 산업잠수의 전형적인 상징물로서 해군에서는 MK-V로 칭하고 민간에서는 일명 머구리라고 부르는데,
머구리라는 호칭은 해방을 전후해 잘못 전해진 그릇된 호칭이다.
머구리의 정확한 어원은 옛 개구리, 즉 잠수사를 지칭한다.


옛날부터 잠수하는 사람을 머구리라고 호칭하였는데

사람이 아닌 장비가 머구리로 둔갑된 사연은 목격자 입장의 편향적 사고가 개입되어

머구리 원래의 의미는 무시된 채 불려졌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리 나라의 잠수발전사는 일본의 영향아래 성장해 왔고

1950년 6월 25일 일련의 비극을 겪으면서

한국의 잠수산업도 어둡고 긴 터널을 벗어나게 된다.
그것은 동족상잔의 비극이 시작됨과 동시에

우리 나라의 잠수산업이 발전하게 되는 획기적인 계기가 된다.


(1) 한국 해군의 산업잠수 영향


1950년 이후 반세기에 걸쳐 한국 해군의 잠수관련부대들이 잠수계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해상작전을 위한 잠수관련부대들이 한 둘씩 창설됨으로서

한국에도 스쿠버라는 새로운 잠수장비가 등장하게 되었다.

스쿠버란 Self-Contained Underwater Breathing Apparatus의 합성어로서

독립된 휴대용 잠수기구를 잠수사가 물 속으로 직접 가지고 들어가 숨쉬는 「수중자가호흡기구」를 말한다.

이 장비는 1943년 2차 세계대전 말기의 독일 점령지인 프랑스 지중해변의 소읍에서

프랑스 해군 대위인 자크-이브. 쿠스토(Jacque-Yves Cousteau)와 고압가스 전문가이자 공학자인 에밀 가냥(Emile Gagman)에 의해 발명된 것이다.
미 해군의 경로를 통해 한국 해군에 등장한 스쿠버는 암흑 속을 걷고 있던 한국인에게

새로운 수중세계를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그 주도적 역할은 해군의 잠수관련부대로부터 시작되었다.

단지 국방수호의 군사적인 목적을 위해 창설된 한국 해군의 잠수관련부대는

침체된 민간 산업 잠수 분야에 활력을 불어 넣는 원동력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후일 레크리에이션잠수라는 새로운 놀이문화를 싹트게 하는 토양이 되었다.


1970년대까지는 한국의 경제도 어려웠지만

해군의 역할과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지 않아 예산 배정이 빈약했다.
그 여파로 한국의 SSU는 세계의 잠수관련 부대에 비해 잠수 능력의 척도인 심해 잠수 기술이 상대적으로 뒤 처질 수밖에 없었고

낙후된 장비로 인해 공기잠수의 한계인 50m 천해잠수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다 1978년 1차 석유파동과 1979년 2차 석유위기를 겪으면서

정부도 비로소 해양의 부존자원 개발 및 이용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3차 유엔 해양법회의가 타결되면서

세계 자국의 해양자원 보호와 안보상의 이유로 해양개발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고 있음을 자극 받아

해상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해군력 강화가 무엇보다 필요함을 깨닫게 되어


1982년 혼합기체잠수 실용화 3개년 계획을 세우게 된다.
혼합기체잠수 실용화 3개년 계획은 해군 및 SSU의 심해잠수작전 향상은 물론 국가적 차원의 해양개발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것으로
1982년 9월 15일에서 10월 15일 1개월에 걸쳐

비포화 혼합기체잠수로 수심 75m(250ft)에서 30분간 체류하는 한국 최초의 실험잠수에 성공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혼합기체잠수는 깊은 수심에서의 마취현상밀도 증가 현상을 경감시키기 위해 이용되고 있는데
비포화 혼합 기체 잠수포화 잠수와는 달리 인체에 기체가 포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혼합기체로 호흡하는 잠수를 말한다.
공기 잠수보다는 깊게 잠수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공기 잠수보다 감압 시간이 길어 해저 체류시간에 제약을 받게 되므로 대개 90m 이내의 수심에서만 실시된다.

