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부학 교수의 통렬한 해설…

박제의 ‘그림 정독’|국민일보|2007-10-12

 

그림 정독/박제 지음/아트북스


미지의 세계를 향한 인간의 동경과 도전, 그리고 실패를 상징하는 '이카루스'.

밀랍으로 만든 날개를 달고 하늘 높이 오르려 했던 소년은 뜨거운 태양 빛에 날개가 녹아 결국 바다로 추락하고 만다.

북유럽 르네상스 미술의 거장 피터르 브뤼헐은 이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아 걸작을 남겼다.

제목은 '이카루스의 추락'.

그런데 이 그림을 처음 본 사람은 황당해 한다.

밀랍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는 소년의 모습이라고는 두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기 때문.

다만 오른쪽 아래 구석에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두 다리만 그려져 있을 뿐이다.

"브뤼헐이 살았던 16세기 유럽에서 천재적 발명으로 신의 영역 가까이 가려고 했던 이카루스의 행위는 결코 영웅적이거나 선구적이지 않았다.

그것은 하늘에 닿고자 하는 어리석은 욕망으로 쌓았던 바벨탑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 시대의 이카루스는 인간에게 주어진 본분을 잊어버리고 신을 거스른 인물로 받아 들여졌다.

거기에 대해 동정할 가치 조차 없다는 16세기의 종교적 인식이 이 그림 속에 들어있다."(37쪽)

 

'그림 정독'을 읽다 보면 의과대학 수업이 연상된다.

저자는 능수능란한 해부학 교수다.

독자는 풋내기 의대생.

'카데바'(해부용 시신)는 유명 그림 여섯 점이다.

 

교수는 노련한 솜씨로 메스를 죽죽 그어가며 피부 아래 감춰졌던 뼈와 살을 드러낸다.

캔버스의 벌어진 틈 사이로 삐져 나오는 것은 당대를 지배했던 세계관이며 화가의 신산한 삶이다.

 

'선택과 집중' 역시 이 책의 미덕이다.

단 하나의 그림에 원고지 400장이 넘는 분량의 해설을 쏟아낸다.

그렇다고 장광설을 늘어 놓는 것도 아니다.

 

폴 고갱의 '마나오 투파파우'를 보자.

이 그림은 고갱이 몇 번이고 반복해서 그릴 정도로 애착을 가졌다.

화면을 꽉 채우도록 가로 누운 알몸의 원주민 처녀와 검은 옷에 모자를 뒤집어쓰고 음산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는 의문의 인물이 인상적이다.

"이 그림은 죽음의 혼이 어두운 밤중에 자기에게 나타났다고 믿고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타히티 처녀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두 손을 들고, 등을 보인 자세는 관음증을 불러 일으킨다.

주인공은 인격을 가진 한 여성으로 선보여진 게 아니었다.

이국 풍습의 맛을 보여 주고 새로운 재미를 가져다 주는 단순한 노리개로 다뤄졌음을 숨길 수 없다."(198쪽)

 

네덜란드 화가 판 데르 베이던이 그린 '최후의 심판'은 백년전쟁을 배경으로 매우 극적이고 강렬한 세계관을 보여준다.

유럽의 어지러운 정세가 고스란히 반영된 그림에는 내세를 기원하며 혹독한 현실을 견뎌야 했던 민초들의 고단한 삶이 녹아 있다.

"'최후의 심판'을 대하면 시간이 열린다.

이미 띠끌도 없이 사라져 버린 오래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과 생각과 바람이 그 속에 들어있다.

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살아서 육신의 세계를 , 죽어서 영혼의 세계를 가지는 인간의 삶이 주마등처럼 돌아간다.

백년의 전쟁이 불러온 죽음과 삶이, 고달팠던 시대의 뒷모습이 새겨져 있다."(294쪽)

 

김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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