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바로 세우자 _ 중국의 동북공정, 단군조선 부정하는 한국정부와 사학계가 더 큰 문제
 

 
 1990년대에 돌변한 중국
 중국대륙에는 진시황이 지나[漢族]의 통일을 이루기 전까지 ‘통일된 중국’이라는 개념이 없었고, 그 당시까지 동북아는 한민족의 조상인 동이족이 지배하였다.
 
 중국정통의 역사서 ‘25사(史)’ 가운데 『사기』나 『후한서』, 『삼국지』 등을 비롯한 제사서는 우리민족을 「조선열전」이나 「동이전」에 따로 두어 지나족과 독립된 한민족으로 기록해 왔다.
 
 모택동 주석이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한 이후에도, 교과서는 물론 정치인도 고조선, 고구려, 발해가 고대 한국의 국가라고 쓰거나 말했다. 주은래 수상은 1963년 고구려나 발해가 한민족이 세운 나라라고 말했으며, 1950년대의 중국 교과서 『세계중세기사』, 1960년 주일량이 쓴 『세계통사』, 1981년 출판된 『중학 세계역사』도 고구려나 발해가 조선반도 북부의 독립된 국가라고 쓰고 있다. 길림성 연변대학 교수들이 쓴 역사책은 1994년까지도 고구려는 당연히 한국사라고 기술하였다.
 
 그러다가 중국은 1998년에 ‘중국사회과학원 변강사지 연구중심’에서 『중국고구려사』를 펴내고 2002년부터 3조원을 들여 고구려, 발해, 고려는 물론 고조선사도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역사침탈 행위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중국 주류사학자인 북경대 송성유(宋成有) 교수는 역사 당시 환경에서 역사를 복원하는 역사주의 입장에서 “고구려는 중국의 역사가 아니라 외국의 역사다”라고 말하고, “고구려는 낙랑, 대방, 현도, 요동군까지 자신들의 치하로 삼았다”고 기술했다.
 
 
 동북공정 목적은?
 그러면 중국의 의도는 무엇인가? 56개 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국가인 중국은 혈연보다는 땅에 중점을 두어 생각한다.
 
 첫째로, 그 영토 안의 나라역사는 모두 중국사로 보고 제국주의적 역사왜곡에 나선 것이다. 중화제국의 꿈이 있는 듯하다. 지금 중국은 제주도 남단의 이어도까지 삼킬 야심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하여 중국은 이미 주변의 제국가에 대하여 공정(공작)을 마치고, 끝으로 만주와 한반도에 눈을 돌린 것이다. 북부공정(내몽골을 중국에 편입), 서부공정(위구르에 대한 서북공정, 티베트에 대한 서남공정), 남부공정(베트남…) 등이 그 예이다.
 
 둘째로, 우리나라와 관련하여, 국제법상 우리 영토인 간도에 대한 한국의 반환요구를 막고(간도가 반환되면 우리나라는 6천리 금수강산이 됨), 만일의 북한정권 붕괴시 등 유사시에 연고권을 주장하며, 국제법상 국제분쟁시 관리권이 있는 UN 안보리 상임이사국임을 이용하여 영토를 차지하고, 중국내 조선족의 독립이나 한반도와의 관계에서 나오는 중국분열을 막으려는 등 다목적 카드라고 말할 수 있다.
 
 중국은 20세기 초까지만 하여도 만주를 관외대황(關外大荒)이라 하여 중국 밖의 버려진 땅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팽창주의와 탈북자문제, 소수민족문제, 경제정책 등을 생각하여 만주가 중국땅이라는 것을 확실히 하고자 하는 것 같다.
 

 
 한국정부는 왜 소극적으로 대응할까?
 그러면 한국정부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한국은 역사주권과 민족의 정체성을 갖고 역사적 진실에 바탕을 두어 영토전쟁에 대비한 정치논리로 대항해야 했다. 그런데 중국의 동북공정 프로젝트에 의해 벌어진 한·중 역사전쟁에서 한국은 제정신을 못 차렸다. 한국의 강단사학자들은 양심이 없으며 사대식민사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정부는 눈치외교만 강조하다가 뒤통수를 얻어맞고 쩔쩔매는 꼴이 되었다.
 
