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스토의 명성과 의미
프랑스에서는 세계적인 유명 인사가 많지만 프랑스인 중에서 가장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은 드골 대통령도 아니고 피에르 가르텡도 아닌 쿠스토라고 선진국의 언론들은 이구동성으로 합의한다,
그는 금세기에 존재하는 르네상스인이라고 말하여 지며,
수많은 전문가의 호칭들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다이버, 비행사, 항해사, 함장(commander), 발명가, 혁신가(Innovator), 해양학자, 과학자, 작가. 영화제작자, 극우 환경주의자, 사업가 등등.....
서구 세계에서는 쿠스토가 그렇게 유명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옛날은 물론 지금도 별로 유명하지 않다.
그가 해양연구와 보호를 위하여 기금을 만들기 위해 창설한 쿠스토 소사이어티(Cousteau Society)는 유엔의 호응을 받아가면서 세계 각국 35만명의 회원들로부터 기부금을 받고 있는 정도이지만,
우리나라 사회에서는 쿠스토의 이름이 낮설기만 하다.
한국사람들이 쿠스토를 모르는 이유는 쿠스토의 업적이 모두 바다에 관한 것들이었고,
우리사회는 바다에 관해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사회의 언론 매체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역시 바다에는 관심이 없었으므로 쿠스토의 위대한 업적들이 서구세계의 매스컴을 흔들어도 취재 촉각에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해양을 무대로 식민지 쟁탈전을 벌이고 해양에서의 강약이 국가 운명을 좌우했던 서구인들의 감각은 해양과학의 경쟁과 수중세계의 선점 경쟁이 제3형태의 식민지 경쟁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바다의 이벤트에 관심이 집중되게 된다.
1970년대에는 한국 TV에도 쿠스토의 해저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어 대단한 시청율을 나타낸 일이 있었지만,
그 TV영화를 보고 나서 쿠스토를 알게 된 사람 역시 거의 없었다고 한다.
불어를 모르면 읽기가 어려운 Jacques Yves Cousteau라는 로마자가 여러 이름들 틈에 섞여 한글 자막도 없이 영화의 피날레 장면에 잠간 비쳐졌을 뿐 쿠스토에 대해 한마디의 해설이나 자막도 소개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모든 언론매체들도 공기통을 산소통이라고 번역했던 시절이니까....
1997년 쿠스토가 서거하자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을 위시해서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고 쿠바의 카스트로까지 조의를 발표하는 등 세계가 그의 타계를 애도하였으며,
AP통신은 1997년도에 타계한 세계 10대 인물에 덩샤오핑, 다이애너, 테레사수녀 등과 함께 그를 선정 발표하였다.
쿠스토가 얼마나 많은 큰 일을 했기에 그토록 유명한가와 관계없이 우리 스쿠바 다이버들은 쿠스토와 직접적이며 절대적인 관계에 있다.
그는 "옛날 옛적에 스쿠바를 발명한 사람이 있었는데 ...." 정도로 역사 책에나 나오는 먼 옛시대의 사람이 아니며,
우리 세대와 이어진 시대를 함께 살다가 조금 먼저 간 사람이므로 우리의 현재 속에 그대로 담겨져 있어야 할 위인이다.
따라서, 그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다이빙에 모든 것을 아는 척 한다면 부끄러운 일이 될 것이다.
덩치가 매우 커진 지금의 다이버 사회에서는 쿠스토가 다이빙 교과서에 짧막하게 설명된 것과 같이 스쿠바를 발명한 사람 정도로 알고 있거나,
이것 조차도 기억이 나지 않아 쿠스토를 아예 모르는 다이버들도 많다.
