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킨 스쿠버 다이빙의 역사 



 

1. 다이빙의 역사   

 

지구는 45억년전에 생성 되었고 바다가 생기는 데에는 그로부터 무려 수억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아직까지도 논란의 여지는 남아 있지만 긴 지구의 역사와 비교 한다면 불과 얼마 전인 약 600만년전 쯤에 직립 보행을 하는 인류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유인원들이 지구상에 출현하기 시작 하였다.

물론 지구 최초의 동물다운 바다동물은 인류의 조상보다는 10억년 전 쯤에 바다에 나타났다.
따라서 생명의 기원이 바다인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 이지만, 

지능을 가진 인류의 직계 조상들도 바다로부터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학설도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인간이 바다와 깊은 연관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인간과 비슷한 사고를 가진 인어부족이나 영화 어비스(Abyss)에 나오는 물인간 등을 주제로 한 공상적인 글이나 영화들이 만들어져 바다의 신비를 더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전설이나 소설과는 달리 실제로 과거에 존재하였던 사실은 현재에 기록으로 남아 있거나 과거를 과학적으로 입증할 만한 증거가 있을 때에만 역사가 되어 전해질 수 있다.

 

현생 인류와 가장 많이 닮은 직계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원시인들은 지금으로부터 약 10만년 전에 지구상에 살았던 호모(Homo 라고 일컫는 속에는 서로 다른 원시인류의 무리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한 무리가 오늘날 인류로 진화 하였다. 인간의 학명은 Homo sapiens 임)인인데,

이들을 인류라 한다면 아마 물가에 살았던 최초의 무리에서 최초의 다이버가 나왔을 것으로 짐작된다.

 

입증을 할 수는 없지만 먹이가 됨직한 물고기나 조개를 잡기 위해서 또는 적에게 쫓겨 우연히 물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을 계기로 해서 다이빙에 익숙해지고, 점차 그 기술을 발전시켜 후손들에게도 전수하였을 것이다.

 

어쨋든 그 시절의 다이빙은 생존의 한 방편이었지, 레져나 연구의 목적은 아니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물가에 살았던 무리들의 아이들에겐 다이빙이 좋은 놀이 중 하나였을 지도 모른다. 

미국지리학회(National Geographic)의 "자연과 사람들"이라는 TV 시리즈물 중에 "알 기딩스의 상어 이야기"에 나오는 요즘의 타이티 어린이들 처럼 거북이나 상어의 등을 타고 잠수 놀이를 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직업적인 다이빙은 5,000년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그 당시의 잠수는 매우 얕은 물에서 이루어졌는데, 사람들은 숨을 참고 가능한 많은 시간을 얻고자 함이었다. 

가장 원시적인 이러한 방법으로 그들은 해산물 채취나 간단한 수중 작업 등을 하였다.

 

언제부터 사람들이 수영을 했는지 기록되어 있진 않지만, 기원전 6세기경부터 원시 예술 작품(벽화)에 초기 물에서 활동을 한 그림이 전해진다. 

카이로에 있는 역사 박물관에서 기원전 1,500년경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3,500년전에 이미 진주조개잡이 다이버들이 홍해에서 활약하였다는 옛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도 최초의 다이빙 기록과는 많은 시차가 있는데, 

기원전 3,000년전에 이미 그리스의 크레타(Crete)에는 스폰지(Sponge:바다 속에 사는 해면동물을 일컬으며 지중해 연안에서는 오랜 옛날부터 마모용 또는 수분 흡수용으로 사용하였음. 

합성 스폰지도 이 동물의 이름에서 유래하였음)채취 다이버가 있었다고 한다.

이들이 기록으로 남은 역사상 세계 최초의 산업 다이버(Commercial Diver)이리라.

 


초기 다이버들은 군사 활동을 목적으로 하였다. 

즉 닷줄을 끊는 것이나, 선체에 구멍을 뚫는다 든지, 항구 보호 시설 건설 등의 활동이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지금의 레바논인 페니키아의 도시(튀르스)를 정복하려 했을 때 적지의 수중 장애물을 다이버를 보내 제거하였다. 