 한국정부는 첫째, 국민의 생명과 영토 그리고 역사를 보위해야 하는데, 자주의식 결핍과 민족정기 부재로 중국 눈치만 보며 국가통치의 중심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북한도 마찬가지다. 주체사상을 얘기하면서도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및 고구려 유물유적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지정과 동북공정에 대하여 제대로 된 정부차원의 대책이 없었다.
 
 둘째, 중국역사 침탈에 대한 대응논리 개발과 그에 따르는 외교적 노력이 따라야 하는데, 역사왜곡을 바로 잡으려 하지 않고 속수무책으로 중국에 대하여 저자세외교로 일관했다. 티베트의 성자 달라이 라마가 방한하겠다고 비자를 신청했으나 중국 눈치보기 등으로 입국을 허가하지 않은 것도 그 궤를 같이한다. 정부는 2004년 8월 ‘한국고대사 정치쟁점화 금지’ 구두 양해 이후 2년간 허송세월만 보냈을 뿐, 정치적 외교적 대응을 전혀 하지 않고 동북공정 과정을 알면서도 중국과의 마찰을 우려해 여러 문제의 은폐를 기도했다고 9월 7일 김양수 의원이 말했다.
 
 셋째, 정부는 국민들이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도록 국사학, 국어학, 국토학 등 국학에 대한 관심을 일깨우고, 국학교육을 강화하여 한민족의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해야 하는데, 일제잔재 청산에 실패하고 또 고대사를 정립하지 못하여, 그렇게 하지 못했다.
 
 넷째, 정부는 한·중 역사전쟁이 불붙자 연간 100억원씩 투자되는 ‘고구려 연구재단’을 만들었으나, 그 지도부가 일제식민사학의 거두인 이병도 교수와 신석호 교수의 제자김정○, 최광○, 노태○ 씨 등이어서 민족자주사관에 입각한 인사로 구성되길 바라는 국민을 열망을 외면하고 말았다. 또 2년간 60권의 책을 졸속으로 발간한 고구려 연구재단을 통폐합한 ‘동북아 연구재단’의 면면을 보면, 김모 이사장 역시 일본제국주의 지원을 받아 연구한 학자이며, 20여명의 이사 가운데 제대로 민족자주사학을 연구한 사람이 드물어, 현 정부가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문제를 해결하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는지조차도 불투명하다.
 
 또한 중국의 동북공정에 효과적인 대응을 하기 위해서는, 남한과 북한이 상호협조하여 남북공동대책위원회를 만드는 것이 필수적인데, 그런 노력이 남에서도 북에서도 사실상 전혀 없다.
 
 
 한국의 식민사대사학계가 더 큰 문제다
 한국사학계의 문제는 그 잘못된 뿌리가 너무 깊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적어도 우리나라가 통일될 때까지는 제정신을 가진 민족자주사학이 국사학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현재 남쪽엔 사대식민사학이 지배하는 실정이고 북쪽은 유물계급사관이 판치는 형국이다.
 
 국사편찬위원회에도 자주사학자가 드물며, 한국학중앙연구원에도 한·중 역사전쟁이 불붙은 2004년도까지 고구려를 전공한 박사가 1명도 없는 실정이었으며, 한국 전체에서 고구려사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 단 3명에 불과했다. 중국 측이 1970년대에 발해사를 침탈할 때도 우리정부나 강단 사대식민학계에서 아무런 대응이 없었고, 이제 중국이 고구려사에 이어 고조선사, 부여사, 백제사, 고려사를 침탈해 와도 사대식민사학계는 매국사학의 꿀 먹은 벙어리다.
 
