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수의 역사는 군사적인 목적, 해초 채취를 통한 생계유지의 수단 뿐 만 아니라 심해에 대한 지식을 확대하려는 인간의 강한 욕구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겠다.

인간의 잠수 역사는 확실치 않으나, 잠수가 작업화 된 것은 약 5,000년 전부터라고 하겠다.

초기의 잠수는 비교적 얕은 수심에서 이루어졌으며, 잠수사들은 주로 사업적 가치가 있는 해조류, 산호 및 진주조개 등의 채취작업에 종사했다.

잠수에 대한 최초의 역사적 기록은 그리이스의 역사학자 헤로도 투스에 의해 기술되었다.

그는 그의 저서에서 B.C.5세기경 페르샤의 왕 Xerxes 에 의해 침몰된 배에서 보물을 찾도록 고용 되었던 Scyllis라는 잠수사에 대해 기술하였다.

초기부터 잠수사들은 군사적인 분야에서도 맹활약을 하였다.

그들의 임무는 주로 적선의 닻줄을 끊어서 표류하게 하거나 선창에 구멍을 뚫어 침몰 시키거나 항구에 장애물을 설치하는 일이었다.

전사를 돌이켜 볼 때 알렉산더대왕은 잠수사들로 하여금 지금의 레바논인 Tyre 라는 항구의 장애물을 제거하도록 명령했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직접 잠수하여 일의 진척을 감독하였다.

 

그 외 일단의 잠수사들은 지중해 동부의 큰 항구를 중심으로 인양작업에 종사하였다.

B.C. 1세기까지 잠수작업은 매우 조직적이었으며, 인양작업에 대한 보수도 작업심도가 깊을수록 위험도가 높다는 사실에 입각한 법률에 의해 정해졌다.

예를들면, 24피트의 수심에서 인양작업을 할 경우에는 잠수사들은 발견한 물건의 1/2을 차지했으며, 12피트의 경우에는 1/3을 차지했고, 3피트에서는 다만 1/10을 차지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런 원시적인 잠수 형태는 세계 도처에 남아 있다.

스킨다이버 (잠수장비가 전혀 없이 하는 잠수) 들은 어릴 때부터 훈련함으로써 보통사람보다 뛰어난 폐기능 및 스테미너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돌과 같은 무거운 것을 들고 빨리 바닥에 내려가도록 하거나 또는 허리에 로프를 매어서 협력자로 하여금 그들을 끌어당길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런 형태의 잠수로는 1 -2분을 넘길 수 없었다.

이 시간은 보통사람이 지상에서 숨을 참을 수 있는 시간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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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은 수중의 잠수사에게 공기를 공급해 줌으로서 보다 오랫동안 수중에서 머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런 대부분의 설계는 잠수사가 직접 갖고 다니는 호흡낭에 대한 생각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이런 생각은 굉장히 오래 했던 것 같으며, B.C. 세기경에 앗시리아의 조각에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 조각에 나타난 그림에서 볼 때 그들은 오히려 부대로서 가죽주머니를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런 기구를 갖고는 실제로 잠수가 불가능하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잠수작업의 형태가 나타난 것은 중세기 말엽이며, 1240년으로 베이컨은 잠수장비란 인간이 바다나 강 밑에서 안전하게 작업할 수 있는 장비라고 말했던 것이다.

16, 17세기의 다른 저자들은 훗일 성공적인 발전의 전조가 된 장비들의 그림을 출판했다.

그러나 이러한 설계가 실제로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으며, 그들도 핵잠수함을 발명한 쥴 베르네와 비숫하게 부당한 비평을 받았을 것이다.

즉, 베르네는 구상은 했지만 필요한 기술적 뒷받침이 없었던 것이다.


 


1,500 -1,800년 사이에 잠수장비도 발전을 거듭함으로써 잠수사들이 수중에서 수시간 동안 머물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것은 잠수종 (Diving Bell )의 발명이다.

이에 대한 설명을 하자면, 종모양으로 아래가 개방된 크고 튼튼한 통으로 잠수사들이 수시간 동안 충분히 호흡할 수 있게 충분히 공기를 싣고 수직으로 하강할 수 있는 장비이다.

쉽게 이야기해서 컵을 거꾸로 하여 접시에 담겨 있는 물 속에 집어넣는 것과 같다.

컵 속의 공기는 수중압력에 의해서 별로 압축되지는 않는다.

이 잠수기구는 쇠사슬에 매달려 있으며 수표면에 있는 배의 움직임에 따른 조작 외에는 별다른 조작을 할 수는 없다.

잠수사들은 그가 작업하려는 바로 위에 이 잠수기구(잠수종과 유사한)가 위치한 경우에는 그대로 기구 속에서 작업할 수도 있으며 또는 위험을 무릅쓰고 잠시동안 기구 밖에 나가서 작업할 수도 있다.