역사적 기록에는 기원전 333년에 유리로 된 다이빙 벨(Diving Bell)을 타고 알렉산더 대왕 자신이 직접 수중으로 들어가 자신의 다이버들이 일하는 것을 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 고대 앗시리아인들(Assirians)은 다이빙을 할 때 짐승의 내장으로 만든 공기주머니를 사용하였는데 이것이 최초의 인공호흡기의 형태가 아닌가 한다.



 


 

2.수중호흡장치의 개발

 

1531년경에 최초의 실용면을 고려하여 개발되어진 형태가 종의 모양처럼 생긴 잠수종 이었다.

이 모양의 잠수기는 단순히 종을 물 속에 담그면서 남아있는 종 속의 공기를 사용하는 잠수 형태로 발전을 거듭하여 16,17,18세기 동안 종 모양의 잠수기는 계속 발달되었고, 상업적으로도 널리 사용되었다.

 

이런 형태의 종 모양 잠수기는 어느 정도의 시간 즉 몇 분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 다이버를 수중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었다. 

초기 종모양 잠수기는 일정시간 동안 다이버가 숨을 쉴 수 있도록 공기를 잡아두기 위해 물통을 수직으로 가라 앉히기 위해 자체적으로 중량을 가진 물체로 만들어져야만 했다. 

이 원리는 물이 가득한 통에 컵을 거꾸로 가라앉혀서 컵속의 공기를 사용하는 잠수 방법이라면 이해를 쉽게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컵 안의 공기는 주위의 물의 압력을 받고 갇혀 있으나 또한 주위를 둘러싼 물의 압력을 받는 것이다. 

배나 움직이지 않는 수면 구조물에서 케이블로 매달려지는 종모양 잠수기는 지상에서 단순히 종을 들어주는, 거의 움직임이 없는 고정된 장치로서 그 속의 잠수부는 움직임이 한정된다.

그리고 자신을 지탱해 줄 수 있는 장치를 가진 도구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종처럼 생긴 잠수기 안에 매달려 있으면서 잠수기 속에서 머무르고 작업을 했다. 

또는 숨을 참고 짧은 거리를 움직일 수 있는 정도였다.

 

1680년대 William Pphipps가 카리브해에서 전설로 전해진 보물을 찾기 위해 고용된 자신의 일꾼들에게 공기를 공급 할 목적으로 좀 더 무게가 있는 통을 만들어 냄으로써 잠수기를 개선시켰다.

 

1690년대에 에드먼드 할레이(Edmund Halley:유명한 천문학자)는 지상으로부터 공기를 공급해 줄 수 있도록 고안된 공기를 담은 무거운 큰 통들을 연결하여 공기를 공급할 수 있는 종모양 잠수기를 개발하였다.

 

그가 디자인한 잠수기에 Halley와 4명의 동료가 템즈강 20(60피트)미터 밑 수중 바닥에서 1시간 30분 가까이 머물러 있을 수 있었고,

 26년 후에 그의 종모양 잠수기를 개선하여 23미터(66피트) 깊이에서 4시간 이상 머물렀다.

1715년에 존 레드브릿지(John Lethbridge:다른 영국인)는 완벽하게 밀봉된 개인용 다이빙 캡슐을 개발하였다. 

물의 압력을 이겨낼 수 있는 보강된 통에 가죽으로 감싸서 만들어졌는데, 

방수 소매로 팔을 감쌌고 유리로 된 창을 가졌었다.

 


 

그 시대의 대중 잡지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기구들을 사용하여(입었다기 보다는 그안에서) 12 fathoms가 한계인데, 

보통 10 fathoms (60feet)에서 작업하면 작업시간은 적어도 30분 정도라고 묘사했다.

Lethbridg의 디자인에 의거한 몇 개의 유사한 고안품들은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신선한 공기 공급과 기동성 부족이라는 근본적 문제점을 감수 해야했다.

 


근대적인 잠수장비의 등장은 18세기가 시작될 시기에 그 동안 사용되던 방식이 아닌 새로운 발명품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다이빙을 하도록 바꿔 버렸다.

즉 기술의 발달로 새로운 장비들이 잠수 활동에도 사용되어졌는데, 

그 중에서도 압축기의 개발은 새로운 장을 열게 하였다.

 

즉 수동작업에 의한 공기 펌프는 압축된 공기를 다이버에게 공급해 주는 것을 가능하게 했는데 (비록 초기에는 압력 한계가 있었지만) 이로 인해 최초로 실용적인 다이빙용 잠수복이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진보와 개발을 통해서 인양작업 등 수중작업이 쉬워지고 활발해 지기 시작했다. 