 더 큰 문제는 한국 강단의 사대식민사학자들의 기본논리는 나라역사 5천년을 통채로 중국에 바치기 좋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실상을 보면 사대식민사학자들은 우리나라 최초 민족국가인 2천여 년의 단군조선을 잘 인정하지 않고, 사실이 아닌 중국 동래(東來)의 기자조선은 인정한다. 또한 진시황이 대동강까지 지배했으며, 요동·요서지방에 있던 한사군을 이병도설에 따라 한반도에 있는 것으로 보고, 중국이 고양씨(황제의 손자)의 후손에 의해 건국되었다고 주장하는 고구려와 백제가 중국에 조공을 바쳤다고 한다. 또한 사대식민사학자들은 남쪽에는 신라·북쪽에는 발해가 함께 있던 남북국시대도 잘 인정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고려 건국의 태조 왕건도 중국에서는 중국 쪽의 낙랑군 후손이라 하여 중국 속방이라 하는데, 한국사대식민사학자들은 지금까지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 이성계가 세운 조선왕조는 억불숭유정책으로 본래 중국 속방으로 자처해 왔다. 그러면 한민족국가 역사 5천년 가운데 해방 후 50여년만이 한국의 자주국사로 남게 된다. 이들이 아무리 실증사학을 내세운다 하더라도, 이를 어찌 양심이 있고 애국심이 있는 사람들이라 하리오? 중국의 시선(詩仙) 이태백도 시문집 『옥진총담』에서 발해를 고려(고구려 이칭)라고 부르며 한민족 독자적 국가라고 썼는데, 우리학자들의 태도는 이렇게 해괴할 수 있는가?
 
 
 민족혼을 되찾아야
 나는 구한말에 애국자가 많았는데도 우리나라가 망한 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이 나라가 돌아가는 것을 보니 이해가 간다. 진실에 기초한 민족자주사학을 한국 사학자들이 외면하고 사회 곳곳이 분열되어 허위와 사기가 판을 치니 이 어찌 총체적 위기가 아니리오?
 
 더군다나 북한 핵실험 이후 국론은 극도로 분열되고 또한 한반도를 둘러싼 미·일·중·러 4대강국의 국제정세도 심상치 않다. 여기서 우리는 심기일전하여 단합하고 위기를 호기로 꼭 바꿔야 한다.
 
 우리 국민은 모두 남북통일에 대비하여 정체성을 확립하고 자주국사와 홍익인간 광화세계를 바탕으로 민족혼을 되찾아 국학을 굳건히 확립하여야 할 것이다.
 

 

 

출처 : ■한반도의 비밀■  |  글쓴이 : ■한반도의비밀■ 원글보기

반기문 외무부 장관이 이번에 UN사무총장으로 선출되셨지요.

UN사무총장은 국제연합의 수장으로서 일명 ‘세계 대통령’이라 불릴 만큼 중요한 직책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사무총장을 맡게 된 것은 큰 경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반기문 사무총장께 삼족오 문양이 들어간 직인이 증정된다고 해서 화제를 모으고 있습니다.

 

최근에 주요 공중파 방송에서 고구려 시대를 배경으로 한민족의 역사의 뿌리를 찾는 역사드라마를 방영하고 있는데,

하나같이 고구려의 상징, 마스코드로 각각 삼족오를 내걸었습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삼족오를 보면서 뭔가 가슴 뿌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이번 반 사무총장님의 삼족오 직인은 그 아름다움으로도 우리의 마음을 한껏 고취시켜주고 있습니다.

삼족오에 대한 관심은 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한 반작용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민족의 상징을 다시 찾기 위한 대다수 대한민국 백성들의 내면 의식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는 듯합니다.

 

지난 11월 15일 경기도 구리시에서 펼쳐진 ‘2006 고구려 삼족오대축제’에서

윤명철 동국대 교수는 “삼족오는 우리 민족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음에도 그동안 잊혀졌다”면서 “이제라도 삼족오를 현대적으로 재해석, 향후 민족을 끌어나갈 이데올로기 창출에 활용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윤교수님의 말씀대로 이제부터라도 삼족오의 참의미에 대해서 다시 깊이 생각해보면서,

한민족 정신의 시원을 이루고 있는 고대 한민족의 심원한 정신세계에 대해 알게 되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듯합니다.

