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옷도 입지 않고 진두지휘 ~ 장렬하게 자살 ???

이순신 장군이 최후의 전투인 노량 해전에서 갑옷을 입지 않고 진두 지휘하다가 적탄을 맞은 것은 이순신 장군이 자신의 최후를 부끄럼 없이 장식하기 위해서 장렬하게 자살한 것이라는 설이 설득력 있게 퍼져 있다.


당시의 정치의 역학 관계를 볼 때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로 여겨진다.

이순신 장군은 평소에도 자신의 진퇴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곤 하였다.
후에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유형은 이순신 장군이 평소에 갖고 있던 결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순신 장군이 평소에 마음 속을 토로하며 말하기를

"예로부터 대장이 자기가 세운 전공에 대해 인정을 받으려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갖는다면 대개는 생명을 보전하기 어려운 법이다.

나는 적이 물러나는 그 날에 죽음으로써 유감 되는 일을 없애도록

이는 이순신 장군이 적이 물러나는 마지막 전투에서 ‘반드시’ 죽겠다"는~

비장한 내용으로 이순신 장군의 죽음이 결코 통상적인 전사가 아닐 수  없다.

1597년 7월 15일 원균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은 칠천량에서 왜수군에게 대패했고 이 전투에서 원균도 전사하였다.
이 패전 소식에 놀란 조정은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장군을 삼도수군통제사에 다시 임명했다.


9월 16일, 명량 해협에서 단 13척으로 적선 133척을 상대로 포위를 당하고도 대승을 거두며

조선수군은 다시 남해의 해상권을 회복하게 된다

(임진왜란은 조선이 이긴 전쟁(3)」, 국정브리핑, 2004.08.16 참조).


다음해 7월(1598)에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陳麟)이 5천명의 수군을 거느리고 와서

조선 수군과 합동으로 순천에 주둔하고 있는 소서행장의 군을 해상에서 포위, 적의 해상 교통을 봉쇄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전황이 바뀐다.
8월 17일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그의 명에 의하여 왜적은 철수의 길에 오르게 된다.

순천에 있던 소서행장은 이순신 장군이 해상을 봉쇄하고 있기 때문에 용이하게 빠져나갈 수가 없게 되자 진린에게 뇌물을 주어 퇴로를 열어달라고 한다.

진린은 이순신 장군에게 퇴로를 열어주자고 하였으나 이순신 장군은 일거에 거절했다.

이에 왜적들도 일전을 각오하고 소서행장은 곤양과 사천 방면의 적에게 구원을 청하여 구원병들이 노량(鷺梁)으로 모여 들었다.

이때 왜군의 배는 500여 척, 조선의 수군과 명군의 배는 300여 척이었다.
이 전투에서 비록 충무공이 전사하였지만 왜선 500척 중 450 척이 부셔지고,
왜장 도진의홍(島津義弘) 등을 비롯한 일부가 고작 50여 척으로 도망칠 정도로 조선 측의 대승이었다.

그 때가 선조 31년 11월 19일이였다.


전사를 선택한 마지막 해전~~
마지막 전투인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의 죽음이 자살이라는데,
비교적 많은 공감을 받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때 이충무공이 전사하지 않았다면,

어차피 또다시 잡혀가서 억울하고 욕되게 죽음을 당했으리라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가설이 나오게 되는 당시의 정황을 읽어보자.


여기에는 선조의 성격이 크게 작용한다.
선조는 변덕스럽고 의심이 많았는데 왜란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 더욱 불안해져 의심나는 사람을 닥치는 대로 미리 죽였다.
특히 정여립 역옥 사건으로 인하여 1,000여명의 죄 없는 사람들을 마구 죽였는데 그 정도가 얼마니 심하였는지,

자살한 정여립에게 다시 형벌이 가해지던 날 어떤 사람이 안질 때문에 눈물을 흘리자,
정여립을 추모한 까닭이라고 곤장을 쳐죽이기도 했다.

이순신과 친분이 있었던 조대중도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울었다는 죄목으로 고문을 받고 죽었으며,

그의 처와 첩, 아들, 딸, 동생, 조카 등이 모두 죽었다.

더구나 왜란 중에 선조를 비롯한 집권자들은 도망치기에 급급했지만,

의병장을 중심으로 한 의병들은 효과적으로 소위 중앙 조정의 통제를 벗어나 자치권을 갖고 전투에 임했다.

이 때의 의병장들로는 조헌, 고경명, 곽재우,김덕령 등으로

이들에 대한 백성들의 기대감은 컸다.


의병장들이 관의 지휘를 벗어나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왜란이 막바지에 다다르자,

조정은 왜란이 끝나면 의병장들에 대한 백성들의 기대가 자신의 권력 기반을 잠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외적을 막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부의 잠재적인 적도 견제해야 했다.

조정은 의병장들에게 촉각을 곤두세우다가 첫 칼을 빼들어 김덕령 장군을 역모 혐의가 있다고 31살 나이에 죽인다.

이에 대한 이민서(李敏敍)의 `김충장공유사'에서 ‘김덕룡 장군이 죽고부터 여러 장수들이 저마다 스스로 의혹하여,

곽재우는 마침내 군사를 해산하고,숨어서 화를 피했고,

이순신은 바야흐로 전쟁 중에 갑주를 벗고 스스로 탄환에 맞아 죽었으며,

호남과 영동 등지에서는 부자와 형제들이 의병은 되지 말라고 서로 경계했다.’라고 적었다.


조정의 비정한 칼이 영웅호걸들에게 다가오는 것을 느끼자
권율은 아침 저녁으로 한양에 장계를 띄워 충성을 맹세했고,
대장군 이일은 아예 왕실과 조정의 수호자임을 자처했다.

사실 선조는 이순신 장군을 체포할 때도 이충무공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생각하고 있었다는 정황이 있다.
선조는 금부도사에게 선전관의 신표와 밀지를 주어 신분을 위장하고 이순신 장군을 잡아오게 하였다.

금부도사는 먼저 선전관의 자격으로 10여 일을 한산도에 머물면서,
이순신 장군의 동태를 엿본 다음 이순신 장군을 잡아오는데,

선조가 이순신 장군을 체포하도록 명령한 것은 잘 알려진 다음 4가지 죄목이다.


이순신은~

조정을 속였으니 임금을 업수이 여긴 죄를 범했다(欺罔朝廷 無君之罪).
적을 쫓아 치지 않았으니 나라를 저버린 죄를 범했으며(縱賊不討 負國之罪).
남의 공을 빼앗았고 남을 모함했다(奪人之功 陷人於罪 無非縱恣 無忌憚之罪).
뿐만 아니라 방자하고 거리낌이 없는 죄까지 있으므로 그를 구할 길이 없다.
이같이 신하로서 임금을 속인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하고 용서할 수 없으므로
(必誅不赦) 이제 본격적으로 고문을 가하여 실정을 알아내라(今將窮刑得情).'


