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우리나라 다이빙의 역사를 찾아 올렸읍니다.

 

이번에 글은 잠수가 산업에 미치는 영향이 크고

또 남이 하지 못하는 위험하고 힘든 일을 묵묵히 수행해 나간

산업잠수사를 위해 글을 찾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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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조직이든 대대로 내려온 계보라는 것이 있는데
그 계보가 언제 시작되었느냐 하는 것은 의견이 분분할 수 있다.


우리 나라의 잠수역사를 정리하다 보면 아주 기초적인 자료조차 정리되어 있지 않은 데다
저마다 '정통'과 '원조'를 강조하는 바람에 매우 혼란스럽고
워낙 군소집단의 이합집산이 심해 계보의 추적이 힘들어 실체 파악이 어렵다.
그것은 조금만 숫자가 많아지면 파벌을 형성하고 분열을 거듭하는 못난 성향이 우리 민족에게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어느 전문지에서 시대별 세대별 스쿠버 잠수역사에 대해 정리한 글을 읽었는데,
역시 역사라는 것은 보는 시각과 관념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사람의 주장이 맞든 안 맞든 또는 정설이든 가설이든 간에 물증만 제시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없을 텐데
아무런 물증도 없는 상태에서 객관성마저 결여된 글을 읽었기에

읽고 난 뒤 뒷맛이 영 개운치 않았다.
필자의 「한국의 산업잠수 발전사」도 읽은 사람의 각도에 따라 주장과 해석이 다를 줄 안다.
또 반론을 제기할 것을 예상하고 있으므로

필자의 부족함을 보충해줄 수 있는 확실한 자료와 충언을 기대한다.

그리고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짚고 넘어갈 게 있다.
영어의 "컴머셜(Commercial Diving)"을 우리말로 "산업잠수"라고 어느 전문지에 최초로 쓴 사람이 필자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컴머셜다이빙을 상업잠수라고 한다.
컴머셜을 상업으로 번역하든 산업으로 번역하든 간에 틀린 것은 아니지만
우리말의 상업은 오히려 레저잠수에 어울리는 용어다.
따라서 컴머셜 다이빙은 산업잠수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그리고 법률상 산업잠수사는 산업안전보건법에 저촉을 받고
해산물을 채취하는 잠수사는 수산업법에 저촉 받는
사실을 참고로 알아둬야 할 것이다.

우리 나라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 쌓여 있는 해양국가의 유리한 조건하에 있으면서도
해양개발에 대한 의지와 지식, 정책부재 등의 소극적 자세 때문에 질적 양적인 변화 없이 지금까지 유지해 온 반면

해양선진국들은 끊임없는 도전과 모험 속에서 잠수분야를 급속도로 성장시켜 왔다.


우리 나라의 잠수역사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기록 자체가 전무할 뿐만 아니라 계보의 자료조차도 빈약한 실정이다.


더욱이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우리 나라는 46년간 일제의 식민 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 계보의 추적이 어렵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 나라의 잠수계보는 결국 일본잠수계보를 참고할 수밖에 없다.
일본은 주위가 바다로 둘러 쌓인 섬나라로 옛날부터 바다와 특별히 깊은 관계를 가져왔다.

일본의 잠수 역사에서 잠수사라는 직업이 정착한 것은 메이지(明治)시대라고 한다.

이때에 제조된 잠수기구만 수 천대에 달했다고 하니

잠수가 차지하는 비중과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가름할 수 있다.
일본은 메이지 시대부터 이어온 수준 높은 잠수기술과 지속적인 장비개발로 인해

러일전쟁 때 여순 항에 침몰된 배를 성공적으로 인양할 수 있었고

오늘날 일본의 잠수어업과 수중토목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일본의 잠수기술과 개발된 장비는 짐작컨대 36년간 식민치하에 있던 한국인에게 고스란히 전수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같은 추측은 현재도 당시에 사용했던 재래식 헬멧장비로 교각건설(우물통), 수중 고르기, 피복석 거치 등 수중토목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고

수중토목분야 만큼은 현대식 장비가 오히려 불편하다고 할 정도로 사용 빈도가 높아 왔다.


일제시대부터 재래식 헬멧장비를 사용한 재래식 헬멧잠수사의 신분은 대개 하층계급의 부자관계, 형제관계, 친인척에 의해 사용되었거나 대물림 해 왔다.
지금은 품질이 우수한 장비의 출현과 산업구조의 급속한 변화에 밀려 기술전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재래식 헬멧장비는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1840년 시베가 발명한 것으로

일본을 비롯해 전세계가 약 150년에 걸쳐 잠수산업에 애용해 왔다.

재래식 헬멧장비는 산업잠수의 전형적인 상징물로서 해군에서는 MK-V로 칭하고 민간에서는 일명 머구리라고 부르는데,
머구리라는 호칭은 해방을 전후해 잘못 전해진 그릇된 호칭이다.
머구리의 정확한 어원은 옛 개구리, 즉 잠수사를 지칭한다.