삼족오는 고구려 쌍영총, 각저총, 덕흥리 1호·2호 고분을 비롯한 수많은 고분에 그려져 있는 고구려의 대표 상징입니다.

 

대표적인 삼족오의 문양은 태양같이 커다란 붉은 원 속에 다리가 셋달린 까마귀, 즉 삼족오가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삼족오는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청자와 불화 등 여러 곳에서 눈에 띄지만, 성리학적 사고가 팽배했던 조선시대에 들어 거의 사라졌습니다.

이 삼족오를 잃어버린 것은 고구려를 잊고, 나아가 우리민족의 뿌리를 단절시키는 역사왜곡의 과정과 그 길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환단고기』 『단군세기』에는 8세 단군 우서한이 재위 중이던 갑인7년(BCE 1987)에 “세 발 달린 까마귀가 날아와 대궐 뜰 안으로 들어왔는데 날개넓이가 석자나 되었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기원전후 시기에 삼족오는 옛 고구려 영토를 비롯한 산동지방과 요령지방 일대 고분벽화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됩니다.

고구려 벽화에서 보면 태양 속에는 삼족오가 있고 달 안에는 두꺼비, 혹은 방아 찧는 토끼가 그려져 있습니다.

삼족오는 태양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유엔 사무총장 직인”


전각 예술가 고암 정병례씨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게 헌정하기 위해 삼족오를 주제로 만든 전각.

[연합뉴스]


그렇다면 고구려인들이 삼족오를 그리고 바라보면서 마음에 되새기는 바는 무엇이었을까요?

삼족오를 단순히 그 형체의 아름다움이나 신비로움 때문에 숭앙하기보다는,

그 본질적인 의미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왜 삼족오가 태양 속에 있으며,

다리는 세 개이어야 하는가?

왜 하필 불길한 새로 인식되는 까마귀인가?

이것은 고구려인들의 삶의 철학, 신앙의 근본이념이 담겨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뜻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삼족오의 참의미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삼족오의 다리가 세 개인 것은,

‘삼신’이라는 하느님의 명칭에 3이 들어가 있듯이 모든 것이 3수(數)로 변화한다는 한민족의 우주철학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천부경에 대해 들어보신 분이 많을 것인데,

천부경에는 한민족의 3수 철학의 정수가 녹아있습니다.

천부경은 ‘환국구전지서(桓國口傳之書)’라 하여 환국 때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한민족의 우주 철학과 그 총결론이 쓰인 비결서입니다.

까마귀는 몸이 검습니다.

그래서 현조(玄鳥)라 불리기도 합니다.

검은색은 음양오행에서 북방의 통일된 물, 생명의 뿌리를 상징합니다.

모든 생명은 뿌리가 굳건해야 오래갈 수 있습니다.

몸이 검은 까마귀를 택한 것은 고구려의 뿌리되는 고조선과 환국, 배달의 정신을 깊이 되새긴다는 뜻이 담겨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고구려 조의선인이 검은옷을 입었던 것도 아마 같은 이유일 것입니다.

한편 삼족오를 둘러싼 커다란 붉은 태양은 우주만물에 생명을 부여해주는 생명의 대광명이며,

진리를 밝혀주는 태양입니다.

태양 속에 있는 까마귀는 진리의 광명을 인간에게 전해주는 메신저를 의미합니다.

그리스신화에서도 태양신 아폴론의 사자가 까마귀로 되어 있습니다.