선조가 우부승지 김홍미에게 이순신의 죄목에 대해 자백을 받은 후 사형에 처하라고 지시까지 한 것을 볼 때 이순신을 견제하려던 의도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정탁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이 전투 중에 군사령관을 사형에 처하는 것은 왜병에게만 도움을 줄 뿐이라는 구명 상소문을 올리자 이순신 장군의 목숨만은 구하게 된다.


극적으로 생명을 건진 이순신 장군은 1597년 7월 원균의 패전으로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후 패잔선 12척(총13척)으로 명량 해전에서 또 다시 대승을 거둔다.

선조가 이순신장군을 죽이려 했던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이순신 장군을 더 미워하게 되었으리라는 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선조 실록] 1597년 10월 20일을 보면 선조는 명량해전에 대해 이순신은 사소한 적을 잡은 데 불과하다.
이순신에게는 벼슬을 올려주지 않으면서 포상하는 방법을 연구해보라.~~’ 고 말하면서,

포상도 거부한다.

특히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이후에도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해전인 노량 해전의 승리도 대수롭지않다고 했다.


선조는 임진왜란, 정유재란 등을 통해서 자신의 존립이 위태해진 것을 경험하였으므로

전쟁이 끝나자 왕권에 대해 병적인 집착을 갖고 ,
전쟁이 끝난 후의 논공행상에서 선무일등공신으로는 이순신, 권율, 원균 등 사망한 사람에게만 주었다.
곽재우, 이원익 등 살아 있는 사람들은 1등 공신으로 추천되었으나 아무런 상을 받지 못하였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영웅 칭호를 준다면 선조로서 안심할 수 없게 된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이순신 장군의 죽음이 스스로 택한 죽음이라는 견해는 많은 사람들의 동조를 받았다.


적의 유탄을 맞았다’는 사실과 스스로 전장에서 영광스럽게 죽음을 맞는다’라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음은 물론이다
자신의 통치에 방해될지도 모를 잠재 세력들을 제거하는데 앞장 선 선조의 행위를 볼 때 

이순신 장군에게도 또 다시 칼이 날아 들어올 것이 명약관화하게 생각되는 상황이었으므로

이순신 장군이 전장에서 장렬히 전사했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동조를 받았다.


이것은 무장으로서의 최고의 명예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을 따라다니는 전설 중에는 놀랍게도 충무공이 전사하지 않고 전사한 것처럼 위장하였다는 설도 있다.

사실 이 당시 이순신 장군도 자신에 대한 선조의 마음이 곱지 않다는 것을알고 있었으므로

그가 취할 방법은 세 가지 중 하나였다.

첫째는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전장에서 장렬하게 전사하는 방법이다.
둘째는 앉아서 맞아 죽는 것보다 스스로 일어나 썩은 정권에 항거하는 것이고
셋째는 외형적으로는 죽기는 죽되 실제로는 살아서 후일에 대비하는 것이다.


이 중에서
둘째의 방법 즉 무능한 정권에 항거한 무장봉기,
즉 선조가 우려하던 쿠데타도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시나리오 중
하나라고 적은 네티즌도 있다.

이순신의 근거지는 전란의 참화를 비교적 적게 받은 안전한 거점으로 식량과 농토가 보존되었고 관리들의 가렴주구가 없었다.

또한 백성들은 이순신을 실질적인 주인으로 여겨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순신이 함대를 이끌고 한강을 거슬러 한양을 공략했다면 승산도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이순신이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던 데다가 왜군의 침략을 구해준 구세주라는 백성들의 인식은 고려말 이성계가 중앙정부를 전복할 때와 유사했다.

만약에 이순신이 쿠데타에 대한 이론적 바탕을 보유한 학자들과 결합했다면 중앙정부와 싸울 승산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가정은 큰 의미가 없다고 볼 수 있지만.

이순신장군이 당시의 혁명아로 불리는 허균과 만나 정세를 토론했다면

근원적인 해결책을 찾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새정권에 대한 허균의 설득력이 이순신을 이끌었다면

정도전이 이성계를 이끈 것과 같은 결과를 갖고 올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반박도 많다.
이순신의 군대는 수군 위주라서 육전에 한계가 있으며,
당시 조정이 썩기는 했지만 왜란이 소강상태에 있었으므로 내란을 방어할 만한 힘이 비축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하튼 두 번째 가설은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고,

마지막 선택 즉 이순신이 전사하지 않고 살아서 후일에 대비했다는 설은 예로부터 꾸준히 내려오고 있다.

즉 이순신 장군이 마지막 해전인 노량전투에서 사망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순신 장군 자살설’에서 실제로는 죽지 않고 살아서 은둔하였다는 가설을 설명하기 전에 노량해전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한다.
노량해전은 워낙 전투 상황이 잘 알려져 있으므로 당시의 정황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순신은 명나라와 조선군 연합함대는 11월 18일 밤 10시에 출항,
11월 19일 새벽 2시쯤 왜적의 선단이 몰려오는 노량바다로 나아가고 있었다.
왜군이 새벽 4시 노량을 거쳐 관음포(觀音浦) 앞 바다에서 이르렀는데 
연합함대는 좌우로 편을 갈라 행진했다.

반면에 사천에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등의 왜적들은 500여 척을 이끌고,
경상도 사천으로부터 남해 노량 사이에 있는 광주양(光州洋)을 지나 곧장 노량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때 조선 수군들은 대적선의 항로 전방인 죽도와 관음포 사이에 배치되었고,
명나라 수군은 죽도 북쪽에 매복하였다.

왜적선이 노량 수로를 지나 관음포 앞바다로 다가왔을 때, 
조선 수군이 좌우에서 일시에 포격을 가하자 당황한 적들은 갈팡질팡하다가 이윽고 전열을 정비하여

우리 수군에게 대항해 왔지만 연합함대의 공격에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날이 새기 시작할 무렵 관음포로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남해 관음포는 지리적인 지형상 도망치기가 매우 어려운 곳이므로 왜적선들이 다시 돌아서서 결사적으로 대항하면서

이순신의 배를 목표로 겹겹이 에워싸자 자못 위급한 상황이 되었다.


이 때 진린이 포위망을 뚫고 들어와 이순신을 구해냈고 거꾸로 진린의 배가 적선에게 포위되어 위급하게 되었을 때 이순신이 진린을 구했다.
연합함대의 맹렬한 공격은 쉬지 않았다.

적들은 패전의 빛이 짙어지자 관음포앞을 벗어나 남쪽으로 도망치려 하였으나
적선 1척도 돌려보내지 않으려는 이순신장군은 스스로 앞장을 서서 달아나는 적의 뒤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였다.
적의 탄환이 이순신의 왼쪽 가슴을 관통하여 등으로 빠져 나갔다.'


