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漢字)는 원래 우리글[韓字]이다.

 

언어는 사람들의 사상과 감정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다.

아마도 태초에 먼저 말이 있었고,

이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 문자가 발생했을 것이다.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는 말이 있다.

아이들이 말과 글을 배워가는 과정을 보면,

인류 역사에 문자가 발생하고 진화해m온 과정을 상상해m볼 수도 있겠다.

추측컨대, 문자는 아마도 먼저 그림문자의 단계를 거쳐 점차 추상화되고 소리의 변화와 결합하는 가운데 글자로서 완성되었을 것이다.
 
■우리 민족에게는 본래 음양일체로 두 개의 문자가 있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한글만이 우리의 글이며,

한자(漢字)는 중국의 글이라고 알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표의문자인 한자(漢字)는 원래 한자(韓字)이며,

표음문자인 정음(正音)과 더불어,

우리 민족의 두개의 문자 가운데 하나였다.
 
하루는 상제님께서 옥편(玉篇)을 불사르며 말씀하시기를 “내가 아는 문자만으로도 능히 모든 사물을 기록할지니 앞으로는 쉽고 간단한 문자로 천하에 통용되도록 하리라.”하시고

“장차 우리나라 말과 글을 세계 사람이 배워 가리라.”하시니라. (道典 5:11)
 
■한자에 담긴 우리 역사  


한자(漢字)란 한(漢)나라의 글자라는 뜻이다.

이는 한나라 때에 이르러 해서라는 모양으로 완성된 글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한자는 한족이 처음 만든 문자는 아니다.

한자의 원형은 우리 동방족(동이족東夷族)이 창제한 것이다.
 
한자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큰 틀에서 볼 때,

한자는 처음에 그림문자에서 출발하였을 것이다.

한자의 기원을 흔히 갑골문에서 찾는다.

갑골문이란 거북이나 소의 뼈에 새겨진 문자를 통칭하여 이르는 말로,

정사를 판단하기 위해 점을 칠 때 사용한 것이라 한다.

중국의 고대 은 왕조(BC 1600~BC 1122, 상商나라)의 도성이었던 유적지 은허에서 다량 출토되어 은허문자라고도 불렀다.
 
그런데 고고학적 발굴 결과 이 갑골문이 처음 출현한 곳은 서요하 상류로 확인되었다.

이는 지금으로부터 5,500년 전의 것으로서,

이곳이 동방족의 주요 활동무대였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갑골 점복은 처음에는 소 어깨뼈나 발굽뼈로 했으나 은나라 때부터는 거북 등뼈도 사용하였다.

이때 문자를 새기기 시작했다.

오늘날 많은 역사학자들은 은나라는 동이족이 세운 나라라는 자료를 제시한다.

나아가 갑골문 속에는 우리 민족문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삼일신고』 『참전계경』 『천부경』은 우리 삼성조 시대의 신교문화를 전해준 3대 경전에 속한다.

그런데 이 천부경이 갑골로 쓰여진 것이 발견되었다.

더구나 고려말 충신의 유품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농은 민안부는 고려말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 도은 이숭인, 수은 김충한과 더불어 6은으로 불린 충신으로서, 조선을 연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하여 두문동(杜門同)에 은거한 72현 중의 한 사람이었다(도전 두문동 성수공사 5:328~9, 11:389 참조). 또 『환단고기』「태백일사」에는 목은 이색 등이 천부경을 주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농은 민안부는 목은의 친구였으며 따라서 천부경을 이해하고 공유한 사람이었으리라고 짐작된다.
 
갑골문의 모사본으로 알려진 이 천부경 글자는 지금까지 발견된 갑골문에는 없는 글자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따라서 해독이 불가능한 글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은허에서 발견된 갑골문보다 더 오래된 것이 아니냐는 진단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한자의 뿌리는 배달국 태고문자 


그런데 은나라가 갑골문을 사용하고 있을 때, 단군조선에서는 전문(篆文)이라 하여 약칭 단전(檀篆)이라고 불리는 문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문자들이 당시 사용된 토기에서 속속 발견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자들이 최초에 창조된 것은 언제일까?
지금까지 동북아지역에서 갑골문뿐만 아니라 수많은 고대 금문(金文: 고대 청동기, 토기, 갑골에 새겨진 원시 한자와 각화문을 통칭하여 일컫는 말)이 발견되었으며 여기에는 우리 민족의 역사적, 문화적 자취가 여실히 드러나 있다.

