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기도 하면서.. 넘 감동적.............

 


 

 

 

당분간 님들에게 찾아 갈 수 없네요...

(오늘 잠시 병원에서 빠져 나와서 이 동영상 하나 올립니다...)

뱅기 연착으로 어제 밤 늦게...

아니,

오늘 새볔에 도착해서 경향이 없네요...

 

늦게 나마  안 미리 구리수마수!!!!

 

찾아 주신 님들에게 감사 드리며,

시간 나는 대로 찾아 뵙겠읍니당~~

 


 
- 12.25 크리스마스는 서양冬至로서 태양신 미트라의 탄생일-

 
종교와 철학(사상)과 역사는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세익스피어의 작품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살을 베되 피를 흘리지 말라”는 재판관의 말처럼 어불성설이다.
다시 말해 종교와 역사는 상호 관련지어 생각해봐야 진실로 전체 모습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크리스트교(西敎) 또한 예외일 수 없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유랑 민족으로 고달프게 살아온 유대민족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역사를 깊이있게 들여다 볼 때,
유대족의 종교인 유대교가 낳은 크리스트교 교리가 형성된 역사적 배경을 알 수 있다.
 
 
다양한 종교사상이 혼재한 메소포타미아
  
고대의 메소포타미아는 지금의 중동지역으로 동·서양 문명권이 상호 교류하면서도 빈번하게 충돌하는 지정학적 요충지였다. 한 민족국가가 몇 백년이나 1~2천년 지배하다가도 또 다른 신흥강국이 일어나 점령해버리는 사건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지역이었다.
이 지역을 지배했던 민족은 수메르, 구 바빌로니아, 앗시리아, 히타이트, 신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제국 등 수많은 이름으로 역사 속에서 존재했다가 사라져 갔다.
민족국가들 간의 전쟁으로 계속 정복민족이 바뀌는 역사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선조 아브라함 때부터
오랫동안 정착과 유랑생활을 반복하며 힘겨운 삶을 살아온 히브리민족의 3대종교(유대교, 크리스트교, 이슬람교)의 교리에 이 지역권에 속한 여러 민족의 종교 사상들이 뒤죽박죽 섞이고 혼합되는 신학적 특징이 나타나게 된다.
(▲ 미트라 신전의 부조(浮彫) 로마 농경신들 중에 가장 중요한 태양신이 가운데 있고, 그 주위에 서양 천문학에서 말하는 12궁도의 별자리가 새겨져 있다.)
  
 
메시아 사상의 출발점, 조로아스터교와 크리스트교

유대인들은 페르시아 왕을 메시아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가 자기민족을 신 바빌로니아의 압제(BC 586~539년)에서 해방시켜 주었고,
바빌로니아제국에 의해 파괴된 예루살렘 신전까지 재건축하도록 재정지원을 해주었으며,
종교적 자유인으로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대인의 메시아로 인식됐던 페르시아 왕이 신봉하던 종교가 바로 ‘조로아스터교’였고,
따라서 유대인들은 자연히 조로아스터교의 메시아 사상을 유대교 교리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실제 종교역사를 추적해보면, 조로아스터교는 동·서양의 메시아(구세주) 사상 ─ 즉 동양불교의 미륵사상과 크리스트교의 메시아 사상 ─ 이 다 녹아 있었던,
세계문명의 고향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메시아 사상의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조로아스터교에는, 창시자 조로아스터가 죽은 후 3천년이 지나면, 최후 심판기가 오고, 그때 모든 인간은 부활하며,
용해된 금속(가을 金기운)으로 심판이 행해진 후, 영생복락의 메시아 세상이 온다는 사상이 있다.
 
종교 예언자 조로아스터 사후 3천년 후에 유일신이 지상에 강림해서 지상천국을 건설한다는 조로아스터교의 ‘유일신 사상’은 바빌로니아 멸망 이후에 유대교 교리로, 다시 유대교에서 크리스트교로, 인도북부까지 점령했던 페르시아 제국에 의해 힌두교의 마에트라(마이트레이야) 신앙과 연결되고, 다시 미륵 대승불교의 미래 부처로 변하여 동·서양 구세주 사상으로 역사적 변천을 하여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이다.
 