고구려인들이 태양 속의 삼족오를 그린 것은 삼신하느님의 도법을 체득하여 밝고 순수한 생명정신으로 살고자 하는 정신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까마귀가 흉조로 둔갑한 것은 조선 이후 유교의 중화주의에 물들어 고구려인들의 신교 문화의 본질을 잃어버린 까닭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기문 사무총장께서 전세계를 향한 문서에 삼족오 직인을 찍어 내려 보내는 것은 우리 역사를 세계에 널리 알리고,

한민족의 참 번지수를 찾는 것이라 생각되어 매우 기쁩니다.

 

오늘 다시 한번 반기문 사무총장님의 당선을 축하드립니다.

 

출처:개벽실제상황홈페이지   글쓴이: 나의택


 
정주호 _ 서울 광화문


 
지금 우리나라에는 고구려 열풍이 거세게 불고 있다.

2년 전 중국의 동북공정을 계기로 크게 높아진 고구려에 대한 관심에 미디어가 합세하면서 엄청난 시너지 효과가 발생한 것이다.

현재 인터넷 쇼핑몰에는 100여 가지가 넘는 고구려 관련 상품이 검색되며,

이동통신사에서는 고구려 관련 요금제를,

인터넷 강의 업체에서는 고구려 패키지 강좌를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관심과 열풍은 대개‘물건을 잘 팔기 위한’상업적 활용에 그치고 있을 뿐,

정작 알고 보면 우리가‘고구려’에 대해서 몰랐던 것, 잘못 알고 있던 사실들이 적지 않다.

 

우리는‘주몽’과‘삼족오’에 열광하고‘동북공정’에 분노하기 이전에 고구려에 대해서 먼저 제대로 알아야 한다.
이 글에서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꼭 알아두어야 할 고구려 역사 상식 몇 가지를 소개한다.
 
 
 ‘고려’는 ‘고구려’다?


만주에는 고려성(高麗城), 고려묘(高麗墓), 고려방(高麗房)과 같은 지명이나 유적이 많다.

헌데 잘 알다시피 왕건이 세운 고려의 영토는 압록강을 넘지 않는다.

그렇다면 만주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고려라는 이름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만주지방에 등장하는 ‘고려’는 다름 아닌 ‘고구려’를 일컫는 말이다.
 
사서들을 살펴보면 『삼국사기』에만 유독 고구려란 이름이 고집스럽게 등장한다.

그 영향으로 우리가 배운 국사교과서는 모두 고구려라는 표기를 통일해서 쓰고 있다.

하지만 중국 사서를 보면 고구려와 고려가 동시에 쓰이고 있으며,

일본 사서는 고려라고 만 쓰고 있다.

『삼국유사』에도 고구려라는 기록은 7번, 고려라는 기록은 70번이 나온다.
 
한편 고구려인들이 남긴 유적이나 유물에서는 어떻게 기록되고 있을까?

1979년 충주에서 발견된 중원고구려비는 더욱 분명한 해답을 내려주고 있다.

이 비는 장수태왕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비문 첫 줄에 ‘5월중 고려태왕(五月中 高麗太王)’이라는 구절이 새겨져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중원고구려비가 세워진 시기에 고구려인들은 고려라는 국명을 썼다는 말이 된다.

이 외에도 ‘연가7년명불상(延嘉七年銘佛像)’의 광배에도 고려란 이름이 등장해 ‘고려=고구려’임을 입증해 주고 있다.
 
정신문화연구원의 정구복 교수는 오랜 연구 끝에 ‘고구려’라는 국호는 장수왕 10년대에 ‘고려’로 고쳐져 말기에는 완전히 고려로 칭해졌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왕건이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지은 고려라는 국명도 당시 고구려가 고려로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고려를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 된다.
 
이제 중국땅을 가서 고려라는 이름을 접하게 된다면 ‘고려=고구려’임을 꼭 기억하자.
 
 
 광개토대왕인가? 광개토태왕인가?


고구려 19대 왕으로 22년 동안 고구려를 통치한 광개토태왕을 부르는 호칭은 나라나 학자마다 다르다. 일본이나 중국 학자들은 ‘호태왕(好太王)’이라 부르고,

우리 나라와 일본 학자들 사이에서 자주 쓰이는 것으로 ‘광개토왕(廣開土王)’이라는 표현도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쓰이는 것은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이라는 표기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정확한 표현일까?