 

포화잠수는 잠수사의 안전성과 작업의 효율성을 고려할 때 비포화잠수보다는 우수하지만 막대한 자금이 투자되어야 하는 단점이 있어
지원 여력이 부족한 해군의 실정을 감안할 땐 SSU의 비포화 혼합기체잠수는 공기잠수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첫 실험잠수가 성공적으로 끝나면서 실용화계획을 위해 연구와 훈련이 거듭되던 도중 실전에 투입되어야 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것은 1983년 3월 부산 다대포에 격침된 간첩선과 시신인양을 위한 사전탐색작업이었다.
실전에는 처음 투입되는 비포화 혼합기체잠수였지만

인명사고 없이 인양작업에 필요한 사전조사를 마치고 무사히 상승함으로서 한국의 잠수역사에서 최초의 비포화 혼합기체잠수 성공이라는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비포화 혼합기체잠수의 기술축적은 포화잠수운용에 커다란 도움이 된다.
1994년 4년여에 걸쳐 건조된 해양경찰청 소속의 3,000톤급 경비구난함 「태평양」호가 한국 최초로 포화잠수용으로 취역함으로서

포화잠수만큼은 해군 SSU보다 앞서는 듯 했다.


사실 해군 SSU의 포화잠수 도입은 해경에 비해 수년이 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해경의 포화잠수는 목적과 방향에 차질을 빗게 되고

해군 SSU의 포화잠수는 놀랄만한 실적을 올리게 된다.

그것은 150m에 격침되었던 간첩선의 인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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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KCDTA(사단법인 한국산업잠수기술인협회)에서 발췌한 글 입니다.

엉터리컴의 내용들을 정리하다 보니 예전에 다운 받아 놓은 글중에 하나 입니다.

이글은 강대원님이 기고한 글인지,
아니면 누가 글중에일부를 그분의 글을 인용하여 올린 글인지는 자세히 모르겠으나,
비교적 상세한 내용들이라 여기에 그대로 다시 올립니다.

 

(사진크기는 현재 이 블로그가 내가 원하는 크기를 할 수 없게 되어  올리기를 포기 합니다.)


*한국 다이빙의 역사 *


우선 한국의 레크레이션 다이빙 역사가 약40년이 흘렸는데도 변변하게 정리된 기록이 없다는 것이 매우 안타까웠다.
현재 레크레이션 다이빙에 입문한 다이버들 중에는 테크닉이 중요하지 역사는 무슨 역사냐고 할런지 모른다.
이 나라에 태어난 사람이면 단군의 신화는 알아야 되듯이 다이버라면 우리나라의 다이빙 역사 정도는 알아야 된다고 판단되어 우리나라 다이빙 역사를 요약해서 기술 해 본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되었던 석기시대 또는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판명된 바닷가 옛 살림터 주변에서는 조개 무덤이라는 것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우리 조상들도 기원전 300년경부터 다이빙을 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 본다.
문헌에서 보면,
'해녀연구' 라는 책에서는 4세기경에 해녀가 있었다고 하는 고고학적 자료를 찾을
수가 있다.

[ 강대원, 1973, 한진문화사 ]
옛 기록을 담고 있는 다이빙 관련 문헌들 중에 유일하게 나타나 있는 동양에 관한 기록은 기원전부터 활동했다고 하는 일본의 '아마(海女)' 이나 우리나라 해녀가 일본의 해녀보다 물에 대한 적응력이 월등하며,

1970년대 일본과 한국의 해녀가 모두 30,000명인데 제주도의 해녀가 11,000명인 것에서 보나,

지리적 여건으로 보아 제주도가 해녀의 발상지로 추정되며 세계최초의 여성 다이버는 제주도
해녀
가 아닌가 추측된다.