 


최초로 이 기구가 만들어진 것은 1531년이며, 그 후 수백년 동안 불안정하기는 하나 효과적인 잠수기구로 계속 사용되었다.

1680년 매사츄세츠주에서 태어난 윌리엄 필립이 이 기구를 변형시켜 무겁고 뒤집어진 통을 통해 잠수사에게 공기를 공급함으로써 20만 파운드의 보물을 찾는데 이용했다.

1690년 영국의 천문학자 에드먼드 헬리(헬리혜성의 발견자)는 공기가 든 무거운 통을 통해서 잠수기구 속의 공기를 보충시킬 수 있는 기구를 발명했다.

그는 이를 실험하기 위해 자신과 다른 4명의 잠수사들과 함께 템즈강 수중 60피트에서 1시간 30분 동안 머물렀다.

그 후 약 26년후 헬리(당시 65세)는 이 잠수기구를 개량하여 66피트에서 4시간 동안 체류했던 것이다.

 
 

1715년 다른 영국인인 존 레스브리쥐는 한사람이 완전히 들어갈 수 있는 잠수복을 발명했다.

이 장비의 본질적 요소는 튼튼한 가죽으로 싸여진 공기주머니이며, 볼 수 있는 유리창과 물이 들어오지 않게 되어 있는 겨드랑이의 소매를 갖고 있으므로 충분히 작업을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이 기구도 역시 배로부터 줄을 내려 잠수종과 같이 조작하는 것이다.

 레스브리쥐의 발명은 확실히 성공적이었으며, 유럽의 여러 바다에서 수 많은 난파선들을 인양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그는 1749년 한 유명한 잡지에 기고하면서, 평균 작업심도는 60피트이며 최대수심은 72피트,수중체류시간은 34분 정도라고 했다.

구 후 레스브리쥐의 기구와 유사한 장비들이 고안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장비들은 잠수종과 비슷한 기본적인 한계점에 도달했던 것이다.

즉, 잠수사들이 자유롭게 일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공기를 공급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의 발견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기술적인 문제가 해결된 것은 공기를 압축해서 잠수사에게 공급할 수 있는 압축기가 발명되면서 부터 시작되었고, 그것은 19세기에 들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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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난구조 및 인양작업을 위한 잠수기술은 18세기 중엽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부터 발달되기 시작했다.

잠수종, 레스브리쥐의 잠수복을 이용한 잠수 혹은 간단한 스킨다이빙 등을 통해 잡수사들은 침몰선의 닷,금화 혹은 은괴에 이르기 까지 모든 물건의 인양에 큰 활약을 했다.

한편 일반 사람들도 드물기는 하지만 해저의 보물 인양에 흥미를 느꼇다.

예를들면 한 침몰된 전함에서 인양된 100대의 대포는 오늘날 시가로 5백만달러에 달한다.

그리고 매년 1천척 이상의 배들이 영국 근해에서 침몰되었으며, 이러한 사건들이 보다 효과적인 구조 및 인양작업을 할 수 있는 훌륭한 잠수복의 발명에 자극이 되었던 것이다.


 


최초의 실질적인 잠수복의 발전을 가져 온 사람은 아우구스투스 시이베라고 할 수 있다.

실질적으로는 그는 그 당시의 성공적인 잠수장비를 만든 여러 사람 중의 한사람이다.

인양작업에 열심이었던 죤과 찰스 딘 형제는 1823년 방연복(Smoke Dress)에 대한 특허권을 얻었다.

1828년에는 잠수복에 대한 특허권을 얻는데, 이 잠수복은 추위를 막을 수 있게 무겁고 밖을 볼 수 있는 창이 달린 헬멧과 수표면으로부터 공기를 공급받을 수 있는 호스가 부착되어 있었다.

 

헬멧은 잠수복에 고정되어 있지는 않았으며, 다만 잠수사의 어깨 위에 올려 놓음으로서 그 자체의 무게와 끈을 요대에 묶어서 고정시켰다.

소모된 공기는 헬멧의 테두리를 통해 배출되었기 때문에 일어서 있는 경우에는 별 문제가 없으나, 잠수사가 실족하거나 넘어지면 헬멧은 곧 물이 차게 된다.


아우구스 시이베의 최초의 작업은 딘 형제의 잠수복에 대한 수정작업이었다.

그는 허리까지 닿은 짧은 옷을 이용하여 목, 둘레에 헬멧을 고정시켜서 배출공기는 가장자리를 통해 나갈 수 있도록 했다.

딘형제는 인양작업을 하는데 매우 조직화되어 있었고, 1836년에는 최초의 잠수교범(Diving Manual)을 발간했다.

1840년 시이베는 완전방수의 잠수복을 만들고 배출관을 더 부착했다.