광개토태왕비문에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긴 시호가 나온다.

광개토태왕릉에서 나온 벽돌에도 ‘태왕’이라는 칭호가 나오고,

중원고구려비에도 분명히 같은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

여기서 공통된 호칭을 찾아보면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이다.

그러나 ‘대왕(大王)’이라는 칭호는 어느 유적에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삼국사기』에 김부식 등 사대주의 학자들이 중국에 대해 스스로 자신을 낮추기 위해서 태왕이란 호칭을 쓰지 않고 왕이라 썼던 것이다.
 
고구려는 광개토태왕비에 태왕이라는 호칭이 등장하고 있고,

신라는 전성기인 신라의 진흥왕순수비에 진흥태왕이라는 말이 나온다.

장수왕이 세운 중원고구려비 역시 태왕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세 왕은 모두 활발한 정복활동을 통해 주변 국가를 복속하거나 합병하는 등 뚜렷한 업적을 남긴 공통점을 갖고 있다.

밖으로 뻗어 나가며 제국의 질서를 구축한 왕에게 ‘태왕(太王)’이라는 호칭을 붙였던 것이다.

 

당시 태왕은 중국의 천자나 황제와 같은 반열의 제국의 군주를 칭하는 보편적 용어였고,

따라서 광개토대왕도 마땅히 ‘광개토태왕’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른 호칭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제부터라도 민족의 자긍심을 살리고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서 광개토태왕의 바른 이름을 되찾아주자.
 
 
 고구려는 당당한 천손국가(天孫國家)였다


고구려는 하늘의 아들임을 표방한 천손국가였다.

 

대표적으로 광개토태왕비의 비문에도 시조 추모(주몽)를 “하느님의 아들(天帝之子)”이라고 기록한 대목이 나온다.

중국의 황제들은 자신만이 하늘의 아들이고 주변 국가는 모두 그 천자의 신하라 해서 ‘천자’라는 단어의 사용을 엄격하게 금했지만,

고구려는 스스로를 당당히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표방했던 것이다.
 
이를 뒷받침해 주는 또 하나의 증표는 독자적인 연호의 사용이다.

‘연호’란 임금이 자리에 오른 해에 짓는 칭호로,

중국의 각 왕조는 천자 국가를 자임하며 독자적인 연호를 썼다.

반면에 주변 나라들은 제후 국가로 규정하여 독자적인 연호를 쓰지 못하게 하고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도록 강요했는데,

 

고구려는 이에 굴하지 않고 떳떳이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던 것이다.
 
 
 
 
고구려가 독자적인 천하관을 유지했다는 것은 천제(天祭)문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중국은 자신만이 하늘의 아들(天子)로서 천제를 지낼 수 있다고 규정하고,

주변 제후국은 제후들의 부모인 종묘(宗廟)와 땅과 농사의 신인 사직(社稷)에만 제사지내도록 허용했다.

하지만 고구려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제의식이 엄연히 거행돼 왔고,

그것을 이름하여 ‘동맹’이라 불렀다.
 
 
 고구려인은 거친 무인(武人)들?
고구려 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강인함과 용맹성을 바탕으로 한 ‘상무정신(尙武精神)’의 기질이다.

그러나 고구려인들이 용맹했을 뿐 아니라 매우 수준 높은 문화민족이었음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고구려인들이 남긴 90여 기가 넘는 고분벽화들.

 

그 벽화들은 고구려인들이 얼마나 우수한 선진문화를 꽃피웠는지 잘 보여준다.
 
우선 고구려인들은 노래와 춤을 즐긴 사람들이었다.

온 나라 온 마을에서 해가 지면 남녀가 모여 노래하고 춤을 추었으며,

노래와 춤을 즐기다 보니 음악 형태도 다양해지고 자연스럽게 악기도 발전하였다.