대영 제국 연안에는 그 동안 상업활동과 전쟁을 통해서 난파된 많은 선박들이 좌초되어 있었는데, 

모험심 강한 많은 다이버들이 새로 개발된 이러한 장비들을 사용하여 인양하고 이익을 서로 나눔으로써 많은 다이버들이 부자가 되었다.

 

오거스트 시에드(August Siede)는 초기에 실용적인 잠수복을 개발하여 잠수계에 유명해지기 시작했는데 Siede와 몇 사람들이 힘을 합쳐 1800년대 초기에 성공적인 다이빙 장비를 제작하게 되었다.

 

딘 형제(존과 찰스:John & Charles)는 화재로 인하여 연기가 가득한 화재 현장에 들어가 구조할 목적으로 장비를 개발하여 특허를 받았다.

 

이 후에 이 형제는 물 속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장비를 개조하여 이를 Deanes’Patent Diving Dress로 이름이 붙여지고 시중에 알려지게 되었다.

 

Deane형제의 다이빙복은 다이버의 보호를 위한 무거운 천과 밖을 볼 수 있는 몇 개의 창을 가진 헬멧 그리고 압축된 공기를 전해주기 위해 연결된 호스로 구성되었다. 

헬멧은 다이버의 어깨에 장착되어 자체 무게와 허리띠로 쓰이는 가죽으로 고정되었다.

이런 배열의 장비는 자체에 중대한 결점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다이버가 실수로 몸을 기울이게 되면 헬멧에 물이 차고 공기가 빠져 나간다.
이러한 다이버의 실수를 예방하고 대처하기 위해 Deane형제는 장비의 사용법을 정리하여 그들의 다이빙복에 대한 교육책자를 만들었고 이 교재가 다이빙계에 화제가 되었다. 

이로 인해 그 책은 활자화 된 최초의 다이빙 입문서가 되어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August Siebe의 개조품은 색상을 가진 허리까지 내려오도록 만들어진 방수가 되는 천으로 헬멧을 봉인했다. 

Siebe는 잠수복을 개선한 사람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헬멧 조립을 연구한 가치가 인정되고 초기의 표준이 되는 깊은 수심용 다이빙복의 원조처럼 인식되어졌다.


 

2명의 프랑스인 로그아롤(Messrs Rouquayrol)과 드네이로스(Denayrouse)는 지상으로부터 공기 공급을 받는 형태의 잠수 장비인 공기 공급 호스를 가진 헬멧형 다이빙복을 고안했는데, 

이 장비의 특징은 비상시에 사용자에게 공기를 공급할 수 있도록 등쪽에 장착된 자체적인 공기 저장 장치를 가지고 있었다.

 

Rouquayrol / Denayrouse 의 개발 장비는 다른 여타의 고안된 잠수 장비와 다른 자동 요구식 밸브를 사용함으로 해서 구분될 수 있다.

1878년에 헨리 프뢰스(Henly Fleuss)가 약 450psig 압력을 가진 통에 압축된 산소와 이산화탄소가 주기적으로 섞이도록 하는 공기 저장통을 사용한 미개방 형태의 장비를 발명하였다.

 

Fleuss의 장비는 영국의 다이버 알렉산더 램버트(Alexander Lambert)가 7번 가 밑의 터널에서 부서져 열린 철문을 닫기 위하여 터널을 걸어 다닐 수 있도록 고안되어 1880년경에 성공적으로 이용되었다.

 




 

3.스쿠버(수중 자가 호흡 장치)의 개발



1926년에 함장 쁘리에(Prieur)는 마우스피스와 공기 호스를 장착한 등에 매는 압축공기통을 구상하고 설계하여 특허를 얻었다. 

Le Prieur 장비의 공기통은 2000psig의 압력 공기를 가졌다. 

그러나 자동 요크식 밸브가 장착되어 있지 않아서 많은 공기가 물 속에서 낭비되었다.

 


1943년 에밀 까냥(Emile Gagnan)과 선장 쟈끄-이브 쿠스토(Jacques-Yves Cousteau)가 자신들이 개발한 장비를 아쿠아-렁(Aqua-Lung)이라고 불렀다. 