다산 정약용이 경상도 장기현에 유배중 지은 '잠수하는 아가'에서 보면 물질을 하다 죽은 며느리를 기리는 어느 시아버지의 심정을 적은 것으로 잠수하는 상황이 비교적 잘 기술되어 있다.
이것으로 볼 때 조선시대에서만 하여도 제주도 이외의 육지 바닷가에서도 많은 해녀가 활동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 이순신 장군이 발명한 '거북선'을 제외하고는 세계적으로 내세울수 있는 수중에 관한 연구가 거의 없는 듯 하다.

그후 1943년 (프)쟈크 이브 쿠스토에멜까냥이 스쿠바를 발명했으며

1950년 6.25전쟁중에 미 해군으로부터 스쿠바 다이빙 장비와 기술이 도입되어

1953년 우리 해군에도 S.S.U(Ship Salvage Unit)U.D.T(Underwater Demolition Team)
가 창설되었다.

우리나라 다이빙 역사 또한 해군의 유능했던 다이버들에 의해 민간인들에게 전파되었으며,

대학의 모험심 많은 젊은이들에 의해 도입되었고 보급되었다.


1963년 3월 대학의 모험심 많은 개척자들에 의해 남대문 근처의 골방에서 [ 한국
스쿠버 클럽 ]
이 창설 되었다. [ (현) 대한수중협회, KUA, 김상겸, 이병두, 최초의
잠수단체 ]


고려대학교(이병두, 황치효), 연세대(윤석인, 오윤배), 한양대(노건기,김광휘),동국대(차광) 중앙대에서 스킨스쿠버 다이빙 서클이 생겼다.(1968 ~ 1969)


이 시기의 서울의 다이버라야 100~200명이었으며

활동적인 다이버는 고작 30명 내외였고,

잠수 이론서는 없었으며 장비 또한 형편없었다. (10명중 SUIT 소유자 는 7~8명, B.C는 2명, 호흡기 2~3명, 콤프레셔는 총 3대 내외)
그러나 다이버들 간에 정신세계는 매우 우호적이었고 낭만적이었다고 원로 들은 이야기하고 있다.

이때 서울에는 (주)엑심 [ (현) 썬스포츠, 김광휘 ]이라는 장비 수입을 겸한 건축자재 수입 가계가 한남동에 있었고, 우정사 (임성기)와 반도 스포츠 [ (현) 코다스포츠, 유영제 ]가 서울 남대문 시장 앞에 있었다. (한국 최초의 장비점들).

1971년 제주도 수중비경을 맛보고,

1972년 일본인 PADI강사와 다이빙을 해본 김광휘는 [ (현) 썬스포츠 대표, SEA 코스디렉터 ] 1973년 스쿠바 다이빙을 배우기 위해 한국인 최초로 일본으로 유학을 간다.(한국 최초 일본잠수연맹인 JUDF 강사, PADI 강사교육 수료).
1973년 한국에서도 외국교육단체로서는 처음으로 PADI (코스디렉터: 월리암스)가 들어와 한국 최초의 강사 들을 배출하고 (황치전, 조길도, 이병두, 노건기,이춘근, 유국현, 김춘광, 정민영, 현용남 제)

1980년대 초까지 여러번 강사들을 배출하게 된다.

일본에서 귀국한 김광휘는 1975년 한국에서는 최초로 제주도 서귀포 관광호텔 ( (현) 파크호텔 )에 코리아 다이빙센타 라는 RESORT SHOP 을 창업했다. (김광휘,이철우, 황지천)

서로가 합심하지 아니하면 물속을 구경할 수 없었던 그 시절 서울 에서는 모든 다이버들이 우정사를 중심으로 장비도 구입하고 정보도 교환했다.


안정훈(아트스포츠 대표), 정일만(이민), 현용부(현 스쿠바 장비세트 대표)는 임성기(우정사 대표)를 시켜 홍보하면서 한국최초의 순수 스쿠바 다이빙 클럽인 [ 한국 잠수 동호회 ] 가 1976년 설립되었고 (현용부, 정일만, 안정훈, 김인배, 고창근, 임성기, 양태빈, 박순원, 홍근원, 오성원 [ (전) 현대중공업 구매부장, 현중 잠수연합회장 역임 ], 김인영, 오윤배, 정연평, 이건, 한형도(작고), 정석은, 김과윤, 오경민, 장준량, 이병수, 김희일) 현재까지 9명의 회원이 남아 매월 침목
다이빙을 실시하고 있다.