갑골문이 은나라 때에 국한된 것이라면, 그림문자로 출발한 금문은 어쩌면 전자(篆字)에 비견되는, 전서(篆書)의 원형이었으리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최초의 금문연구서인 『금문신고(金文新攷)』(낙빈기, 산서인민출판사, 1987년)의 저자인 낙빈기(駱賓基)는 금문의 해석을 통해 신농과 황제 등 삼황오제시대를 역사적으로 증명하였으며,

더욱이 이것이 동이족의 역사와 문화였음을 고증하였다.

이런 충격적인 내용 때문에 중국내에서는 금서(禁書)로 분류돼 왔었다.
 
기록에 전하는 중국 고대문자의 시조는 5500년 전 동이족 태호 복희씨라는 설과 4700년 전 창힐이라는 설이 남아있다.
 
역(易)철학의 시조인 태호 복희씨는 배달국 제5대 환웅천왕의 막내아들이다.

복희씨는 중원으로 이주하여 동아시아문명을 실질적으로 개벽한 문명의 개조이며 한자의 뿌리가 되는 육서(六書)의 원리를 만들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역사기록 의하면 그는 용봉(龍鳳)을 토템으로 하여 관명을 지었다고 하며 새로 만든 문자를 용서(龍書)라고 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후대 황제 헌원 때 ‘창힐`이라는 인물이 새 발자국 모양을 따서 조적서(鳥跡書)를 만들었는다고 하며, 현재 그의 고향 섬서성 백수현 사관촌에 그 비석이 남아있다.

즉 복희씨의 용서와 창힐의 조적서 등이 후대에 갑골문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리고 춘추전국시대 이후 진(秦)시황(BC221~210)이 중국대륙을 통일하면서 문자를 통일하고, 이를 고대문자와 구분하여 소전(小篆)이라 칭했으며(앞에 밝을 명明자 참조), 다시 한대(BC140~ )에 이르러 한자(漢字,예서)로 굳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최초의 한자연구서이자 사전격인 고전 『설문해자(說文解字)』(BC100, 9353자)가 정리되어 나온다.
 
그러면 복희, 창힐시대에 동방 배달에는 어떤 문자가 사용된 것일까? 배달국 문자를 만든 인물은 초대 환웅천황 때 신지(神誌) 혁덕으로 전해온다.

그는 사슴발자국을 보고 처음 문자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 녹도글자가 경남 남해군 양하리 금산 중턱바위에 있다.

환단고기 대변설에 이르기를, “남해현 낭하리에 계곡 바위 위에 신시의 고각(古刻)이 있다.

그 글에 환웅천황께서 사냥 나왔다가 제를 삼신께 드린다고 했다”고 전한다.
 
이것이 후대에 더 세련된 모습으로 발전된 바, 이것이 1942년에 <영변>지와 구한말 백두용(白斗鏞) 편, 『해동역대명가필보(海東歷代名家筆譜)』에 실린 신지 전자(篆字)다.

배달국에서 만들어져 고조선시대까지 사용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창성조적서비(鳥跡書碑)의 창힐문자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

좬환단고기좭 좥삼성기좦에 의하면 창힐은 배달국 제14대 치우천황 때 문물을 배워갔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서 갑골문과 금문에 널리 전해오는 전자(篆字)는 기실 배달국의 녹도문이 전해져 여러 가지로 수정, 변형되어온 것으로 확인되는 것이다.
 
한자의 변천과정을 보면, 우리 것이 먼저고 우리가 중국을 가르친 스승나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아사아문명의 뿌리가 한민족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아직도 모든 문물이 중국으로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처럼 가르치는 교육의 현장을 다시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시속에 중국을 대국(大國)이라 이르나 조선이 오랫동안 중국을 섬긴 것이 은혜가 되어 소중화(小中華)가 장차 대중화(大中華)로 바뀌어 대국의 칭호가 조선으로 옮겨 오게 되리니 그런 언습(言習)을 버릴지어다. (道典 5:118:3~4)


출처 : ■한반도의 비밀■  |  글쓴이 : ■한반도의비밀■ 원글보기

환국시대


6.「환단고기」(桓檀古記)에 대한 우리의 의식

 

결론을 말할 것 같으면,

우리의 상고사는 너무도 빈약하다.

가깝게는 백제의 문화적 기록도 부족하다.

 

물론, 일제시대 일본의 상고사 말살정책에 의해서 우리의 역사가 많이 축소되었다.

하지만, 해방이후에 그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단군조선은 그저 하나의 신화로서 동화책 < 북한의 단군릉> 같은 이야기 만을 놓아둔 채 손을 대지 않았다.

 

이에 비해,

중국과 일본은 억지스럽게 자기네들의 상고사를 찾고 있으며,

더구나 일본은 그것을 소재로 만화영화까지 만들어 수출하고 있다.