옛날부터 잠수하는 사람을 머구리라고 호칭하였는데

사람이 아닌 장비가 머구리로 둔갑된 사연은 목격자 입장의 편향적 사고가 개입되어

머구리 원래의 의미는 무시된 채 불려졌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리 나라의 잠수발전사는 일본의 영향아래 성장해 왔고

1950년 6월 25일 일련의 비극을 겪으면서

한국의 잠수산업도 어둡고 긴 터널을 벗어나게 된다.
그것은 동족상잔의 비극이 시작됨과 동시에

우리 나라의 잠수산업이 발전하게 되는 획기적인 계기가 된다.


(1) 한국 해군의 산업잠수 영향


1950년 이후 반세기에 걸쳐 한국 해군의 잠수관련부대들이 잠수계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해상작전을 위한 잠수관련부대들이 한 둘씩 창설됨으로서

한국에도 스쿠버라는 새로운 잠수장비가 등장하게 되었다.

스쿠버란 Self-Contained Underwater Breathing Apparatus의 합성어로서

독립된 휴대용 잠수기구를 잠수사가 물 속으로 직접 가지고 들어가 숨쉬는 「수중자가호흡기구」를 말한다.

이 장비는 1943년 2차 세계대전 말기의 독일 점령지인 프랑스 지중해변의 소읍에서

프랑스 해군 대위인 자크-이브. 쿠스토(Jacque-Yves Cousteau)와 고압가스 전문가이자 공학자인 에밀 가냥(Emile Gagman)에 의해 발명된 것이다.
미 해군의 경로를 통해 한국 해군에 등장한 스쿠버는 암흑 속을 걷고 있던 한국인에게

새로운 수중세계를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그 주도적 역할은 해군의 잠수관련부대로부터 시작되었다.

단지 국방수호의 군사적인 목적을 위해 창설된 한국 해군의 잠수관련부대는

침체된 민간 산업 잠수 분야에 활력을 불어 넣는 원동력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후일 레크리에이션잠수라는 새로운 놀이문화를 싹트게 하는 토양이 되었다.


1970년대까지는 한국의 경제도 어려웠지만

해군의 역할과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지 않아 예산 배정이 빈약했다.
그 여파로 한국의 SSU는 세계의 잠수관련 부대에 비해 잠수 능력의 척도인 심해 잠수 기술이 상대적으로 뒤 처질 수밖에 없었고

낙후된 장비로 인해 공기잠수의 한계인 50m 천해잠수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다 1978년 1차 석유파동과 1979년 2차 석유위기를 겪으면서

정부도 비로소 해양의 부존자원 개발 및 이용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3차 유엔 해양법회의가 타결되면서

세계 자국의 해양자원 보호와 안보상의 이유로 해양개발에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고 있음을 자극 받아

해상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해군력 강화가 무엇보다 필요함을 깨닫게 되어


1982년 혼합기체잠수 실용화 3개년 계획을 세우게 된다.
혼합기체잠수 실용화 3개년 계획은 해군 및 SSU의 심해잠수작전 향상은 물론 국가적 차원의 해양개발 요구에 부응하기 위한 것으로
1982년 9월 15일에서 10월 15일 1개월에 걸쳐

비포화 혼합기체잠수로 수심 75m(250ft)에서 30분간 체류하는 한국 최초의 실험잠수에 성공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혼합기체잠수는 깊은 수심에서의 마취현상밀도 증가 현상을 경감시키기 위해 이용되고 있는데
비포화 혼합 기체 잠수포화 잠수와는 달리 인체에 기체가 포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혼합기체로 호흡하는 잠수를 말한다.
공기 잠수보다는 깊게 잠수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공기 잠수보다 감압 시간이 길어 해저 체류시간에 제약을 받게 되므로 대개 90m 이내의 수심에서만 실시된다.

 

포화잠수는 잠수사의 안전성과 작업의 효율성을 고려할 때 비포화잠수보다는 우수하지만 막대한 자금이 투자되어야 하는 단점이 있어
지원 여력이 부족한 해군의 실정을 감안할 땐 SSU의 비포화 혼합기체잠수는 공기잠수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첫 실험잠수가 성공적으로 끝나면서 실용화계획을 위해 연구와 훈련이 거듭되던 도중 실전에 투입되어야 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것은 1983년 3월 부산 다대포에 격침된 간첩선과 시신인양을 위한 사전탐색작업이었다.
실전에는 처음 투입되는 비포화 혼합기체잠수였지만

인명사고 없이 인양작업에 필요한 사전조사를 마치고 무사히 상승함으로서 한국의 잠수역사에서 최초의 비포화 혼합기체잠수 성공이라는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비포화 혼합기체잠수의 기술축적은 포화잠수운용에 커다란 도움이 된다.
1994년 4년여에 걸쳐 건조된 해양경찰청 소속의 3,000톤급 경비구난함 「태평양」호가 한국 최초로 포화잠수용으로 취역함으로서

포화잠수만큼은 해군 SSU보다 앞서는 듯 했다.


사실 해군 SSU의 포화잠수 도입은 해경에 비해 수년이 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해경의 포화잠수는 목적과 방향에 차질을 빗게 되고

해군 SSU의 포화잠수는 놀랄만한 실적을 올리게 된다.

그것은 150m에 격침되었던 간첩선의 인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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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KCDTA(사단법인 한국산업잠수기술인협회)에서 발췌한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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