현대에 레크리에이션을 즐기는 사람들은 스쿠바를 누가 발명했는지 반드시 알아야 할 의무는 없겠으나,
그가 단순히 기계를 발명한 발명가가 아니라 거의 혼자의 노력으로 인간의 꿈 한가지를 실현했다는 점에서 그에 관해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오늘날의 스쿠바 다이버들은 수중유영 그 자체가 당연한 것으로 수중세계를 돌아다니고 있지만,
스쿠바가 없던 그 시대에 그것은 기적이거나 망상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슈퍼맨 또는 피터팬의 꿈을 꾼다.
슈퍼맨이나 피터팬의 공중유영이 얼마나 픽션적이고 허망된 것인가?
그래서 꿈이 아닌가?
수중세계를 유영하는 것이 바로 그런 꿈의 실현인데,
사람들은 이것이 현실화되니까 그것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쿠스토는 엔지니어 "에밀 가냥"이란 사람과 공동으로 스쿠바를 발명했지만,
스쿠바의 꽃을 피우게 한 것도 쿠스토의 빛나는 활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쿠스토는 스쿠바가 군사적으로 기여하게 했으며,
해양탐사 방법의 신기원을 만들었고,
우주인이 무중력 유영연습을 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했으며,
인간에게 또 하나의 스포츠와 리크리에이션을 제공한 것이다.
그는 평생 120편의 해저 다큐멘터리 영화와 50여권의 저서를 통해 해저세계의 신비를 알리는 동시에 죽어가고 있는 해양을 고발하며 환경보호주의를 이끌었다.
그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본 사람들의 숫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으며,
그 또한 이로 인해 억만장자가 되기도 했다.
그의 마지막 저서로 출간될 예정에 있는 "The Man, the Octopus and the Orchid"는 그의 평생 경험을 토대로 해양오염, 핵에너지, 과잉어획, 삼림훼손. 오존고갈 등에 대한 통렬한 비판으로 가득차 있다고 한다.
쿠스토는 해양학을 학교에서 배운 바 없으며 학위도 없다.
학위를 소지한 일부 해양학자들은 그를 무시해 보려고 하였지만,
평생을 통해 쿠스토가 이루어 놓은 업적들은 그들의 비판을 전혀 무의미하게 만든다고,
타임지(Times '97년 7월 7일 발행)는 쓰고 있다.
그는 1960년대에 인간이 해저에 기지를 짓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실험을 3차례 했다.
이 실험의 성공은 프랑스의 영광이었다.
미국도 소련도 하지 못한 고난도 실험을 프랑스가 했기 때문이다.
인공위성 발사에서 소련에게 선수를 빼앗겼던 미국이 깜짝 놀라 서둘러서 추격해 왔듯이
지구 내면의 세계로 인공위성을 발사하는 과학적 거사에서는 미국이 프랑스에게 선수를 빼앗긴 다음에 또 부랴부랴 쫓아 왔다.
이런 과학적 이벤트는 국력의 상징이자 군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뒤쫓은 미국은 거대한 미해군이 풍부한 인적 물적 재원을 바탕으로 실험을 수행한 것에 반하여,
프랑스는 개인 쿠스토가 해냈으니,
쿠스토는 경쟁국들에게 간단한 존재가 아니었다.
세계 각국의 해저개발 회사들 명단 중에서 프랑스의 코멕스가 강력한 라이벌인 것도 쿠스토 같은 해양 파이오니아가 프랑스인이라는 사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쿠스토는 군 시절에는 그의 전용 선박 엘리 모니에르호로,
그 이후에는 칼립소호를 타고 평생 세계의 바다를 탐험했으며,
에너지를 절약하면서 공해가 없는 선박 엘사이어니호를 진수시켜서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우리 개개인들에게 더욱 흥미있는 관심거리는 그가 바다로부터 명예와 부를 동시에 독차지했다는 성공담이다.
미국의 유명한 해저 보물 발굴가 멜피셔(Melfisher)는 "자고로 바다를 이용하여 명예나 부를 얻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쿠스토처럼 바다에서 명예와 부를 동시에 건진 사람은 역사에 없었다." 라고 부러워했다.
쿠스토의 호칭 중에 "사업가"의 타이틀이 있는 것이 바로 그 이유이다.