 

이때 경북에도 경북잠수동호회 [ (현) 대구잠수동호회 ] 가 생겼으며,

자매결연을 하고 서로 침목을 도모하고,

경북의 스포츠 스쿠바 다이빙 보급에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 정호웅(작고), 변춘부, 김호상, 임성지, 박병훈, 배칠근, 이태균, 시흥기(작고), 이석근 ]

1977년 김광휘와 조길도, 김현웅이 배출시킨 김영수외 그 문화생들로 우리나라 두번째 순수 취미 스쿠버 다이빙 클럽인 [ 판 코리아 다이빙 클럽 ]이 결성되었고 지금까지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한편으로,

연대 스킨스쿠버 써클 창설의 주축 중 한사람이었던 윤석민을 중심으로 오윤배, 안정훈, 이요섭은 미도파백화점 부근에 스쿠바 다이빙 샵인 [ 바다상사 ]를 창업했으며

윤석민(작고)과 이요섭은 전길남 NAUI 강사(재미 공학박사)로부터 보조강사 자격증을 취득했다.(1978년)
이들이 현재 NAUI KOREA 의 주측 멤버들이다.

잠수 동호회 멤버였던 김인영은(SCUBA DIVER발행인) 1979년 잠수이론이 체계화 되지 못한 이 땅에 [ 스킨 스쿠버 다이빙원리 ] 라는 잠수이론서를 최초로 집필하여 발행하므로 써 잠수계에 기원이 되는 한 획을 그었다. (80년대 잠수이론 교육 시 단체와 관계없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책 임)

1979년 김봉제, 조현종, 차광, 김창환을 중심으로 창설된 KUDA(한국잠수협회) 가 문교부에 사단법인으로 등록되었고

KUDA와 KUA는 상호 견제와 선의의 경쟁으로 현재까지 우리나라 수중계를 이끌어 오고 있다.

한때 무분별한 강사자격증의 남발로 잠수계의 비난을 받았던 KUDA는 1980년 PADI 강사가 된 지봉규(54세, 수영선수, 조오련 수영코치, (전)IDEA KOREA 대표)는 KUDA 기술위원장이 되어 1989년 DITC(DIVING INSTRUCTORS TRAINING COLLEGE) 제도를 만들어 92년까지 이론과 기술을 겸비한 강사들을 배출하므로써 KUDA 인물 역사상 한 획을 그은 사람이다.
이때 주축멤버들이 지금의 잠수계를 이끌고 있는 멤버들이다.(백상현, 정현우, 채상훈, 전순태(작고))

1950년 6.25사변과 함께 우리나라 해군에 스쿠버 다이빙이 보급되어 군복무중 다이빙을 배워 전역 후에도 계속하였거나,

그들로부터 배운 젊은이들, 그 모험심 많은 젊은이들이 써클과 클럽을 만들었던

1960년대까지를 스쿠버 다이빙의 도입기 로 본다면

1970년대는 초창기라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때 뿌리를 내린 단체를 중심으로

1980년대에는 스쿠버 다이빙이 광범위하게 보급 되었다.

1981년 우리나라 잠수계 최초로 여성강사가 탄생되었고 (PADI, 기형희)

1983년에는 윤희성(수중영상제작자), 김재영(SSI한국대표), 김용중(BASC강사), 박종섭(
BASC KOREA총무), 하승수(BASC강사)를 중심으로 10여개 대학을 묶은 [ 전국대학
잠수연합회 ]
가 결성되었으며

1990년까지 한강수중탐사, 휴전선에서 여의도까지 수중탐사, 일본 원정 등 많은 일화를 남겼다.