이순신 장군은 전사하지 않았다.
이순신 장군의 생애에서 죽음의 순간처럼 드라마틱한 부분은 없다.
특히 이순신의 전사 장면은 후일 각종 전기에서 약간씩의 포장을 더하면서
그의 죽음을 신화화 하는 근거가 되지만 동시에 그의 죽음을 둘러싼 논란의 시발점이 되기도 한다.


우선 이분(李芬)이 쓴 행장(行狀, 죽은 이의 일생을 기록한 글) 중에서 유독 이순신 장군의 전사 현장 기록만은 매우 믿기 어려운 내용으로 기술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19일 새벽 2시쯤부터 적선을 만나 아침까지 크게 싸웠다.

이순신 장군은 '이들을 놓치지 말라.
이 싸움에서 우리나라를 쳐들어 왔던 왜적을 한 명이라도 살려보내서는 원통하게 죽은 우리 백성들의 영혼이 용서치 않을 것이다.
만일 이 원수를 갚는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한 후 결전에 나선다.
전투는 치열하였고 적이 차차 무너지기 시작하자 이순신 장군은 더욱 북채를 쥐고 독전하였다.


적은 거의 전멸 상태에 빠지고 최후의 승전고를 울리려 할 때 적이 쏜 탄환 한 발이 이순신 장군의 가슴을 관통하여 등으로 빠져 나갔다.


이순신 장군은 맏아들 회와 조카 완(莞)에게 ‘방패로 내 몸을 가려라.
지금 전쟁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戰方急 愼物言我死)’라는 유명한 말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

회와 조카 완이 울음을 참고,
'지금 만일 곡성을 내었다가는 장병들이 놀라고 적들이 기세를 얻을지 모른다.~~’ 라고 말하며, 이순신 장군의 시체를 안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장군이 사망한 것을 아는 사람은 이순신 장군을 모시고 있던 종 김이와 회와 완 세 사람뿐이었고 부하 송희립 등도 알지 못했다.


전쟁이 끝난 후 진린 도독이 급히 배를 저어와 그의 죽음을 알고는 전쟁이  끝난 후
진린 도독이 급히 배 위에서 세 차례 꿇어 앉아 큰 소리로 통곡하면서 '나 때문에그대가 돌아가셨구려’하고 가슴을 치며 한참이나 울었다.
그때서야
다른 배의 병사들이 통제사의 죽음을 알고 땅을 치며 목을 놓아  울고 또 울었다


이분이 기록한 충무공의 최후장면이다.


이분(李芬)은 현장에 있었던 이순신 장군의 조카인 완의

그러나 이 글만 보면 마치 연극의 한 장면을 보는 것과 같지만.

이분이 당시 상황을 잘 모르고 쓴 글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한 편의 영화장면과 같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설명 때문이다.
우선 이순신 장군이 총에 맞고 나서 처음에는 필요한 말을 제대로 하였으나
곧바로 사망했다는 대목도 이상하지만

전투가 한창일 때 총사령관 근처에 측근 군관들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도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다는 것이다.


전라우수영의 기록을 보면 사령관 함선에는 항상 90여명의 기라졸(旗羅卒)이 배정되어 있었다.
특히 이순신 장군이 전사할 당시 서 있던 곳은 60여명의 병사들이 항상 있었던 2층 갑판상의 중앙 지점이었다.


이곳에서 이순신장군이 사망했다면 당연히 차순위 군관이 함대를 지휘하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령관이 사망하였는데도 그 사실조차 아무도 모르고 있었으며,
군인도 아닌 약 20세인 맏아들과 조카가 해전이 끝날 때까지 깃발을 흔들면서 함대를 지휘하였다.


세계 해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전투가 마치 어린아이들의 전쟁놀이와 같이 설명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의문점이다.
이것이 이순신 장군의 은둔설이 나오게 되는 당시의 정황이다.

전투 상황을 볼 때 사령관 함선에 타고 있던 측근 군관들이 충무공의 유고시 함대를 지휘하였음이 당연하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의 사망 조작설로 보면

이들은 장군의 아들, 조카와 마찬가지로 이순신 장군의 은폐 작전에 동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내용을 잘 아는 이분도 공모자인 이순신 장군의 부하들에게 화가 미치지 않도록 기록을 조작하였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또 다른 증거도 있다.
야간에 해전을 하면 배의 기동력을 발휘하기 어려우므로 조선군에게 불리하다.
그러므로 이순신 장군은 야간에 해전을 한 일이 없다.
그러나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이 사망한 시각이 새벽 2시인데,
이것은 이순신 장군이 자신의 은둔계획을 추진하기 위하여 어둠을 이용했다는 뜻이다.
더구나 더 큰 의문은 맏아들과 조카가 함께 배를 타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순신 장군은 전란 중에 20여 번의 전투에 직접 참가하였는데
그들이 해전에 참가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들은 이순신 장군이 유탄에 맞은 것을 본 유일한 목격자이며
해전이 끝날 때까지 여러 시간 동안 그의 죽음을 숨겼다.

이순신 장군의 죽음을 위장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들보다 더 이상 좋은 대안은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것이 틀림없다는 주장은 "선조실록"(선조31년 11월 27일)의 기록으로도 알 수 있다는 지적이다.

불의에 진격하여 한참 혈전을 하던 중 순신이 몸소 왜적에게 활을 쏘다가 왜적의 탄환에 가슴을 맞아 선상(船上)에 쓰러지니

순신의 아들이 울려고 하고 군사들은 당황하였다.

이문욱(李文彧, 당시 일본어 역관)이 곁에 있다가 울음을 멈추게 하고 옷으로 시체를 가려 놓은 다음 북을 치며 진격하니 모든 군사들이 순신은 죽지 않았다고 여겨 용기를 내어 공격하였다.


왜적이 마침내 대패하니 사람들은 모두 ‘죽은 순신이 산 왜적을 물리쳤다.’고 하였다
부음(訃音)이 전파되자 호남(湖南) 일도(一道)의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여 노파와 아이들까지도 슬피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특히 선조 32년 2월 8일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노량(露梁)의 전공은 모두 이순신이 힘써 싸워 이룬 것으로서

불행히 탄환을 맞자 군관 송희립(宋希立) 등 30여 인이 상인(喪人)의 입을 막아 곡성(哭聲)을 내지 않고 재촉하여 생시나 다름없이 영각(令角)을 불어,

모든 배가 주장(主將)의 죽음을 알지 못하게 함으로써 승세를 이루었다.

물론 충무공이 살아서 금의환향하며 개선했다면 과연 죽을 때까지 구국의 명장으로 살아 있을지를 의문으로 보는 견해는 선조의 여러 가지행태로 보아 일리가 있다는 견해이다.


보나마나 이순신 장군의 과거의 죄를 다시 묻는 상소가 빗발쳤을 것이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것이다.
토끼사냥이 끝나자 사냥개를 잡아먹는 격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순신 장군이 장렬한 전사를 지론처럼 이야기하자 측근들은 오히려 살아서 은둔하도록 권했다는 것이 은둔설이다.