이 잠수 장비는 압축된 가스 통에 2500psig이상의 압력을 저장하는 압축공기탱크가 2∼3개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 장비의 특징은 흡입식 요구 밸브인 레귤레이터을 사용함으로 해서 그동안 문제점으로 지적된 공기의 사용을 조절할 수 있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Gagnan과 Captain Jacques-Yves Cousteau 장비들은 최초의 실용적인, 즉 지상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을 주는 스쿠바 장비가 되었다. 

스쿠바 역사에는 많은 프랑스인들이 공헌하였는데 위에서 언급한 잠수장비의 발전뿐만 아니라 수영 핀의 발전에도 큰 역할을 하였는데, 

1930년대에 부함장 카를리에(Carlieu)가 Le prieur의 Scuba 장비를 착용하고 물 속에서 수평으로 이동 할 수 있도록 핀을 만들어 냈다.

 


다이빙의 역사는 발명, 발전 그리고 진취적인 사상이 담긴 여정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수중장비의 발전과 탄생은 전쟁과 많은 연관이 있어 왔다는 사실이며,

전쟁을 통해서 짧은 다이빙 역사에 장비의 진보와 이론적 체계를 만들어 왔다는 것이다.

 

앞서 열거한 바와 같이 다이빙의 역사에서도 분야별로 최초의 기록들이 다양하며,

각각은 한편의 드라마와 진배없는 것으로 생존과 모험을 위해 험난한 바다에 도전하여 위험을 극복하면서 작성된 것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다이빙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킨 것은 서양, 특히 유럽이었기 때문에 과거의 다이빙 역사는 자연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유럽의 역사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5.우리나라의 스쿠버다이빙역사


세계 다이빙의 역사를 나열하다 보면 자연 "우리나라 최초의 다이버는 누구일까?" 하는 의문을 떠올리게 되고 더 나아가 우리나라 다이빙의 역사를 더듬게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되었던 석기시대 또는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판정된 바닷가 옛 살림터 주변에는 조개무덤(貝塚)이라는 것이 남아 있어,고대 한국인의 식생활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이곳에서 나온 바다생물의 대부분은 얕은 곳에서 쉽게 채집되는 종류들이긴 하나 다이빙을 하여 채취하였으리라 믿어지는 것들도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기록에 남아 있지는 않지만 우리의 조상도 기원전 3,000년경에 이미 다이빙을 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최초의 다이버는 여자일 가능성이 높다.
"해녀 연구(강대원(1973).한진 문화사.서울)"에 따르면 4세기경에 해녀(해녀는 일본식 용어임. 일본에서는 해녀를 해인(海人), 잠녀(潛女)라고도 하였으나, 우리나라 에서는 잠수(潛嫂)라고 하였음)가 있었다는 고고학적 자료를 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우리나라 해녀가 일본 해녀보다 체질적으로 물에 대한 적응 능력이 월등하고, 

1970년대 당시 한국과 일본 해녀가 모두 3만명인데, 제주도에만 11,000명이 거주하였던 점이나 해녀가 활동하던 지리적인 여건으로 보아 제주도가 해녀의 발상지일 것으로 추정 하였다.


따라서 세계 최초의 여성 다이버는 제주도 출신의 해녀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조선시대에만 하여도 제주도 외에 육지의 남해안에도 많은 해녀들이 활약하였으며, 

당시에도 나잠(裸潛)을 하였던 것 같다.


그러한 근거로써 다산 정약용(定若鏞)이 경상남도 장기현에 유배되었을 당시에 지은 "잠수하는 아가사(兒哥詞)"라는 시가가 있는데 잠수하다 죽은 며느리를 기리는 어느 시아버지의 심정을 적은 것으로 잠수하는 상황을 비교적 잘 묘사하고 있다.



우리나라 다이빙 역사 또한 해군의 유능했던 다이버들에 의해 민간인들에게 전파되었으며,

대학의 모험심 많은 젊은이들에 의해 도입되었고 보급되었다.

 

1963년 3월 대학의 모험심 많은 개척자들에 의해 남대문 근처의 골방에서 "한국스킨스쿠바클럽" 이 창설되었다. 