쿠스토는 바다에서도 신데렐라의 꿈을 실현할 수 있음을 우리 다이버들에게 교훈으로 남겨 주었다.!!!
쿠스토의 생애
잭 이브 쿠스토(불어로는 :쟈끄 이브 꾸스또)는 1910년 6월 11일 프랑스 보르도(Bordeaux) 근처의 생 앙드레 드 뀌브작끄(St. Andre de Cubzac)마을에서 태어나...
1920년 개인비서로 일하게 된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이사하여 쿠스토 나이 13세때 다시 프랑스로 돌아왔다.
쿠스토는 이 때 푼돈을 저축하여 소형 무비 카메라를 구입...
이런 행동은 그가 평생 무비카메라를 만질 것임을 예고.
1930년에는 브레스트(Brest)에 있는 프랑스 해군사관 학교에 입학,
재학시절 2년간 항해훈련 중에 방문하는 항구마다 무비카메라 촬영을 하는 열성을....
그 후 해군 비행학교에 지원하여 파일럿 교육을 받았으나,
교통사고로 양팔과 여러 개의 가슴뼈가 골절되는 중상으로 파일럿 신체검사에 불합격의 아픔을 감수해야 했다.
그는 팔 근육을 회복시키려 수영을 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그를 평생 바다에서 생활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물안경을 쓰고 바다 속을 본 순간 그는 바다에 미처 그는 자신의 저서인 "침묵의 세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때때로 사람들은 운 좋게 인생이 뒤바뀐 것을 알게되면 그 옛날은 모두 잊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 무턱대고 외길로 빠져든다. 내가 바다에 눈뜨게 되었던 그 해 여름 바로 그와 같은 사건이 나에게도 일어났다."
쿠스토는 아내 카내 시몬(1990년 모나코에서 작고) 사이에 장남 미첼 쿠스토(1938)와 차남 필립 쿠스토(1940)를 두었다.
두 아들 모두 유명한 다이버였으나 필립은 1979년 6월 28일 칼립소호의 헬기(별명:날아다니는 칼립소) 추락사고로 사망했다.
쿠스토는 1997년 6월 25일 아침,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서거하여 87년의 생을 마감했다.
연대별 활동
1930년대에 뚤롱 해군기지에 살면서 다이빙용 고글과 스노클을 만들어 실험.
1936년 무비카메라용 수중 하우징 제작.
쿠스토는 물속에서 날아 다닐 수 있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파리에 있는 유명한 가스회사 에어 리퀴드를 찾아가 엔지니어 에밀 가냥(Emile Gagnan)을 만남으로서....
스쿠바가 탄생되었으며...
쿠스토는 이것을 "아콰렁 (Aqua-Lung)"이라는 상품명으로 1943년 특허를....
에어 리퀴드 회사는 쿠스토와 함께 "라 스피로 테크니크' 라는 자회사를 창립,
아콰렁을 생산.
2차대전 종전 직후 해군에 해저탐사대를 조직하여 스쿠바로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전쟁 중 활약한 레지스탕스 운동으로 훈장(Cheval!ier de la Legiond' Honneur)을 받음....
1950년 이미 유명해진 쿠스토에게 영국인 후원자가 360톤 크기 소해정(mine sweeper) 칼립소(Calypso)호를 기증.
(칼립소호는 1942년 미국에서 건조한 영국해군 소유의 소해정.)
*"칼립소"라는 이름은 호머의 오딧세이에 나오는 반신반인의 아름다운 소녀 모습을 하고 있는 해신의 이름.
쿠스토는 칼립소를 탐사선으로 개조,
46년간 타고 다님.
칼립소는 1996년 1월 8일 싱가포르에서 침몰되어 1월 25일 인양되나.
사용이 불가능하게 되어 칼립소 Ⅱ를 건조할 계획으로....
1951년 쿠스토는 앙드레 라방(Andre Laban)과 합작으로 최초의 TV방송용 수중촬영 시스템을 완성.