그런데 위 `선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이분의 행장과 너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분은 이순신 장군의 조카로 함께 승선하고 있었던 이완의 친형 임을 앞에서 적었다.

그러므로 이순신 장군의 죽음을 이완과 함께 송희립 등이 직접 목격했다면
이분이 그 당시 정황을 영화 장면처럼 적을 이유가 무엇인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결론은 이분이 당시의 정황을 영화 장면처럼 묘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은둔설의 또 다른 배경이다.


노량해전도.공식적으로 충무공은 1598년 11월 19일 노량 바다에서 사망하였으며,
영구는 고금도로 옮겨 진다.

그 후 12월 10일 경에 고향인 아산으로 옮겨 지며,

장례는 다음해 2월 11일에 치러 진다.
사망한지 80일 후의 일이다.
그리고 노량 해전에서 전사한 후 16년이 되는 1614년에
묘지를 600미터 떨어진 곳으로 이장한다.


여기에서도 의문점이 제기된다.
이순신 장군의 사망은 11월 23일 선조에게 보고되며

12월 4일에 이순신 장군에게 우의정을 증직되고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 진다.
그런데 국장으로 치러진 장례임에도 16년 후에 이장하였다는 것도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다.

이것은 그때에 비로소 이순신 장군이 사망하였기 때문에 장례를 다시 했다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이때 충무공이 사망했다면 그의 나이는 70세였다.
물론 이 당시 선조는 사망하고 광해군이 집권하고 있을 때이다.


이순신 장군의 은둔설은 충무공이 전사한 것으로 위장한 후 밤을 틈타 빠져 나왔다는 것을 뜻하는데,

현재로 치면 해군참모총장격인 이순신 장군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위장하면서까지 탈출을 도모하였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
이러한 설을 제기하는 자체가 적의 퇴로를 차단하며 단 한 명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고 전의에 불타 있었던 이순신 장군에 대한 모독이라는 견해다.


일본의 재침시 누가 막을 수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 장군의 은둔설이 나름대로 힘을 받는 것은 일본과의 전쟁 즉 임진왜란(7년전쟁)을 엄밀하게 분석하면 어느 정도 수긍이간다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명나라를 치러 간다는 명분으로 조선과 동맹을 맺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제의를 받고 소위 정탐꾼(통신사)을 공식적으로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침략 야욕을 갖고 있느냐 없느냐를 놓고 찬반양론을 벌인 후 전쟁은 일어 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 같은 결론은 전쟁을 대비할 필요가 없게 만들었다.


따라서 일본이 임진년에 조선을 침략했을 때 승패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조총이라는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한반도를 유린했고,

선조는 허겁지겁 신의주까지 도망갔다.

다행히 명나라 원군이 참전했고 지루한 평화 협상 끝에 일본은 결국 철수한다.
일본군이 철수한 후에도 조정에서는 일본의 재침이라는 돌발 변수에 아무 준비도 하지 않다가 정유재란을 맞는다.


물론 정유재란에서는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조선 수군의 활약과 일부 관군 의병들의 선전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적장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일본군이 자진하여 완전히 철수하면서 전쟁은 종결된다.

그러나 일본군이 정유재란을 일으켰는데 또 다시 조선을 재공격하지 말라는 당시의 상황을 검토해 보면,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순신 장군이 살아 있었다면 선조가 이순신 장군을 또 다시 죽이려 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는 점은 앞에서 설명했다.

그런데 일본이 재침해 온다고 가정한다면 이순신 장군이 사라졌을 때 누가 조선을 지킬 수 있겠는가하고 질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정유재란 때는 다행하게도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국가의 부름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노량 전투에서 전사한다면,

다음에 위기가 찾아 올 경우 죽은 이순신 장군이 다시 나설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충무공의 부하들이 일본이 또 다시 재침한다면

국난을 지킬 사람은 이순신 장군 뿐이라고 설득하면서 은둔을 요청했을 때

이순신 장군이 섣불리 노량 전투에서 고의적인 자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적어도 이순신 장군과 부하들은 일본이 언제든지 재침해 올 수 있었다고 믿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후일 일본이 재침한다고 가정한다면,
노량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하는 것보다는 살아 있으면서 일본이 재침할 때 다시 나서야 한다고 설득하자 노량해전에서 은둔하는 모험을 시도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설명이다.


물론 이순신 장군의 은둔설에 대한 결정인 증거는 없다.
정말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것으로 위장하여 살아남기로 작정하였다면
치밀하고도 은밀하게 일을 추진하고 뚜렷한 증거를 남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증거라면 증거이다.

더구나 일본은 우려한 것과는 달리 재침해 오지 않았다.
이순신 장군이 다시 나설 기회가 없이 16년 후에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는 설명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언젠가 독자들에게 이런 의문도 속시원히 밝혀질 날이 있을지 모르겠다.

 


~~ 이상은 퍼온 자료이며~~약간의 수정이 있었습니다~~

흐르는 음악은 "茶母"의 주제가

 

출처 : 비공개

음력 11월19일(12월20일)은 "성웅 이순신"장군께서 전사하신 날 입니다.

그래서 여기 이순신장군 사후에 대한 글이 몇가지 있어서 여기에 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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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요즘 "줄기세포"로 인한 "황우석쇼크"!!!

지금에 처한 황우석교수를 볼 때면

"성웅 이순신"과 자꾸 비교가 되어 연상이 되는데,

(그렇다고 이순신장군과 같은 성웅이라는 것이 아니며,

단지 처한 상황이 그렇다는 것이니,

혼돈하여 착각하지 마시길...)

 

줄기세포라는 대단한 발명은 임진란 당시 거북선이라는 발명품에 버금 가는 것이 아닌가?

근데 이순신장군(황우석)과 왜군을 물치는데는 목적은 같지만 (불치병환자 치유를 위한 줄기세포 대 성체세포),

뜻이 틀린 원균(노성일)에 의해,

체세포 핵이식 배아 줄기세포냐? 체외수정 배아줄기세포냐? 하는 것에

수없는 장계(보고서나 기자회견)가 올라 가고,

국민을 마치 자기 백성인양 의기 양양한 메스컴(MBC와 몇몇 언론단체)의 질책과 고문(PD수첩과 인터넷상의 글)로 인해,

결국에는 "백의종군"을 택하고,

병원입원...

 

하지만 멀리 명나라의 유정과진린도독(쎄튼교수)과 원병(싸이언스지)은

이제 구원이 아닌 등을 돌리는 형상

 

물론 그밖에 당파싸움(종교계와 학계 그리고 정계의 설왕설래)으로

무엇이 진실이고 어느것이 거짓인지

국민들은 혼란에 아우성!!!