(김상겸, 이병두) 고려대학교(이병두, 황치효), 연세대 (윤석민, 오윤배), 한양대(노건기, 김광휘), 동국대(차 광), 중앙대에서 스킨스쿠바 다이빙 써클이 생겼다.(1968∼1969)


이 시기의 서울의 다이버라야 100∼200명이었으며, 활동적인 다이버는 고작 30명 내외였고, 

잠수 이론서는 없었으며 장비 또한 형편없었다. 

그러나 다이버들 간에는 매우 우호적이고 낭만적이었다고 원로들은 얘기하고 있다. 

이때 서울에는 (주)엑심 (김광휘) 이라는 장비수입을 겸한 건축자재 수입 가게가 한남동에 있었고, 

우정사(임성기)와 반도스포츠(유영제)가 서울 남대문 시장 앞에 있었다.(한국 최초의 장비점들)

 

1971년 제주도 수중비경을 맛보고, 

1972년 일본인 다이빙 강사와 다이빙을 해 본 김광휘는 1973년 스쿠바 다이빙을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1973년 한국에서도 외국단체로는 처음으로 PADI(코스디렉터: 윌리암스)가 들어와 강사들을 배출하였다.


일본에서 귀국한 김광휘는 1975년 한국에서는 최초로 서귀포 파크관광호텔에 코리아다이빙센터 라는 RESORT SHOP을 창업했다.(김광휘, 이철우, 황치전) 

서로가 합심하지 아니하면 물속을 구경할 수 없었던 그 시절 서울에서는 모든 다이버들이 우정사를 중심으로 장비도 구입하고 정보도 교환을 했다.


안정훈, 정일만, 현용부는 임성기(우정사 대표)를 시켜 홍보하면서 한국 최초의 순수 스쿠바 다이빙 클럽인 "한국잠수동호회"가 1976년 설립되었고(현용부, 정일만, 안정훈, 김인배, 고창근, 임성기, 양태빈, 박순원, 홍근원, 오성원, 김인영, 오윤배, 정연평, 이건, 한형도, 장석은, 김과윤, 오경민, 장준량, 이병수, 김희일) 현재까지 일부 회원이 남아 있다.


이때 경북에도 경북잠수동호회(대구잠수동호회)가 생겼으며, 

자매결연을 맺어 서로 참목을 도모하고, 

경북의 스포츠 스쿠바 다이빙 보급에 일익을 담당했다.(정호응, 변춘부, 김호상, 임성지, 박병훈, 배칠근, 이태균, 시흥기, 이석근)


1977년 김광휘와 조길도, 김현웅이 배출시킨 김영수외 그 문화생들로 우리나라 2번째 순수취미 스쿠바 다이빙 클럽인 "판코리아다이빙클럽"이 결성되었고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한편으로, 연세대 스킨스쿠바 써클 창설의 주축중 한 사람이었던 윤석민을 중심으로 오윤배, 안정훈, 이요섭은 미도파백화점 부근에 스쿠바 다이빙 샵인 "바다상사"를 창업했으며, 

윤석민과 이요섭은 전길남 NAUI 강사(재미 공학박사)로부터 강사자격을 취득했다.(1978년) 

이들이 현재"NAUI KOREA"의 주축 멤버들이다.

 

잠수동호회 멤버였던 김인영은(SCUBA DIVER지 발행인) 1979년 잠수이론이 체계화되지 못한 이땅에 "스킨,스쿠바 다이빙 원리"라는 잠수 이론서를 최초로 집필하여 발행하므로써 잠수계에 기원이 되는 한획을 그었다.(80년대 잠수이론 교육시 단체와 상관없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책 임)


1979년 김봉제, 조현종, 차광, 김창환을 중심으로 창설된 "KUDA(한국잠수협회)"가 유일하게 문교부에 사단법인으로 등록되었다. 

한때 무분별한 강사 자격증의 남발로 잠수계에 비난을 받았던 KUDA는 지봉규(PADI강사, 조오련 수영코치, IDEA KOREA 초대대표)원로가 KUDA 기술위원장이 되어 1989년 DITC(Diving Instructos Training College) 제도를 만들어 92년까지 이론과 기술을 겸비한 강사들을 배출하므로써 KUDA 인물 역사상 한 획을 그은 사람이다.