"마태복음"에 보면,
아기예수 탄생 당시에 동방박사 3인이 오게 되는데, 그들은 바로 조로아스터교의 제사장이다(이 점은 역사학자마다 조금 견해가 다른 듯해도 크게 보면 같다.
왜냐하면 역사가마다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마기교, 미트라교 등으로 서술하는데, 이 종교들이 모두 다 조로아스터교 계열이기 때문이다).
 
  
◀◀ 태양신의 상징인 미트라 관을 쓰고 있는 예수의 초상(초기 크리스트교 시대)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쓰고 있는 미트라 관 세월에 따라 형태는 조금씩 바뀌었지만 위로 길게 뻗은 교황의 관은 모두 미트라 관이다.

 
 
태양신 미트라신의 탄생일을 예수 탄생일로 정하다
 
해마다 12월 25일이 되면, 세계적 축제로 열리는 크리스마스는 정말 예수가 이 세상에 태어난 날일까?
이에 대해서는 KBS-TV의 <스펀지〉 프로그램에 신학교 교수(장세훈)가 출연하여 역사적 진실을 증언한 바 있다.
결론은 12월 25일이 예수 탄생일이 아니고 원래 미트라신의 탄생일이라는 것.
 
로마에서 3~4세기에 국교가 된 크리스트교(서방 카톨릭교회)에 아직도 미트라교 풍습이 남아 있는데, 로마 교황이 대관식 때 쓰는 관을 ‘미트라’라고 한다.
 
초기 크리스트교는 로마 전지역의 복음화를 위해 예수를 태양신의 상징으로 신격화하여,
이 과정에서 태양신인 미트라신의 생일 12월 25일을 예수의 생일(크리스마스)로 정하여 기념하게 되었다(서방 카톨릭은 354년, 동방정교는 379년부터).
 
미트라신을 군인의 신[軍神], 태양신, 계약의 신이라고 한 것은 조로아스터교와 로마문화, 유대문화의 특색이 골고루 나타난 때문이다.
 로마는 군인의 통치 제국이고, 미트라교의 뿌리인 조로아스터교는 빛의 신(빛은 태양을 상징)이며 유일신인 ‘아후라 마즈다’를 숭배하며, 유대종교의 계약 사상이 크리스트교를 통해 로마문화에 영향을 주었다.
 
미트라교의 제의(祭儀)에 황소(농경문명의 절대요소)를 제물로 바치는 걸로 보아 농경신앙과 관련이 깊음을 알 수 있다.
당시의 동굴 유적에는 미트라가 황소를 죽이는 그림이 많이 나타나 있다.
또한 로마제국에서 국가적 축제로 행했던 농신제(農神祭; 농경신앙의 제의)중에 미트라신을 섬기는 절기로 12월 25일을 정하고 있었다.
이 12월 25일이 로마달력으로는 서양의 동지절에 해당된다.
 
 
 
미트라교의 기원은 동방 신교문화
 
 
어느 해 동짓날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동지가 후천 설이니라.” 하시니라.
(道典 2:138:5)

 
1년 24절기 중에 낮이 짧아지다가 다시 길어지기 시작한다는 동지(冬至)를 동방의 우주철학인 역학(易學)에서는 ‘일양시생(一陽始生; 양이 생겨나기 시작한다)’이라고 풀이한다.
즉 햇빛이 새로 강해지기 시작하는 동지절을 태양신이 새롭게 기운을 얻어 소생하는 걸로 보아,
동짓날을 태양신 미트라의 생일로 삼은 것이다.
로마-페르시아 문명시대 때부터 출발한, ‘빛은 동방으로부터’라는 유명한 역사인식도 이집트-메소포타미아 문명권 제국(諸國)의 오랜 태양신 숭배 신앙에서 출발했다.
 
세계 모든 종교에서 구도자들이 한결같이 ‘빛’을 거룩한 신성(神聖)과 진리의 표상으로 삼은 것도 절대자와 메시아에 대한 간절한 염원의 표출일 것이다.
 
옮겨 온 곳 : 까페"한한한의 비밀과 사명"

오늘 음력 11월19일(12월20일)은 "성웅 이순신"장군께서 전사하신 날 입니다.

 

가끔은 제 생각으로는 이순신장군은 임진란을 끝으로 

자신을 죽음으로 음폐하고,

식솔과 심복 몇몇을 데리고,

오끼나와로 이주하여 살았을 것이란 추측을 해 봅니다.  