 

정말 그 시대나 이 시대는 어찌 이리 같을 수가 있는지...

 

그냥 엉터리로 대비해 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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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1990년~1998년...

약 8년에 걸쳐서 중국학자 5명과 일본학자 7명 그리고 그 외 일본사관학교(육사.해사) 장교 및
중국인민박물관장. 한국해군사관학교장교들의 도움으로 총 32권으로 발권된 책이죠.

이 책은 크게

- 이순신장군 생애를 다룬 5권.(이순신은 누구인가?)

- 일본장수가 본 이순신 2권 .

- 명나라가 본 이순신1권.

- 1500~1600년시대의 조선과일본 그리고 명나라 10권.

- 이순신과 임진왜란 5권.

- 토요토미 대 이순신 2권.

이렇게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한 내용이 25권.
그리고 역사적 근거로 가설을 부친 내용이 7권으로 나누워진 책입니다.



이 중에서 좀 특이한 것은 일본 장수가 본 이순신 장군님에 관한 책이 2권이나 된다는 것인데...
이순신 장군께서 난중일기를 남기시듯..

일본장수들도 나름대로 자신들의 기록을 남긴 서적들이 꽤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와키자카와 도도. 등등...
특히 이 두 사람은 이순신 장군님에 대한 기록이 유별 나다고 합니다.
아마 같은 수군이라서 그랬겠지요...


1. 와키자카가 본 이순신

전에 KBS1 역사스페셜에서도 나온 적이 있습니다.

와키자카 후손들이 매년 이순신 장군님 탄생 때 온다는거....

와키자카가 이순신장군님을 알게된건 한산도대첩때인데...

와키자카는 우리가 알고있는 것과는 성격이 좀 많이 다르다고 합니다.

물론 한국에서 바라보는 것과 일본에서 바라보는 건 차이가 있겠지만...

아무튼 와키자카라는 장수는 전형적인 사무라이였는데 명예를 중요시 하였으며,

차를 좋아했으며, 함부로 살생하기보다는 덕을 베풀어서 적을 자기수하로 만드는

뭐랄까 그런 묘한데가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와키자카는 2천의 군사로 약 5~10만명(정확한설은 없음.

우리역사에는 5~6만명이라고 하고 일본역사에는 8~10만이라고 함) 정도 되는

조선육군을 물리친 명장 중에 명장입니다.

그러한 명장이 듣지도 못한 장수 이순신장군에게 대패를 하였으니 그 충격은 대단했을 겁니다.

한 예로 와키자카는 한산도대첩 이후로 충격에 6일을 굶었다고 본인이 그렇게

기록을 하고 있으니 그 충격은 대단했었나 봅니다.

식음을 전폐하고 내가 왜졌는지 생각하고 고민하는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나는 이순신이라는 조선의 장수를 몰랐다.
단지 해전에서 몇번 이긴 그저 그런 다른 조선장수 정도였을거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내가 겪은 그 한 번의 이순신 그는 여느 조선의 장수와는 달랐다.
나는 그 두려움에 떨려 음식을 몇일 몇날을 먹을 수가 없었으며,
앞으로의 전쟁에 임해야하는 장수로서 나의 직무를 다할 수 있을련 지 의문이 갔다.



2천의 군사로 5만 이상의 조선군을 물리친 일본의 명장이 이렇듯 두려움에 떨 정도였으니...

이후에도 와키자카는 여러번 이순신 장군님에대한 본인의 생각과

조선수군과 있었던 전투내용을 상세히 기록해 뒀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흥미로운점은 와키자카가 쓴 내용에보면..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숭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 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 하고 싶은 이도 바로 이순신이다.



적장이지만 와키자카도 멋있는 사람이라고 느껴지는 글이죠.

아마 이러한 이유 때문에 4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후손들이 이순신장군님 탄생일때 오는가 봅니다




2. 명의 사신이 본 이순신

그리고 "운덕 " 이라는 명나라의 사신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후일 이순신 장군님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을 했습니다.



하루는 어두운밤 눈이 몹시 내리고 그바람이 칼날 같아서 살결을 찢는 듯 하니,
감히 밖으로 나서지 못하겠더라..

그러한데 그속을 통제사영감이 홀로 지나가니,
무슨까닭으로 이 어둡고 추운바람속으로 거닐고 있는걸까?
궁금하던차에 한번 따라가보니 통제사 영감이 가고 있던 곳은 바로
왜놈이 잡혀있는 현장으로 가는거 아닌가...

더욱이 이상하여 더 밟아보니 통제사영감 손에는 한권의 책이 있더라...
밖에서 보니 통제사 영감은 그 왜군에게 명심보감중 효행편을 읽어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다음날 알아보니 그 왜군의 나이는 15세이더라...
10살 의 어린나이에 병사가 되어 왔음에 이 아이가 포로가 된후 이를 딱히
여긴 통제사영감이 별도로 감싸주었던 것이다...

10살에 포로가 되었으니 벌써 5년이 되었고 그동안 왜군의 아이는 조선말을 배웠으며
간간히 통제사 영감이 책을 읽어주기도 했다고한다.

서로 죽이고 죽이는 전쟁이지만, 저 두사람을 보면 어찌 서로를 원수라 하겠는가...
내가 본 저 두사람은 조선장수대 왜군이 아닌 한 아버지와 그의 아들로 보였으니..
통제사염감이 저러하다면, 그의 백성을 아끼는 마음 무엇으로 나타낼수 있겠는가!



3. 명의 도독 진린이 본 이순신


명나라의 황제 신종(만력제)은 조선에서 진린도독으로부터 한통의 서신을 받는다.


황제폐하 이곳 조선에서 전란이 끝나면 조선의 왕에게 명을 내리시어 조선국 통제사
이순신을 요동으로 오라 하게 하소서..


신(臣)이 본 이순신은 그지략이 매우 튀어날뿐만 아니라 그 성품과 또한 장수로 지녀야할
품덕을 고루 지닌 바 만일 조선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께서 귀히 여기신다면
우리 명(明)국의 화근인 저 오랑케(훗날청國)를 견제할수 있을뿐 아니라,
저 오랑케의 땅 모두를 우리의 명(明)국으로 귀속시킬 수 있을 것이옵니다.

 

혹여 황제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의 장수됨을 걱정하신다면
신(臣)이 간청하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은 전란이 일어나고 수년간
수십차례의 전투에서 단 한번도 패하지 않았음에도 조선의 국왕은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며 또한 조정대신들또한 이순신의 공적에 질투를 하여
수없이 이간질과 모함을 하였으며, 급기야는 통제사의 충의를 의심하여 결국에는
그를 조선수군통제사 지위를 빼앗아 백의종군에 임하게 하였나이다.