1950년 6.25사변과 함께 우리나라 해군에 스쿠바 다이빙 보급되어 군복무 중 다이빙을 배워 전역후에도 계속하였거나, 그들로부터 배운 젊은이들, 그 모험심 많은 젊은이들이 써클과 클럽을 만들었던 1960년대 까지를 스쿠바 다이빙의 도입기로 본다면, 1970년대는 초창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때 뿌리를 내린 단체를 중심으로 1980년대에는 스쿠바 다이빙이 광범위하게 보급되었다.


1981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강사(기형희)가 탄생되었고 

1983년에는 윤희성, 김재영, 김용중, 박종섭,하승수 를 중심으로 10여개 대학을 묶은 "전국대학잠수연합회"가 결성 되었으며, 

1990년까지 한강수중탐사, 휴전선에서 여의도까지 수중탐사, 일본원정 등 많은 일화를 남겼다.


"전.대 잠수연합"을 창설했던 이들은 1989년 일본으로 건너가서 BSAC 강사가 되었으며 

BSAC를 국내에 도입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1994년 7월 BSAC는 "BSAC KOREA"(대표 박종섭)로 독립하게 된다.

1987년 이전까지는 잠수하면 수중사냥과 채집이 거의 전부였다. 

1980년 초까지는 어촌의 인심도 좋았으나 무분별한 남획으로 잠수할 수 있는 POINT가 없어지던 이시기에 초창기 잠수를 도입했던 우리나라 잠수계 엘리트들을 중심으로 1987년 "한국수중사진연구회(한국수중사진영상협회)"가 창설되었다.


이와 때를 같이해서 스킨스쿠바다이빙원리라는 잠수이론서를 집필했던 김인영은 1987년 9월에 수중전문지 "SCUBA DIVER"를 격월간으로 발행하게된다. 

잠수관련 소식이 전무했던 그 시절 잠수이론, 수중사진, 외국소식등을 전달하여 우리나라 수중인들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렸으며 지금까지 많은 잠수인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1990년 이전에는 잠수하면 일부 특수계층에만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으나, 

90년 이후 국가의 발전과 각종 메스컴들의 영향으로 회사원, 자영업을 하는 일반인들에게까지 급속도로 보급되었다.

 

1992년 6월26일 드디어 한국에도 수중계의 두뇌 집단이 생겨났다.

잠수와 관련된 의학자, 생물학자, 공학자, 학술계, 수중영상전문가, 잠수관련 특수부대 책임자들이 모여 "한국수중과학회(KOSUST)"를 창립했다.(고철환 서울대교수, 제종길 해양연구소 연구원, 윤석근, 이병두, 정의욱, 김광택등 33명)


1992년 7월 썬스포츠 김광휘는 SCUBAPRO에서 보급하는 "SEA(SCUBAPRO EDUCATIONAL ASSOCIATION)"을 도입했으며, 1983년 전국대학잠수연합을 주도했던 김재영은 1994년 일본에서 SSI를 도입하였다.

 

또한 한국잠수협회(KUDA) 위상을 한단계 높였던 지봉규는 1997년 미국 잠수교육 협회인 " IDEA(International Diving Educators Association) "을 김석철(현 IDEA-ASIA대표)로 하여금 국내에 도입케 하였다. 

그후 PDIC, NASE등 외국의 다이빙 단체들이 국내에 도입 되었으며, 앞으로로 계속 도입될 전망이다.

잠수장비가 부족했고 검정 슈트가 유행했던 50,60,70년대를 거쳐 잠수가 본격 도입되었고, 

장비들이 좋아졌던 80,90년대 초반에 이어 우리는 이제 컴퓨터게이지 시대를 지나서 NITROX, 재호흡기 시대를 살고 있다.

 

1970년대 말에 수 백명도 안 되던 스포츠다이빙인구는 1980년대 말에 6-7천명 정도로 늘어났으며,

1990년대에 들어 와서는 과거 20년 동안 생겼던 다이버가 한 해에 생기기 시작했으며, 

IMF직전에는 한 해에 1만명 정도씩 탄생하고 있었다.



'이론 잠망경 > ┏ 잠수 이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잠수의 역사  (0) 2016.10.26
동굴 다이빙의 모든 것  (0) 2016.06.09
할데인 (John Scott Haldane)  (0) 2015.03.17
다이빙 테이블 필요성   (0) 2015.02.06
중성부력  (0) 2014.07.1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