윤희성은 1986년 [수중계]라는 수중전문지를 창간했다.(1987년 제2호로 폐간) [전. 대 잠수연합]을 창설했던 이들은 1989년 일본으로 건너가서 BS-AC강사가 되었으며

BS-AC를 국내에 도입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BS-AC JAPAN대리점으로 있었던 BSAC는 1994년 7월 BS-AC KOREA 로 독립하게 된다.
1987년 이전까지는 잠수하면 수중사냥과 채집이 거의 전부였다.

1980년 초까지는 어촌의 인심도 좋았으나,

무분별한 남획으로 잠수할 수 있는 POINT가 없어지던 이시기에 초창기 잠수를 도입했던 우리나라 잠수계 엘리트들을 중심으로

1987년 6월 24일 [ 한국수중사진연구회 ] [ (현) 한국 수중 사진 영상협회 ] 가 창설 되었다.

(김광휘,김인영,이장백,양태빈,이병두,이상시,이석근,김생수,장석은,권주훈 등)

이와 때를 같이해서 스킨스쿠버 다이빙 원리라는 잠수이론서를 집필했던 김인영은 1987년 9월에 수중전문지 [ SCUBA DIVER ] 를 격월간으로 발행하게 된다.


잠수관련 소식이 전무했던 그 시절 잠수이론, 수중사진, 외국소식 등을 전달하여 우리나라 수중인들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렸으며 지금까지 많은 수중인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1990년 이전에는 잠수하면 일부 특수계층만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으나 ,

90년 이후 국가의 발전과 각종 매스컴들의 영향으로 회사원, 자영업을 하는 일반인들에게
까지 급속도로 보급 되었다.

1992년 6월 26일 드디어 한국에도 수중계의 두뇌집단이 생겨났다.
잠수와 관련된 의학자, 생물학자, 공학자, 학술계, 수중영상전문가, 잠수관련 특수부대 책임자들이 모여 [ 한국수중과학회(KOSUST) ] 를 창립했다. (고철환 서울대교수, 제종길 해양연구소 연구원, 윤석근, 이병두, 정의욱, 김강택등 33명)


1992년 7월 썬스포츠 김광휘는 SCUBAPRO에서 보급하는 SEA (SCUBAPRO EDUCATIONAL
ASSOCIATION)을 도입했으며,

1983년 전국대학 잠수연합을 주도했던 김재영은

1994 년 일본에서 SSI를 도입 하였다.
또한 KUDA 위상을 한 단계 높였던 지봉규는 1997년 미국교육 단체인 IDEA (INTERNATIONAL DIVING EDUCATORS ASSOCIATION)을 도입하였다.

잠수장비가 부족했고 검정 슈트가 유행했던 50,60,70년대를 거쳐 잠수가 본격 도입되었고,
장비들이 좋았던 80,90년대 초반에 이어 우리는 컴퓨터게이지 시대를 지나서 NITROX, 재호흡기 시대를 살고 있다.

본 글의 내용과 한국다이빙역사의 비디오를 보여 주신 최신욱강사님(해양인의집),
서송훈사장님(스쿠바하우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바 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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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을 옮겨 놓으면서 이 엉터리도 ,

과거의 어려웠던 시대에 잠수를 보급키 위한 잠수인 원로의 노고 대해

머리숙여 감사를 표하는 바입니다.

DAN은 매년 지난 해 수집된 다이버 사고에 관한 보고서를 내놓습니다


다이빙전경이중 가장 안타까운 것이 당연히 사망 사고에 관한 것으로 내용을 읽다 보면,

참 허무하게 죽는 사람도 있구나 싶은 경우가 허다 합니다


순간적인 판단의 착오 혹은 미숙으로 아까운 생명을 잃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 우리 주위에서도 혹은 우리 자신도 이와 유사한 황당한 경험을 쉽게 목격하거나 보게 됩니다.