(국내에서의 은둔이란 그렇게 용이하지도 않을 뿐더러,

죽은사람으로서 살아가기는 쉽지 않으며,

확실한 은둔생활을 하기 위해서라면,

오끼나와가 적격이겠요,

그시대의 사람인 "허균"의 홍길동 전에서도 언급되었던 오끼나와 니까요...)

 

 

제목: 이순신은 전사한 것이 아니라 살아서 은둔하였다.

이운홍


이 글은 남천우씨 글의 대필이며(05/7/27)에 올렸던 글 중에 잘못된 타자부분이 있었으므로 그것을 고쳐서 다시 올리는 글이다.

1. 며칠 전 이운홍씨가 Yahoo에 실린 두 글의 복사본을 우편으로 보내주었다.

내가 콤맹임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는 박완씨의 “이순신제독의 미스테리(05//4/28)”이고,

또 하나는 6일후에 실린 이종호씨의 “이순신장군은 전사하지 않았다(05/05/04)”라는 반박문이었다.
나는 이 두 글을 고맙게 받아 보고 이순신의 죽음 문제가 뜨겁게 논의 되고 있음을 처음 알았다.

2. 나는 이순신 “생존설” 또는 “은둔설”을 제기한 사람이다.

1992년, 이순신에 관한 책을 펴낼 때

나는 이에 반대하는 열기가 뜨거우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 안 사람도 덤벼들다 싶이 반대하고 있으며

지금도 이순신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염불 외우듯이 되풀이하고 있다.


나는 박완씨와 이종호씨의 논쟁(?)이

이러한 국민들의 정서를 대변하거나 또는 반영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으며

그 두 분의 뜨거운 열기에 먼저 감사하는 마음이다.

3. 앞의 두 분 주장 중에서 결론 만을 먼저 살펴 보면,

박완씨는 이순신의 죽음이 “통상적 의미의 전사”라는 것이고

이종호씨는 그런 것이 아니라 “사전에 계획하여 스스로 택한 죽음” 곧 “자진전사”라는 것이다.


나는 이순신이 살아서 은둔하였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므로 상기 주장들이 모두 내 주장에 대한 반론에 해당되는 것임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나는 위의 두 글에 대하여 모두 재반론을 해야 할 입장에 있다.


그러나 이순신이 전사하지 않고 살아 있었다는 말에 대해

생소하게 느끼는 분이 있을 것이므로

이순신 은둔설을 제기하는 근거가 무엇인지에 대해 먼저 설명해 두는 것이 좋겠다.

4. 먼저, 이순신의 죽음 문제에 대하여 몇 가지 종류의 가능성 또는 가설이 생길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그것은 이순신의 죽음이

1)통상적 의미의 전사

2)사전에 계획하여 스스로가 택한 전사

3)죽은 것이 아니라 전사한 것처럼 가장하고 살아서 은둔,

등의 세 가지 가설이 가능하다고 말 할 수 있다.

이상의 세 가지는 원론적으로는 물론 모두가 다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적으로도 가능한지를 따져 보면

그 중에서 두 번째의 것,

곧 “자진전사”는 실제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한마디로 말하면 적탄에 맞아서 죽는다는 일은 이순신도 마음대로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며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이순신 해전의 사상자 기록을 살펴보면,

적탄에 맞았을 때에 죽는 확률이 1/7에 불과하다.

그런데 만약에 실수 없이 꼭 죽어야 된다는 것이 이순신의 입장이라면,

적탄에 맞아서 죽겠다고 하는,

운이 좋을 경우(?)에 만 죽게 되는 바보 같은 계획을 세우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순신의 죽음 문제는 결국

1)통상적 의미의 전사인가?

또는 그런 것이 아니라

2)살아서 은둔하였는가?

두 가지 가능성만이 남게 된다.

 

그러므로 만약에 이순신의 죽음이 통상적 의미의 전사가 아니라고 판단된다면,

우선적으로 그가 죽지 않았을 가능성을 생각해 봐야 되는 것이다.

5. 다음에는 이순신이 살아서 은둔하였다고 생각하는 근거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하겠다.

1)당시의 사회적 배경으로 선조가 왕이었다는 점을 말할 수 있다.