 

북한에서도 1994년부터 평양 동쪽 강동군에 단군릉을 복원하고 있다.

환단고기를 인정하는 재야 사학계에서는 북한의 단군릉을 단군 조선시대 5번째 통치자인 구을 단군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토록 메말라 있던 상고사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는 책들이 나왔음에도 거들떠 보지도 않고 있으니 한심하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환단고기 등과 같은 책이 아니다.

우리의 상고사를 찾으려는 노력이 없다는 사실이다.

학자들의 집요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모든 역사적 기록을 중국에 맞추어 오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듯 싶다.

 

○ 참고 문헌 『환단고기』, 계연수. 코리아북스

5.「환단고기」(桓檀古記)의 사료적 가치에 대한 논쟁


ㄱ.「환단고기」는 사료로서 무가치하다는 주장

 

사료로서 무가치를 주장하는 쪽은 대부분 학계이다.

 

그들은 먼저 환단고기의 출처가 명확하지 않음을 들고 있다.

환단고기 저자들의 행적이 확실치 않으며,

그들에 대한 기록이 다른 사료에 자세히 나와 있지도 않고,

어느 곳에도 그들이 환단고기를 지었다는 기록이 나타나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환단고기를 단행본으로 만든 계연수의 행적도 알 수 없으며,

70년 후에 이유립이 책을 발간하였는지도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책의 출처가 정확하지 않기에 학계에서는 사료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큰 부정 이유인 듯 하다.

 

다음은 환단고기의 책에서 발견되는 근거들이다.

 

환단고기에는 이런 문장이 기록되어있다.

"백성들과 더불어 산업을 다스리니 한 사람도 굶주림과 추위에 떠는 이가 없었다."

"학교를 세워 학문을 일으키니 문화가 크게 진보하여 명성이 날로 드러났다."

이 문장은 단군세기에 나오는 부분이다.

 

단군세기는 고려시대 이암이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 쓰인 '산업, 문화'같은 용어는 근대에 등장한 단어로 고려시대에 쓰였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단어'국가, 인류, 전세계, 남녀평등'이란 말이 환단고기 곳곳에 등장하는데,

이런 단어들은 고려와 조선시대의 단어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환단고기는 사료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이 밖에도 환단고기를 인정하지 못하는 근거는 또 있다.

그것은 다른 책을 베낀 흔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환단고기의 기록 중에는 많은 부분이 다른 사서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환단고기에 기록된 단군조선시대 호구가 1억 8천만 구로써, 인구로는 9억이 넘은 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인구통계표가 천만을 넘지 못하는데,

너무 무리가 아니냐는 것이다.

 

이러한 근거들로 인하여 환단고기는 학계에서는 찬밥신세다.

아무런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ㄴ.「환단고기」는 사료로서 가치가 있다는 주장

 

사료로서 가치를 주장하는 쪽은 주로 재야사학계이다.

 

주장의 근거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고조선의 영역에 나타나는 비파형 동검의 출토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나 있다.

 

마지막으로는 환단고기에 나타난 자연현상에 대한 기록들이 과학적으로 사실로 판명이 된 것이다.

 

먼저, 환단고기를 토대로 고조선의 영역을 추정해보면,

지금의 북경에서부터 만주의 전지역과 한반도 전체를 차지하고 있다.

 

한 시대의 영토를 추정하는 방법 중에는 문헌에 나타난 기록과 그 시대의 유물이 출토되는 지역을 참고로 추정하는 방법이 있다.

 

청동무기 비파형 동검은 고조선의 대표적인 무기로,

당시 지배층의 독점물로써 중앙에서 만들어 지방에 공급하였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같은 청동기가 사용된 지역은 한 통치집단에 의해서 지배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비파형 동검이 지금의 북경지역, 만주, 한반도 전지역에서 출토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한다면,

고조선의 영토는 북경지역, 만주, 한반도 전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환단고기에서 이야기하는 고조선의 영토가 거짓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음은 조선왕조실록에 '수서령'이란 부분이다.

수서령은 조선시대 세조와 예종, 성종 때 팔도 관찰사에게 명령해서 옛부터 전해져 온 희귀서적을 전국에서 거두어들인 일이다.

 

지금은 전하지 않으나, 이 수서령이 내려진 책 중에서 환단고기에 실려있는 책과 제목이 발견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삼성기'이다.

수서령의 대상이 되었던 책이 환단고기의 제목으로 나타나는 것은 계연수가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책들을 참고하였다는 근거를 낳게 된다.

 

○ 참고 문헌 :『환단고기』, 계연수. 코리아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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