예를 들면


수중여인*을 착용하지 않고 배에서 굴러 입수하는 경우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고 입수하는 경우


*호흡기를 물지 않고 입수하는 경우


*웨이트를 착용하지 않고 입수하는 경유


*호흡기 1 단계를 열지 않고 하강하는 경우 등등


특히 먼거리를 보트 여행을 한 후 멀미로 고생하다 보면,

우선 입수하는 것이 급해서 별의 별 실수를 다 하게 됩니다 .


DAN 보고서에는 이와 유사한 여러가지의 사망 사고에 대한 조사보고가 나와 있는데,

이중 몇가지만 소개해 보면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사고들이네요.)


1. 53세의 경험이 많은 남성 다이버는 입에 호흡기를 물지 않고,

하강을 시작하였다가 아차하고 핀킥을 하여 상승하였는데,

이번에는 포니 보틀(Pony Bottle)을 물고 하강합니다.

주위에 있던 다이버가 그것을 보고 주의를 끌려고 시도를 하였지만,

계속 하강하면서 못보았는지 보고도 무시하였는지 다이빙을 계속했습니다.


15미터 수심에서 10분 정도 지나자 공기가 떨어지고

다이버는 공포에 질리면서(panic) 급상승을 시도하고,

수면에 도착하면서 의식을 잃었습니다


급 상승 중 을 참았기 때문에(기도를 열지 않았기 때문에)

폐 파열 사고로 이어지고 공기 색전증에 걸렸고

주위의 여러 다이버의 소생술에도 불구하고 살려 낼 수 없었습니다


그의 주 탱크는 공기가 가득 들어있는 상태였으며,

손목에 차고 있든 컴퓨터는 켜지도 않은 상태로

급상승에 대한 경고음도 발생시킬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문제점은 여럿 있지만,

짝과의 확인 절차 만 (다이빙전 안전 점검 - BWRAF) 거쳤더라도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사고가 아니었을까 .

 


2. 41세된 남성 다이브마스타가 개방수역 훈련다이빙을 보조하고 있든 중 약 20미터 수심에서 학급으로부터 이탈 되었습니다.


2시간 후 수심 35미터 지점에서 발견되었는데,

탱크 밸브가 거의 열려 있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탱크 밸브를 열자 잔압계가 위로 올라가면서,

상당히 많은 양의 공기가 남아 있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3. 27세 남자 다이버는 동굴 다이빙에 관해 "초보(소개) 동굴 다이버"자격증을 가진 상태였습니다.

스쿠터그러나 동굴 깊이 들어 가고 싶은 욕심에 짝과 함께 자신의 자격증 수준을 속이고 스쿠터를 이용하여 동굴 깊숙히 들어 갔습니다.

가는 도중 동굴 속에 을 뒤집어 놓는 바람에 서로 볼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한 다이버가 길을 찾아 밖으로 나왔지만,

다른 다이버는 몇 시간 후 동굴 입구에서 660미터 속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다이버가 초보에서 진보(?) 다이버로 발전하는 단계는 상당히 점진적으로 이루어 집니다.

조류 상황을 경험한다거나,

일기 불순한 가운데 다이빙한다거나,

배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다이빙 한다거나 해서

조금씩 힘든 상황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진보하고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고 하는 것이지요


뭔가 계단을 걸어 올라 가지 않고 엘레베이트를 타고 발전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사고가 나게 마련이지요.

동굴 다이빙은 다이빙 모험 중 아마도 가장 확실한 교육경험을 쌓아야 하는 과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4. 드라이슈트 사고입니다.

49세의 경험이 풍부한 다이버가 다이빙 도중 슈트에 구멍이 난 것을 발견하고 상승 수신호를 했습니다.

약 5미터 수심에서 짝으로 부터 분리되었고,

짝은 수면 상승을 하였으나 본인은 그러지 못하였습니다.

90분 후 시체를 발견하였는데,

 

드라이의 구멍이 난 것 이외에도

드라이슈트 인플레이트 호스가 꼽혀 있지 않았고,

중요한 것은 BCD의 인플레이트 호스도 꼽혀 있지 않았습니다.


 


5. 사제 장비를 사용하다가도 사고가 나는 군요.