허나 통제사 이순신은 그러한 모함과 멸시에도 굴하지않고 국왕에게 충의 보였으니
이어찌 장수가 지녀야할 가장큰 덕목이라 하지 않을수 있겠나이까."
조선국왕은 원균에게 조선통제사 지위권을 주었으나 그 원균이 자만심으로 인하여
수백척에 달한 함대를 전멸케 하였고 단 10여척만이 남았으메
당황한 조선국왕은 이순신을 다시불러 조선수군통제사에게 봉했으나,
이순신은 단 한번의 불평없이 충의를 보여 10여척의 함대로 수백척의 왜선을 통쾌하게도
격파하였나이다.
허나 조선의 국왕과 조정대신들은 아직도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또다시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고 있나이다.

만일 전란이 끝이난다면 통제사 이순신의 그목숨은 바로 풍전등화가 될것이 뻔하며,
조정대신들과 국왕은 반드시 통제사 이순신을 해하려고 할 것입니다.

황제폐하 바라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의 목숨을 구명해주소서.
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의 신하로 두소서.
황제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에게 덕을 베푸신다면
통제사 이순신은 분명히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황제폐하게 충(忠)을 다할것이옵니다.
부디 통제사 이순신을 거두시어 저 북쪽의 오랑케(훗날의청국)를 견제케 하소서)."



4. 책의 저자인 쟝웨이링 교수가 본 이순신


1990년 3월 하북에서 제1차 중.일 합동 연구회(이순신)를 가졌다.


이순신???


내가 알고있는 이순신은 조선시대 임진왜란때 장수였던거 정도로 알고 있었다.
사실 이 연구회엔 나의 절친한 동료학자의 권유로 참석하였으며
그저 잠시나마 자리에 참석할 생각이었다.

사실 조선의 역사에 대해선 그다지 큰 관심이 없던터라,
나는 그저 일본교수진들의 말만 들을 뿐.....

그러한 내게 작으나마 충격적인 일이 있었다.
조명이 꺼지고 화면가득 보여지는게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거북선이라고 불리는 배였다.

저런 배가 400여년전에 있었단 말인가...(본것은 처음이었다)
나의 놀라움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일본 학자들은 임진왜란에 대해서 나와는 너무나 다른 시각으로 보고 있었다.
아무리 나라가 다르다지만... 그 시각의 차이는 너무나도 크고 말았던것이다..

더군다나 그차이는 중일간의 차이가 아니라 바로 조선이라는 나라를 보는것.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조선이 아닌 이순신이라는 한 인간을 보는 것이었다.

일본교수진들은 이 연구회를 이순신 이라고 붙엿다.
즉.. 임진왜란 자체를 이순신이라는 인물이 중심이되어서 바라보고 찾고 연구하고
가설을 붙이는 것이엇다.

이는 우리 중국 어느 누구에게도 연구해보지 않은 방법이었다.

나는 그 학술회가 끝나는데로 일본교수의 도움으로 이순신이란 인물에 대한
책자를 얻을수 있었다.

7권으로 이루어진 이순신 이라는 인물에 관한 책이었고.
나는 그 7권을 단 하루만에 다 읽고 말았으며,
책을 손에서 놓은뒤 내게 있어서 가느라한 한숨과 함께
어디선가 느껴지는 심장의 소리를 들을수 있었다.

 

이순신....

참으로 읽으면 읽을수록 수수께끼 같은 인물.

지금까지 우리 중국학자들은 임진왜란은 일본의 토요토미가 조선을 침략하였으며,
조선의 왕 선조는 그들을 막지못하고 의주로 몽진을 하여 우리 명나라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그 위기에서 벗어날수 있었으며,
그로 인해 명나라는 국력을 소비한 나머지 지금의 청에 의해 멸하고 만다.

이것은 우리 중국과. 한국, 북한.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도 별차이없이 나오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이날 연 학술회에선 이 모든 것을 흔들어버리는 아니 뒤엎는 가설을 내놓은것이다.
바로 이순신 이라는 이름으로.......



5. 장웨이링 교수가 말하는 우리의 거북선...


1997년 10월.

한번은 내게 북경대에서 초빙을 받아서 학생들과 토의를 한적이 있었다.
주제는 청나라의 멸망에 관해서 였다.

그래서 나는 한국에서 가져 온 거북선을 가지고 학생들에게 보여주며
이것이 무언지 아는 사람 있냐고 묻자 250명의 학생중 단 한명도 이것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답하였다.
어쩌면 역사학자인 나도 이 거북선을 이순신 인물에 대해서 연구하면서 처음 보았으니..
학생들이 모른다고 답하는건 어쩌면 무리는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학생들이 이 거북선을 자세히 볼 수 있도록 한사람씩 돌아가면서 볼 기회를 주고난 후..
나는 질문을 바꾸어서 왜 청나라가 망할수밖에 없었고
서양과 일본에게 전쟁에서 질수밖에 없었는지 질문을 던져보았다.

학생들은 각자의 생각에 대해서 발표를 하였으며 모두 맞는말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다시 질문을 바꾸어서 그렇다면 그당시 전쟁에서 여러분이 아는 영웅 중
단 한명 다시 태어나 청나라를 구할수있는 위인이 누구인가라고 묻자
학생들의 답변은 내가 예상하고 있던 그대로 였다.

항우.제갈공명.손자.관우......

나는 잠시 창너머를 바라보았고...
한참동안이나 내가 강단의 창너머 만 바라보자
이에 이상했는지 학생들은 왜 그러시냐고 물었다.

나는 이에 만일 지금 또다시 지금 중국이 청나라처럼 되었고
여러분들이 말한 영웅이 나타난다해도 결과는 마찬거지일거라고 답해 주자..
모두들 의아해했다.

그러자 한 학생이 손을들며 그렇다면 교수님께서는 어떤 위인 나와야 된다고 생각 하십니까?
라고 질문을 하였고.. 나는 그 질문에 거북선을 다시한번 학생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것은 여러분들이 생각하고 있는대로 배다.

지금부터 400년전에 만들어진 전투함.. 이 전투함을 만든 이순신...
400년전에 조선과 일본의 전생시 조선을 구한 이순신장군이야말로 중국을 구할
유일한 영웅이라고 나는 여러분에 말한다....

많은 학생들과 같이 참석한 많은 다른 교수들도 의아해 하기 시작하였고..
여기저기서 이순신이 누구냐고 서로 묻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여기서 간단히 임진왜란에대해서 30분정도 시간을 내서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일본과의 전쟁에서의 활약상을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내가 왜 이순신을 선택한지 아느냐고 물었으나 이 역시 학생중 단 한명도 알지못하였다.
단지 어느 한학생이 교수님 이순신은 해군아닙니까?
나는 그 학생의 말이 끝나기 전에 답해주었다.

바로 해군이기 때문에 청나라를 구할수 있는 것이다.
청나라가 망한건... 아편탓도있고.. 황제탓도 있다.. 정치적 이유도 맞다...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유능한 해군장교가 없었다는것이다.