1956년 발표된 수중 다큐멘터리 "침묵의 세계(The Silent World)"는 칸느 영화제의 황금종려상, 오스카상 수상.
1957년에 해군 함장직(Captain of Corvette)에서 은퇴
1957년부터 1988년까지 모나코 해양박물관 관장직 역임.
<모나코 왕실은 쿠스토의 열렬한 팬,>
1959년 엔지리어 쟝 몰라르(Jean Mollard)와 공동으로 비행접시형 잠수정 다이빙 소우저(Diving Saucer)제작 두명이 업드려 탑승하여 350미터 해저까지 내려가 촬영에 성공.
그의 해저기지 실험은
1962년 콘셀프(Conself) I실험,
1963년 콘셀프 II실험,
1965년 콘셀프 III실험으로 계속,
3차 실험에서 6명의 인간이 3주일간 110미터 수심 속의 기지에서 살다 나오는데 성공,
이 때 헬륨-산소의 흔합기체 사용, 수많은 수중조사 병행.
1961년부터 본격적인 세계 해양탐사 시작,
아메리칸 드림에도 도전.
ABC. PBS, 터너방송사 등과 다큐멘터리 계약을 맺고 촬영 항해,
제작된 작품은 즉시 공전의 대힛트.
(1962년 "The Living Sea"제작, 1964년 "World Without Sun"제작)
1968년부터 1976년까지는 독립적으로 제작한 "The Undersea World of Jacques Cousteau" 시리즈가 세계 TV에서 인기틀 얻었다....
(대표작: Voyage to the Edge of the World, 1975)
1973년부터 "Discovering the World"시리즈를 제작.
(90년대 초 "The Great Rivers" 시리즈 제작, 이렇게 해서 그의 작품은 모두 120편이나.....)
1973년 해양연구 및 보호를 위한 모금단체 쿠스토 소사이어티를 창설...
(The Cousteau Society: 뉴욕, 파리, 호주에 사무실이 있음).
1994년 쿠스토 소사이어티가 작성한 미래세대의 권리장전(Bill of Rights for Future Generations)을 유엔총회에서 채택.
1980년 뚜시앙 말라바르(Lucien Malavard)교수, 베르뜨랑 샤리에 선장(Bertrand Chanier Capt.)과 공동으로 무공해 선박 연구 시작,
1983년 제1차 turbosail방식 선박제조.
1985년 최종적인 엘사이어니(Alcyone)호 완성.
그후 쿠스토팀은 칼립소와 엘사이어니 두척의 탐사선으로 지구 해양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녀...
쿠스토의 아이디어와 사업은 실패도........
미래형 잠수함 아르지로넷트(Argyronette)의 아이디어는 프랑스 국고 1천만 달러를 낭비..,
1989년에 파리에 세운 쿠스토 해양공원은 3년 뒤에 파산,
그가 창설한 쿠스토 소사이어티는 아직도 건재하지만, 내분이 있어 1992년 아들 미첼 쿠스토가 밀려나왔다.
쿠스토의 수상기록.
1966 : NOGI상. 미국 National Academy of Science회원 자격획득.
1977 : 유엔 국제 환경보호상
1985 : 미대통령 Medal of Freedom
1987 : Television Academy of Fame(미국)
1987 : Interational Council of the National Academy of Television
Arts and Sciences의 'Founders' Award
1988 : 유엔 환경프로그램(UNEP)의 환경보호상
내쇼날 지오그래픽의 Centennial Award
하버드, 캘리포니아대, 스페인 등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 취득.
1989 : DEMA상. 프랑스 최고 명예 Academie Francaise에 공식 등록.
스쿠바 장비 발명자 "잭 이브 쿠스토"의 생애 (저자: 강대수)
(이기사는 격월간지 "스쿠바다이버" 97.7/8호와 98년도 매스컴 뉴스를 취합 작성한 내용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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