허기사 1960년 대쯤 다이빙을 시작한 분들은 장비란 것이 구하기도 어렵고 돈주고 사기에도 한 재산이 드는 그런 시절이었으니까,

이리 저리 뚝딱해서 장비를 조립 내지 만들어 쓰곤 했었다고 들었습니다 만,


2000년 한 해에 만 해도 두 사람이 사제 장비를 사용하다 목숨을 잃었는데,

한 분은 자신의 아파트 수영장에서 사고를 당했고,


다른 한분은 52세 남자로 경험이 많은 다이버인데 재호흡기를 시험한다고 나섰는데,

이것도 키트를 구입해서 본인이 조립한 것이 었습니다.

이분은 얼마 전에도 장비에 기술적인 문제를 경험해서 수선을 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 다시 시험 다이빙 한다고 집을 나선 것이 었습니다.


밤에 되도 귀가하지 않자 수색 작전에 시작되었는데,

20미터 수심에서 익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



6. 수중 사냥도 위험성이 있다는 예를 들 수 있게 되었군요.


16세된 꼬마 아저씨가 해안에서 50마일 떨어진 유전 가까이 에서 어머니와 다른 다이버와 함께 셋이서 두번째 다이빙을 하고 있었습니다.

두 번 모두 60미터 이하 수심으로 내려 갔고,

꼬마 아저씨는 엄마의 컴퓨터에 의존해서 다이빙을 하였습니다.


핏싱큰 고기를 발견하고을 쏘아 BCD 에 부착시켜 둔 낄때에 붙여 두었는데,

이놈의 고기가 죽지 않고 있다가 이 꼬마 아저씨를 공격했습니다.


얼굴과 목을 물리는 것을 보고 엄마가 와서 도와 주려고 할 때는 이미 의식이 없었고 ,

수면으로 데려 왔으나 을 거두었습니다.


호흡기는 대심도 다이빙에 걸맞지 않는 비균형식의 호흡기를 사용하고 있었고,

어머니의 컴퓨터도 다이빙 시작 할 때 이미 수심시간을 나타내지 못하도록 고장이 나 있었습니다.


 


7. 약물의 다이빙에 대한 영향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리라 봅니다 .


45세된 남자가 다이빙 전 날 과 약간의 환각제를 복용하고,

그날 아침에도 한잔을 곁들였습니다.

 

짝과 함께 입수하여 13미터에서 짧게 다이빙을 하였습니다.

짝이 떠난 후에도 바닥을 기어 다녔는데,

나중에 탱크장비는 발견하였는데

다이버는 끝까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이 다이버는 BCD 없이 다이빙을 하였습니다 .


 


8. 33세된 다경험 유자격 다이버가 혼자서 가재잡이를 나섰습니다.

1년 전에 공기를 충전시켰던 자신의 탱크를 사용하였고,

장비를 잘 못 조립하였습니다.

 

10미터에서 5분이 지난 후 그는 공포에 질려(Panic) 급상승하였고,

의식을 잃고 폐압력 손상으로 사망하였습니다.


혈액 검사 상 코카인 복용 상태인 것이 밝혀졌고,

혈중 알콜 수치가 매우 증가 해 있었습니다.

아마도 탱크를 짊어지고 하강한 것이 아니고,

손으로 들고 내려간 것으로 보입니다.


탱크가 아래 위가 바뀌 장착 되어 있었으니까요.


 


9. 48세 된 무자격 다이버가 짝도 없이 불과 3미터 수심으로 내려 갔는데,

돌아 오질 않았습니다.

4시간 후 시체를 발견하였는데,

사후 부검 결과 운전 허용 혈중 알콜 농도의 3배에 달했습니다.




이처럼 누가 생각해도 초등학교 도덕 셤문제 처럼 눈에 보이는

미리 예방 할 수 있는 문제가 실로 벌어지고 있답니다.

 

<<이 내용은 세계각국의 잠수사고 사례를  모아서 올린 글을 발췌한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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