조선수군장수 이순신은 5000명도 안대는 군사와 50척도 안대는 함대를 이끌고
40만의 왜군과 1300대의 일본함대와 맞서 싸워 단 한번의 패도 없이 모두 승리를 이끌어
조선을 구할 수 있었다.

당시 조선은 청국과 같은 처지였다... 당파싸움에 휩쌓여 있었고.. 병력이라야 5만도 안되는...
그러한 조선을 이순신장군이 지켜낸 것이다.
그리고 그 승리의 안에는 바로 이 거북선 전투함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러분들이 말한 영웅들은 모두 육지에서 뛰어난 자들이다.
그것은 우리 중국역사에는 세계에 내놀만한 수군장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중국은 대륙국가였다... 하지만 대륙만큼이나 우리 중국은 바다가 넓다.

그러자 한학생이 손을들며.. 교수님 그렇다면 주유가 있지 않읍니까? 라고 말하였고
나는 그에 질문에... 주유는 훌륭한 지휘관이다..
그러나 주유는 이순신 장군과는 격이 다르다....
주유는 양쯔강에서 활약한 장수지 진정한 해상지휘관은 아니다..

영국을 보라.. 네덜란드를보라 스페인을보라..
그들은 나라는 작아도 바다를 가졌기에 그리고 그바다를 점령하였기에
세계 최고의 국가로 일어설수 있었다...
그와 반대로 청나라는 거대한 대륙국가 이였지만 바다를 몰랐기에 무너지고 만 것이다.

여기 거북선을 보라...
누가 이 배가 400년전에 만들어졌다고 믿겠는가?

여러분들은 눈을 떠야 할것이다. 바다로 바다로 눈을 떠야 할것이다.
그리고 나는 학생들에게 일본에서 열렸던 임진왜란 모의전쟁에서
만일 이순신 장군이 일본장수였다면 당시 명나라는 물론이고
태국과 베트남 인도네시 아까지 일본국에 점령되었다... 라는 결과를 말해주자
모두들 놀라는 눈치였다.

세계 어느국가도 한 인물의 존재에 따라서 이렇게 역사가 뒤바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한번 거북선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나는 왜 이순신이 위대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덧붙여 설명 해 주었다.

이 거북선은 내가 여러분에게 이순신 장군이 만들었다고 했으나,
사실은 그가 직접 만든 것은 아니었다.
이 거북선은 나대용 이라는 사람이 만든 것이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이 있었기에 거북선을 생각하고 만들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조선수군은 인진왜란 1년전 만해도 허약한 병사들이었으나
그 허약한 병사를 단 1년만에 40만대군과 1300척을 거느린 일본군과 맞서 이길수 있는
군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는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리고 나서도 1시간 정도 더 이순신 장군에 대한 삶과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기를 해주고
강의를'끝마칠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강의가 끝났을때 난 처음으로 전 학생이 일어나며 기립박수를 받아 보았다...
어떤 학생은 눈물을 흘리기까지도 하면서....

내가 처음 이순신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되었을 때 그 감정을
나의 제자들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
쟝웨이린 교수님은 1989년에 고구려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는 일을 맡는

주요 책임자중 한분이셨으며, 1990년 이 학술회를 시작으로해서 연구하시던 중 1995년

고구려 역사편입하는 작업에서 손수 물러나셨다고 한다

쟝웨이린 교수님은 이 책 머릿말에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셨다.


역사학자란 후세사람들에게 부끄러운 일을 해서는 안된다..

역사학자란 두가지의 부끄러움이 있다.

한가지는 숨기는것이다.

히틀러가 200만 유태인을 죽인것보다 그 역사를 감추려하는 역사학자들이 더 부끄러운 것이다.

나의 조국의 부끄러움보다 역사앞에서 그 진실을 숨길 때 그것이 참으로 부끄러운 짓이다.

또 한가지의 부끄러움을 말한다면,

진정한 위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찾지못하는 역사학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진정한 위인은 자기가족만을 위해서 자신의 조국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다.

진전한 위인이란 모든 만인을 위하는 사람이 바로 진정한 위인이며..

나는 그 위인을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6. 일본의 아리모토라는 역사가가 본 이순신


세계의 전쟁영웅은 피로만들어진다.

전쟁영웅은 만인들에게 우러러 보게끔 만든다.

알랙산더대왕도 그러했고 케사르도 그러했고,징키스칸도 그러했고,나폴레옹도 그러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우리에게 고개를 숙이게 한다.

우리 자신을 부끄럽게 한다.

이러한 표현이 맞는 지는 모르겠다.


나는 크리스챤인이다.

십자가에 못박혀 있는 그분.... 이순신 장군을 볼때면 문득 그분이 떠오른다....

두 분 다 나의 고개를 숙이게 한다.

이순신 장군은 단순히 조선을 구한 영웅이 아니었다.

또한 이순신 장군은 피로 혁명을 일으키기보다는 바로 십자가를 선택하셨다.

모든 것을 홀로 짊어지시고 가셨다...2000년전의 한 청년이 그래햇듯이..


이순신 장군은 그 처절한 전쟁속에서 忠.孝.義.愛.善 을 가르키신 분이셧다.

그러고 보니 한국사람들은 이순신장군을 영웅 이순신이라 말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한다.


"성웅 이순신"



7. 장군님의 혁명과 죽음에 대한 논란

1996.4월 이케다 하야토 교수의 [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중에서 14부인

(이순신의 혁명과 죽음) 중에서 .....

<혁명과 죽음>

이순신의 혁명..

우리들은 왜 이순신은 혁명을 하지 않고 죽음을 선택 하였을까? 하는 의구심을 품어보았다.

수많은 전공에도 불구하고 조선조정으로부터의 의심과 질투를 받은 그에게는

단 한번의 혁명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먼저, 우린 만일 이순신장군이 혁명을 일으켰다면 과연 성공하였을까? 하는 부분부터

토론을 해보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 12명의 학자 모두 이순신장군은 혁명에 성공과 함께

조선의 멸(滅)과 새로운 이순신의 나라가 세워졌을 거라고 의견을 모았다.

이순신 장군에겐 2만여명의 수군과 약 5천여명으로 추정대는 의병.

그리고 전라도와 충청이남. 경상도부근에 이순신을 따르는 군(軍)의 수는 1만여명에 이른다.

총 3만 5천여명에 다다르고 이 군대에 대응할 조선의 군대는 없다고 봐야 할것이다.

이와 함께 이순신에겐 두가지의 또다른 무기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민심과 명분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명나라의 군대였다.

명나라 군대 역시 이순신에 대한 반감이 컸으며,

명나라의 장수 유정은 바로 곧 명나라의 황제를 대신 하는것이기에

이순신에겐 유정을 넘어서야 1차적인 혁명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며.

혁명 후 명나라 황제의 질타를 과연 극복할 수 있느냐 하는것이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대답은 너무나도 간단하였다.