그는 시기심과 의심이 많았는데 그는 또한 엽기적인 방법으로 신하를 죽이고 희열을 느끼는 변태이기도 하였다.
그러한 예를 들어 보면,

선조는 괴씸죄 밖에 없는 정여립을 먼저 죽이게 한 다음에 그가 역모가 발각되어 자살하였다고 거짓말을 하면서 사건을 조작하였는데,

그의 연루자라 하면서 동인(東人)들 1,000여명을 죽였다.

그 중에는 동인의 영수였던 이발과 그의 형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 그들에게는 80세의 어머니와 5세에서 11세 사이의 아들과 조카 5명이 있었는데,

역모에 가담한 사실을 자백하라고 강요하면서,

80세의 할머니에게는 무릅 뼈가 부러지는 고문을 가하여 죽이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모진 매를 때려서 모두 죽였다.
말하자면 1,000여명이 거의 모두 이렇게 죽은 것이다.

당시의 사회가 어떠한 사회였는지 모르는 사람도 있으므로

여기서 잠깐 다른 말을 덧붙이겠다.


이순신 연구의 대가임을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는

누군가가 이순신을 자살하였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거나

또는 살아서 은둔하였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기만 하면,

“사약을 받고 죽을 때에도 왕궁을 향해서 절을 한 다음에 죽는 것이 당시의 유교사회인데 이순신 같은 영웅이 (치사하게) 죽을 일이 두려워서 미리 자살을 하겠는가?”

또는 “해군참모총장에 해당하는 사람이 살아남기 위해서 도망을 치겠는가? 이것은 영웅에 대한 모독이다.” 라는 등의

거창한 말을 잠고대 처럼 쉽게 내뱉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참모총장도 인간이라는 사실과 당시의 유교사회가 특수한 동물들이 사는 사회가 아니라 인간들이 사는 사회였음을 모르고 있다.

왜냐하면 조선시대에도 신하들이 모두 왕궁을 향해서 절만을 한 것은 아니며 신하들 중에는 왕을 쫓아내기 위하여 군대를 이끌고 왕궁을 향해 쳐들어가기도 하였다.

또 당시의 해군참모총장이던 원균은 함대가 전멸된 뒤에도 자기만은 살아보려고 육지로 도망쳤으나 도중에 힘이 빠졌으므로 주저앉은 채로 칼에 맞아 죽었다.

또 이순신이 자신이 죽게 될 일만을 걱정했던 것은 아니다.

가족들은 말할 것도 없으며 유성룡을 포함하여 수십명의 측근 인사들이 모진 고문으로 함께 죽게 되리라는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있었던 것이다.

대가 라는 사람들이 그 정도도 모른다면 걱정스럽다.

또 그런 것도 모르면서 선조대왕을 세종대왕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

2)전쟁이 끝날 무렵, 이순신이 전사하기 한달 전에 선조는 영의정 유성룡을 파직시켜 놓았으며 전쟁이 끝나는 대로 이순신과 함께 역적으로 몰아서 죽일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물론, 이 말에는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인 이순신의 입장에서 보면 대단히 심각한 상황이라고 판단하였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3)당시의 상황 판단이 이러하였음은 이순신의 부하였던 유형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유형은 “(전쟁이 끝나면 역적으로 몰려서 죽게 될 공산이 큽니다. 무엇인가 대책을 세워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고 걱정을 하였더니),

이순신이 자기에게 말하기를, (잘 알고 있다.)

선조의 치하에서는 만약에 장수가 (곧 장수인 내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살아 있으면서),

내가 세운 전공에 합당한 대우를 조금이라도 받으려 생각한다면 (곧 나에게는 괴심죄가 있기 때문에 나는 살아 있기만 하여도),

물론 역적으로 몰려서 죽게 될 것이 거의 확실하다.
그러므로 나는 전쟁이 끝나는 마지막 날에 죽을 것이며 (곧 죽을 계획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러한 불행한 일이 생기지 않게끔 만들겠다(그러니 너는 안심하여도 된다)라고 하였다.”는 내용의 글을 남겼다.


그의 말은 이 얼마나 깊은 뜻이 담겨 있는 말인가?

또 유형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이 글을 무엇 때문에 남겼겠는가?
또 이순신이 그렇게 말하였다면 그에게는 당연히 무엇인가 계획이 있지 않았겠는가?

4)그런데 공교롭고 또 이상하게도,

전쟁이 끝나는 바로 그 날에 이순신이 전사하였다는 것이 역사의 기록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날짜만이 일치한 우연한 전사일까?