시이베의 발전된 잠수복이 오늘날 널리 사용되고 있는 심해잠수복의 원조인 것이다.

 

1840년에 이르러서 여러 종류의 잠수복이 나타났으며, 실제적으로도 잠수작업에 이용되기 시작했다.

그 당시의 대영제국의 공병은 포츠마스항 밖의 함대의 투묘지를 막고 있는 로얄 죠지호라는 침몰된 전함의 인양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 작업의 책임자였던 윌리엄 파리스 대령은 이 작업이 여러 종류의 잠수장구를 공식적으로 시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는 시험 결과 베셀이 만든 잠수장구는 헬멧을 잠수복에 고정시키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복잡하다는 점에서 제외시켰다.       
한편 딘 형제의 장비도 안전성에 대한 세심한 주의를 한 결과 제외 시켰으며, 시이베의 잠수복을 잠수작업의 공인잠수복으로 채택했다.

 파리스대령이 이 계획을 완성시킨 후 정부의 역사가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노련한 잠수사 중에서 관절통이나 감기가 자주 재발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잠수사들은 주로 60 - 70피트의 수심에서 하루에 6 - 7시간씩 작업을 한다."

파리스 대령과 그의 팀은 이러한 관찰이 내포하는 암시를 인식하지 못했다.

여기에서 관절통이라고 나타난 증상은 사실은 훨씬 심각한 생리학적인 문제의 반영이었으며, 수 년 후에는 이 증상은 잠수작업에 있어서의 중대한 위험이라는 것이 입증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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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의 발명가들은 실제적인 잠수복이 완성된 것과 동시에 잠수종의 개량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잠수종을 보다 크게하고 종 속의 물을 배출해 낼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용량을 갖춘 공기펌프를 설치하도록 했다.

이 개량된 펌프에 의해서 해저에서 수중에 노출되지 않은체 작업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큰 챔버의 건설을 가져오게 됐다.

이런 챔버는 오랜 작업기간이 필요한 교각건설이나 터널 굴착공사에서 훌륭한 효과를 나타냈다.

이 건식챔버는 불어로 큰 상자라는 뜻인 케이슨이라고 알려지기 시작했다.


케이슨은 표면으로부터 바닥까지 곧 바로 도달 할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다.

공기통을 사용함으로서 내부의 압력은 잠수사나 쓰레기들이 흘러나가는 경우에도 계속 유지될 수 있었다.

케이슨의 발전은 기술 공학의 발전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케이슨의 사용이 확대됨과 동시에 여태껏 알려지지 않았고 설명할 수도 없는 병들이 잠수사들 사이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즉, 그들이 수표면에 돌아 온 후 갑작스럽게 어지럽거나 호흡이 곤란하다거나 또는 관절이나 복부에 심한 통증을 나타내는 등의 증세가 나타났던 것이다.

환자를 안정시키면 대개 회복되기는 했지만, 이런 증상이 완전히 소멸된 것은 아니었다.

잠수사들(특히 Caission Worker)은 작업 중에는 피로를 느끼지 않았지만, 작업이 끝난 후에는 극심한 피로에 시달렸다.

잠수작업이 점점 확대되면서 잠수사들에게 가해지는 수중 압력도 증가되면서 생리학적인 문제도 자주 발생하고 보다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놀랄 만큼 사망하는 경우도 자주 일어났다.

드디어 이 질병은 잠수병 (케이슨 병, 케숑) 이라고 불리기에 이르렀다.

뉴욕의 부록크린 교각공사시 잠수사들에게 일어난 질병을 보다 설명 적인 말인 벤즈( Bends )라고 부른 후 쭉 그렇게 불러오고 있다.

 

이 말은 환자가 고통 때문에 뒤틀린 자세와 비슷했으며, 그리시안벤드(Grecian Bend)라고 불리우던 당시의 매력적인 여성들 간에 유행되었던 윗몸을 조금 앞으로 구부린 걸음걸이와 비슷했으므로 벤즈라고 불리워졌던 것이다.

오늘날 잠수병 (Bends)은 잠수사고 중 가장 잘 알려졌으며, 소설,잡지, 텔레비젼 등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말 놀랍게도 인간이 잠수를 시작한지 수백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잠수병이 알려진 것은 150년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잠함 (케이슨)이 발명되기 전까지는 수중고압환경에서 오랫동안 체류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들 중의 한사람인 파리스도 잠수병을 말할 때는 그것이 소화불량, 관절통 혹은 관절염 이상의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으며, 그 이상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잠수병의 원인이 최초로 임상적으로 기술된 것은 1878년 프랑스에서 생리학자인 폴 버트 (Paul Bert)에 의해서였다.

그는 고압환경이 생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연구했으며, 고압환경하에서는 호흡기체 중 보다 많은 질소가 혈액이나 조직에 용해된다는 것을 알아냈다.