벽화에는 합창단과 탈춤, 북춤, 칼춤 등 다양한 춤 형식이 나타나며,

타악기와 관악기 등 벽화에 나오는 악기만 해도 24종이나 된다.
 
또 벽화에 나타난 여인들의 의상과 장신구, 평상과 밥상 등의 뛰어난 공예술, 갖가지 천장과 다양한 고임, 기둥과 두공에서 볼 수 있는 예술적 건축술, 그리고 벽화 자체가 웅변으로 증명해 주는 그림 솜씨, 이들은 모두 고구려인들의 섬세하면서도 힘찬 예술적 창조력을 유감없이 보여 주는 예들이다.
 
고구려인들의 과학적 생활은 천문학이 대변한다.

화성(熒惑)이 전갈자리 시그마별(心性)에 머물렀다”(유리왕 13년)고

정확하게 관측할 만큼 고구려의 천문학은 다른 영역 못지 않게 발달하였다.
 
그리고 고구려인은 높은 정신세계를 추구하였는데

음양사상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해와 달 그림이 그려진 벽화가 24기나 되고,

보살도 사신도와 온갖 신선들 그리고 불사조 삼족오 등 유·불·선의 세계를 모두 섭렵한 고구려의 현묘지도가 벽화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이상으로 고구려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몇 토막 소개했다.

하지만 사실 고대사는 사료의 절대적 부족으로 인해 역사의 실체를 정확히 규명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그런 모순된 기록들이 혼란을 준다고 해서 역사의 진리가 변하고 진실이 흔들리는 것은 아니다. 누가 뭐래도 고구려는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역사이며,

그 유산도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우리가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진다면 잊혀진 역사를 반드시 되살리고,

빼앗긴 역사를 되찾아 올 날도 머지않을 것이다.
 
 <참고문헌>
 서길수,『 고구려유적답사』홀본·국내성 편, 사계절, 2000
 증산도 편집부,『 9천년 역사의 뿌리를 찾아서』, 대원출판, 2000
 MBC <느낌표> 홍보책자,『 깨어나라 고구려의 후예들이여!』, KTF 후원, 2006

 
 


세 발 달린 까마귀의 진실


지난 1999년 김대중 정부시절에 만든‘3호 봉황국새’에 금이 갔다는 감사원의 발표 이후 국민들 사이에는 차기 국새의 손잡이에 삼족오(三足烏)를 새기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다지 예쁘지도 용이나 봉황처럼 화려한 멋도 없는 삼족오이지만 고구려 열풍 속에 삼족오는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얼마 전 방영된 주몽에서도 ‘주몽은 새로운 나라를 세울 것이다. 삼족오의 나라를…’ 이라는 의미심장한 대사가 등장했다.
이 대사처럼 최근 드라마에서도 고구려를 대표하는 상징물로 삼족오가 자주 등장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과연 삼족오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삼족오는 ‘오(烏)’를 ‘까마귀’로 해석하느냐 ‘검다’는 의미로해석하느냐에 따라서 그 해석이 조금 달라진다.


하지만 어떻게 해석을 하든 공통점은 ‘태양 안에 사는 세 발 달린 검은 새’라는 점이다.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 의미를 분석해보자.


첫째, 삼족오는 태양(광명)숭배의 원 뿌리로서, 동아시아 천자국의 상징으로 천손(天孫:하늘백성)의식을 갖고 있던 한민족 고유의 상징이다.


둘째, 하나의 몸통에 달려 있는 3개의 발은 우리 민족이 고대로부터 모시던 삼신하나님의 삼신일체(三神一體) 사상을 이 땅에 구현하겠다는 철학을 담고 있으며,

또 검은 색은 오행에서 수(水)를 상징하며 생명과 역사의 근원을 의미한다.

 
즉, 우리 민족이 인류 태초 문명의 시원국임을 상징화한 것이다.

 
 

월간개벽 2006.11월호


출처 : ■한반도의 비밀■  |  글쓴이 : ■한반도의비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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