또는 그런 것이 아니라 사전에 계획하여 이룩한 인위적 죽음일까?

5)이순신의 큰 형의 아들이고 전사 현장에 함께 있었다는 이완의 형이기도 한 이분이 쓴 이순신 전기에 따르면

“11월 19일 새벽 2시에 이순신이 적탄에 맞아서 죽었으나

옆에 있던 맏아들과 조카인 이완 그리고 몸종인 김이 만이 알았을 뿐이며

그 밖에는 아무도 몰랐다.

이순신이 전사한 후에는 맏아들과 조카가 함대를 지휘하였으나

평소에 가깝게 지나던 군관 송희립 등도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라고 적고 있다.

이 기사의 내용이 사실이 아님은 명백하다.

작전 중에 함대사령관이 죽었는데 어떻게 아무도 몰랐다는 말인가?

또 사령관이 죽었다면 함대의 지휘는 당연히 송희립 등 측근 장교가 하였을 것임에도

어째서 민간인 애송이들이 함대를 지휘하였으며

또 어떻게 그것을 아무도 모를 수 있다는 것인가?

목격자나 다름없는 이분이 이러한 허위의 내용을 적은 것은 무엇인가?

비밀이 있어 그것을 감추기 위한 것임이 분명하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전투중인 군함에 타고 있었는가?

사전계획에 따라 전사현장을 감추고,

관속에 들어 있었을 가짜 시신을 지키기 위한 목적으로 미리 그 곳에 와 있었던 것은 아닌가?

또 가짜 시신을 지키려면 적어도 두 사람은 필요하며 몸종까지 거들어 주면 더 좋지 않겠는가?
또 전사하였다는 시간은 80%의 밝은 달이 머리 바로 위로 떠 있는 시간이므로

탈출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이다.

6)4일 후에 이순신 전사 소식이 선조에게 보고 되며,

또 다시 7일 후에는 우의정을 추징하고 장례는 국가의 비용으로 치르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장례는 전사 후 80일이 지나서 치러진다.

그런데 이 때는 이미 전쟁도 끝났으며

우의정 대접으로, 그리고 또 국비로 하였으므로 산소는 잘 마련하였을 것 임에도

15년 후에 600m 떨어진 곳으로 산소를 다시 이장한다.

여기서는 두 가지의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첫째로는 80일이나 장례가 늦어진 것은 이순신의 은둔생활이 정착되기를 기다렸기 때문이 아닌가?
다음으로는 15년 후에 산소를 이장한 것은 그 때에 이순신이 죽었으므로 그 때에 진짜의 산소를 쓴 것이 아닌가?

이순신의 그 때의 나이는 70세이다.


한편, 지난해 10월 11일 SBS TV에서 「이순신의 죽음의 미스테리」라는 프로를 방영하였는데,

그 프로에 나온 모 대학교 풍수지리학과 이모 교수에 따르면,

이순신의 첫 번째 산소자리도 대단히 좋은 명당자리라고 한다.

국가의 비용으로 하면서도 80일 동안이나 뜸을 드려서 정한 자리이니 그렇지 않겠는가?

만약에 그렇다면,

그 좋은 자리를 버리고 15년 후에 산소를 다른 곳으로 이장한 이유로서는 그 때에 진짜 장례를 치렀기 때문이라는 이유 이외에 또 다른 어떤 이유가 있을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이상에서 열거한 근거와 이유 때문에 이순신이 그 때에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6. 이제 박완씨 주장과 이종호씨 주장에 대해 검토해야 할 차례이다.

하지만 누구나 내가 열거한 상기 근거들을 먼저 읽어 본 다음에 그 분들의 주장을 읽어 본다면, 그 분들의 주장이 내가 제시한 근거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에서 나온 반론임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어떤 점이 그러한지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이종호씨는 앞에서 제4항으로 설명한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 “자진전사”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므로,

그래도 굳이 반대하여 “자진전사”를 주장하고 싶다면 그것이 어떻게 해서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 설명할 수 있어야 함에도 그러한 설명은 하지 못하고 있다.

이 점을 감안한다면 이종호씨의 주장은 결국 이순신 생존설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므로

나의 주장에 대한 반론이 아닌 것이다.