조선의 선조는 이순신이 혁명을 일으키자 바로 명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구원을 청했을 것이다.
명나라의 황제가 도와준다면 이순신의 군대는 두려워 하지 않아도 될것이라 생각했기에...

하지만...

조선의 왕 선조는 자신을 도와줄 군대가 올거라 생각 했지만,

뜻밖에도 명나라에서는 군대가 아닌 사신이 온다.

조선 조정으로가 아닌 명나라의 장수 유정에게........

명나라의 황제는 조선의 왕 선조가 아닌 이순신 통제사의 편을 들어 준것이다. 왜였을까?


이 역시 답은 간단하였다.

그 당시 명나라의 국력은 임진왜란(정유)으로 인하여 국력이 크게 약하게 되었으며,

게다가 북으로의 오랑케(훗날 청)의 견제가 심해져 있었으니..

전란이 채 끝나기도전에 또한번 강력한 이순신군대와 전쟁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명나라는 새로운 전략을 세울수밖에 없었다.

(이미 조선의 민심역시 이순신에게 있는것을 알기에) 바로 이순신에게 손을 들어주는것..

이것은 또한 명나라에게도 커다란 이득인 것이다...


힘없는 선조가 조선의 왕이 되기 보다는

강력한 군대를 가진 이순신을 도와 그에게 왕의 자리를 주고

그 이순신의 군대로 하여금 후에 명(明)을 위협하는 오랑케를 견제 하자는것이다.


명나라의 문록(文錄)을 보면. 조선으로 건너간 명나라 장수 진린이 명나라 황제에게

올린 글에 의하면..


폐하 이 전란이 끝나면 즉시 조선의 수군 통제사 이순신으로 하여금 요동으로 부르소서
그로하여금 북의 오랑케를 견제토록 하소서..
이순신통제사는 능히 우리 명(明)의 후환을 없애줄것이라 신(臣) 진린은 굳게 믿사옵니다....
등등)


이에 명(明)에서는 전란이 끝나면 이순신으로 하여금 그의 군대를 요동으로이동시키자라는

대신들의 논의(論議)가 있었음 알 수 있었다.

이는 이미 명나라에서는 전란이 끝나면 조선의왕 선조에게 우리 명(明)의 도움을 받았으니

조선도 명(明)을 도우라... 이순신으로 하여금 요동으로 오라하라.


이미 각본은 짜여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이 혁명을 하든 안하든... 이미 명나라에서는 훗날의 시나리오를 작성하고 있었던것이다.

그런데.....

이순신이 혁명이 아닌 죽음을 선택한것이었다.

왜였을까?

중국역사 조선의역사.. 아니 고금을 통틀어서 이와 비슷한일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일에는 반드시 쿠테타든 혁명이든 일어나게 마련이다.

아니면 토사구팽이라도....그런데 이순신은 쿠테타도 혁명도 토사구팽도 모두 거절하였다.

이순신은 오직 죽음만을 선택 한것이었다.

이순신 과연 그는 모든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이 내용에서는 명나라가 이순신장군님을 끌어드려서 북의 오랑캐(훗날 청나라)을

견제시킬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들은 단순히 이순신 장군께서 혁명을 이룩하면

조선이 발전되었을 거라고 단정을 내리곤 한다...

물론 그럴수도 있었겠지만 국제정세란 매우 이해관계가 복잡한 일이다..

이순신 장군께서는 어쩌면 그러한 모든것을 다 아셨는지도 모릅니다.

만일 이순신장군이 혁명을 일으키고 명나라가 이순신을 도와줘서 낭떠러지에 몰린

조선왕선조와 조정대신(이순신의 반대파세력)들이 뜻밖에도 일본과 손을 잡게되고

비밀협약을한다면.. 과연 조선은 어떻해 되었을까 하는?

혹시.. 이순신장군은 그러한 모든 과정까지도 생각하지않았을까...

왜냐하면 이순신장군은 너무나도 치밀한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드라마를보고 흥분해서 가설을 내세우지만...

이순신장군님은 끝까지 냉정함을 잃지 않고

내가 무엇을 해야 되는가를 정확이 아셨던 분이십니다.

400년이 지난 지금 장군님께 질문을 던져 봅니다

장군님 당신은 다알고 계셨던 겁니까?

그리도 두려우셨읍니까?

조선이 피로 물들여질 거라는 걱정이 그리도 두려우셨읍니까?

그래서 죽음을 선택하신건가요?


2000년전의 예수 그리스도처럼... 장군님도 홀로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셨던 건가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며 모든일을 주관 하셨지만

미약한 인간의 몸이셨던 장군님께서는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였으며... 얼마나 외로웠을까...

당신 앞에서 한줄기 눈물을 흘립니다...장군~~


이순신 장군님에대한 책이 총32권...


그것도 한국 학자가 아닌 일본과 중국학자들에 의해 저서가 된 책......


그들은 우리를 알려고 하는데....


적어도 우린 저들을 모른다고 해도 우리역사에 대해서 만큼은 더 알았으면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그분에 대해서 알고 있는지...

그분이 우리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씀이 무엇이 었는지...

 

 

출처: http://blog.daum.net/interlee/tb/2268971에 블루문님의 글

진주박물관에서 상영되고 있는 3D 애니메이션

 

'진주대첩'의 스크린 샷 입니다.

 

 진주 대첩 포스터

 

애니 '진주대첩'은 작년부터 상영되고 있는 것이지만,

최근 들어 새삼 네티즌들의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임진왜란 3대 대첩 가운데 하나인 ‘진주대첩

진주대첩은 1592년(선조 25년) 10월 5일,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가 지휘하는 왜군 약 2만 명이 진주성을 공격하자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이 3800명의 조선군을 이끌고 대접전을 펼친 끝에

왜군을 괴멸시킨 역사에 빛나는 전투입니다.

한산대첩 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립니다.

'진주대첩'은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진주대첩'이 방영된 뒤 한때 포털 사이트 인기검색어 1위에 오르는 등 네티즌들의 관심을 모았습니다.

당시 '진주대첩'을 검색하면 '3D 애니메이션 진주대첩'이 간혹 눈에 띄는 정도였으나 지금은 거의 절반에 육박할 정도입니다.

드라마에 힘입어 '드림한스'에서 제작한 애니메이션이 다시 화제를 모으고 있는 것입니다.


드림한스의 한윤영씨는 "3D 애니메이션 '진주대첩'은 지난해 12월15일부터 국립진주박물관에서 1시간에 한번씩 방영되고 있으며,무기한 상영예정"이라고 합니다.


다음은 3D 애니메이션 '진주대첩'의 스틸 컷 입니다.


백병전 조선군과 왜군


백병전 조선군과 왜군


비격진 폭파
 
진주성 북문을 공격 중인 왜군과 성위에서 지휘하는 조선장군 
 
거북선 와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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