 

압력이 변화하지 않는 한 기체는 계속 용해상태로 존재하지만, 잠수사가 수중으로부터 상승한 후에는 압력이 갑자기 낮아지면서 용해상태의 질소가 기체상태로 돌아오면서 갑자기 인체로부터 빠져나가려고 한다.

전신에서 발생한 기포로 인해 이 병과 관련된 증상이 나타난다.

만일 중요 장기로 가는 혈액순환이 기포로 인해 막힌 경우 마비가 오거나 심지어는 죽게 되는 것이다.

버트는 이를 예방하기 위해 천천히 상승함으로서 단계적으로 감압하는 방법을 추천했다.

 

그는 연구 결과 잠수병의 증상이 나타나자 마자 다시 수중 고압으로 내려감으로써 즉시 소실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수년 후에는 특별히 고안된 재압챔버 (Recompression Tank )를 작업 장소에 배치하여 잠수병 (Bends)치료보다 잘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챔버 속의 압력은 필요에 따라 가감할 수 있다.

이러한 재압챕버를 최초로 성공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1893년 뉴욕과 뉴저지 사이의 허드슨강에 터널을 건설할 때였다.

이를 사용함으로써 잠수병의 발생 빈도를 감소시켰을 뿐 아니라 잠수병으로 인한 치사율을 감소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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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가 추진한 점진적으로 계속해서 상승하는 방법으로는 잠수병을 완전히 예방할 수 없었으며 잠수사들의 일부는 계속 잠수병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 없었으며 잠수병으로 고생했다.

그 당시의 일반적인 견해로서는 인간이 작업할 수 있는 잠수심도는 120피트(실질적인)가 한계선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이유로서는 그보다 깊이 잠수하는 경우에는 잠수병의 발생빈도가 높아질 뿐 만 아니라 효율적으로 작업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120피트에서 작업하는 잠수사 중에서는 의식을 잃은 일도 드물지 않게 일어났었다.

생리학자(J.S Haldane)은 1905년부터 1907년까지 영국 해군 잠수사들과 함께 한 실험을 통해 이런 문제점은 비교적 간단한 원리에 의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즉, 잠수사들의 헬멧속의 공기가 충분히 환기가 되지 못하므로 결과적으로 헬멧 내에 고농도의 탄산가스가 축적된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점은 잠수사가 작업하는 압력 하에서 측정한 공기 속도(매분당 공기의 1.5입방피트)를 표준화시키며, 한편 이 표준공기속도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용량의 펌프(압축기)를 사용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해서 헬멧 속의 공기는 이런 원칙 아래 계속해서 환기가 될 수 있었다.

그밖에 할데인(Haldane)은 그 후에 비록 재검토되기는 했지만, 오늘날의 단계적인 감압법의 기초를 이룬 감압표도 작성했다.

 

할데인의 연구는 즉각적인 효과를 가져와서 공기를 이용한 잠수에 있어서 실제적인 잠수심도를 200피트로 증가시켰던 것이다.

동시에 이 심도에서는 생리학적인 문제점도 일어나지 않았고, 수동식 펌프로도 충분히 공기를 공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잠수심도가 점점 깊어져 가면서 또 다른 원인 모를 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즉, 잠수사들은 무엇엔가 중독된 것처럼 정신이 몽롱해지면서 잠수 할 이유조차 잊어 버리는 등 판단력을 상실하는 경우가 자주 일어났다.

 

1920년경 이와 같은 심해잠수시 일어나는 광적인 원인은 고압 하에서 공기를 호흡하는 경우 공기중의 질소에 의한다는 것으로 밝혀졌다.

기술적인 용어로서 이는 질소마취 (Nitrogen Narcosis)라 하며, 이를 질소의 마취적 특성에 의해 일어나고 공기의 압력이 높아질수록 점점 더 심해진다.

오늘날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잠수시에는 공기 대신 특별히 헬륨/산소 혼합기체를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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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대부분의 발명가들이 수중 고압환경에 대해 문외한이기는 했지만, 잠수사들이 압력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견고한 잠수복을 발명했다.

이런 종류의 잠수복은 잠수사로 하여금 대기압과 같은 환경하에서 호흡할 수 있고 충분히 깊은 심도에서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고안되었다.

죤 레스브리쥐가 제작한 원통형 잠수복 (Banel Diving Suit)도 일종의 견고한 잠수복이었으나, 작업심도가 제한되어 있었다.

이런 견고한 잠수복의 대부분은 실용성이 가장 큰 문제였다.

왜냐 하면, 고압에 견딜 수 있도록 고안되었기 때문에 너무나 둔탁하고 복잡해서 작업에 지장이 많았다.

1930년대에 잠수복은 최대로 700피트까지 잠수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으나, 실제로는 그에 미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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