다음으로 박완씨의 주장을 보면,

상기 제5항에서 설명한 6가지의 근거를 거의 모두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내가 1)과 2)로 설명한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없으며,

3)과 4)로 제시한 유형의 글 문제에 대해서는 그것은 대수롭지 않은 기사이며,

그것은 증거가 아니라 다만 가벼운 심증을 주는 것뿐이라고 아예 무시하고 있으며,

5)로 제시한 이분의 글에 대해서는 만약 그것이 잘못된 내용이라면 다른 사료와 비교하여 바로 잡기만 하면 된다고 동문서답을 하고 있으며,

6)으로 제시한 장례의 지연과 산소 이장문제에 대하여서도 아예 모르겠다고 만 말하고 있다.

이 정도의 주장이라면 그것을 이순신 생존설에 대한 반론이라 부르기는 어렵다.

7. 이상으로 상기 두 분 주장에 대한 재반론을 끝내겠으며,

두 분에게는 내가 작년에 새로 펴낸 「이순신은 전사하지 않았다」(미다스북스 출판사)를 읽어 보기 권한다.

거기에는 은둔설에 대한 설명이 추가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이 이순신의 해전을 포함하여 이순신에 관한 으뜸가는 연구서라고 자부하고 있다.

박완씨에게는 그 중에서도 특히 “이순신을 죽이려는 정치공작: 신하를 죽이고 희열하는 선조대왕” 절을 꼭 읽어 보기 권한다.
당시의 사회를 이해하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이순신이 전사하지 않았다는 또 하나의 증거로서 내 책의 후기를 함께 실어 둔다.

8. 다음은 내 책의 후기이다.

나는 이 책에서 이 분이 이순신의 전사 현장에 대해 “송희립 등도 알지 못했다.”라고 적은 것에 대해 지나치게 조심한 것이라 생각하였다.
이순신이 죽지 않았음을 감추는 동시에 그 비밀계획에 송희립 등이 개입하지 않았음을 말하여

그들을 보호하려 한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그 전기에는 16년 후에 산소를 이장한 사실과 더불어

45년 후에 이순신이 “충무공”의 시호를 받은 사실도 적혀 있는 것이므로

그 전기를 발표할 무렵에는 이미 지나간 비밀에 대해 조바심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분의 전기가 이순신의 전사 이후 45년 이상이 경과된 시점에 발표된 것 과는 달리,

전사 직후에 조정에 보고 된 내용과도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는 유성룡의 기사에는 그런 말이 없다.
결국 이분은 이순신의 전사 직후에는 하지도 않았던 설명을,

그것도 허위 사실임을 쉽게 알아 볼 수 있는 내용의 설명을,

45년 후에 추가한 셈이다.
그러면 그는 왜 그렇게 적은 것일까?


이제 와서 생각하니 그것은 그러한 기사를 통해 이순신이 전사하지 않았음이 언젠가는 알려지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장례가 80일이나 지나서 치러진 일, 시신도 없었을 텐데 그 무덤이 16년 후에 이장되었다는 기사, 등도 그러하다.

무덤이 어디에 있다고 만 적으면 되는 일이 아닌가?

이순신의 가족들이 그가 살아남았음을 크게 기뻐하였을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들은 그가 지혜롭게 살아 남았음을 더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부득이 당시의 사회를 속일 수 밖에 없었지만

떳떳하였으므로 영원히 역사를 속일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아니 이것은 결국 살아 있던 이순신의 지시에 따른 것이며,

그가 그렇게 지시한 것은 모든 국민이 자신이 겪은 고통을 이해하고 함께 기뻐해 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는 진정 큰 영웅이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자신에게 영웅답지 않다고 말하지 않을까 하여 조바심이나 하는 소인배는 아니었던 것이다.
어디엔가 그의 영혼이 있다면 그는 자신의 생존 사실이 알려진데 대해 기뻐하고 있을 것이다.

9. 어쩌면 사람들은,

선조가 죽이는 것을 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순신이 차라리 장열하게 “자진전사”하였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죽음이야 말로 오히려 비겁하고 어리석은 죽음이라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순신은 거의 혼자만의 힘으로 임진왜란을 승전으로 이끌어 준 사람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가,

자신의 목숨을 버려야만 된다는 말인가?


만약에 어떤 장수가 미친개를 만났는데,

그것을 따돌려 볼 생각조차 못 해보고 비겁하고 어리석게 스스로 죽겠다고 결심을 하였다면,

그를 누가 명장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가져온 곳: [선비의 집]  글쓴이: 선 비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