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X파일] 고구려의 부흥을 꿈꾸었던 대진국大震國 |
이날을 계기로 우리 민족의 주 활동 공간이 만주대륙에서 한반도로 축소되고, 간도수2) 실현의 역사 시대가 실질적으로 시작된 날이기도 하다. 배달국 이후 우리 민족의 주 활동 무대였던 만주대륙은 대진국 멸망 후 우리 역사 속에서 점차 사라져 갔다. 그 땅뿐 아니라 그 얼과 인물들까지도…. 우리 역사에서 잊혀진 제국, 대진국에 대해 알아보자. 당시 서압록하(지금의 요하)를 지키던 진국장군 대중상은 패망한 고구려 유민을 모아 동쪽 동모산에 이르렀다. 고구려의 옛 땅 회복을 자신의 천명이라 여겼던 대중상이 699년 5월 붕어한 뒤, 태자였던 대조영이 뒤를 잇게 된다. 기존 사서에서는 대중상의 붕어 전 해인 698년에 대진국이 건국된 것으로 전부 기록하고 있다. 대조영은 군사 십만을 양성하였는데, 말갈 장수 걸사비우와 거란 장수 이진영과 손을 잡고 이해고의 당 정예군을 천문령에서 격파하였다. 즉 나머지 고구려의 전 영역에서는 활발하게 고구려의 부활을 위한 움직임들이 있었고 그 결정체가 바로 대진국의 건국인 것이다. 669년부터 국제정세는 당에게 불리하게 진행되었다. 토번의 당 서쪽 국경의 기습, 돌궐의 재건 등은 새로 건국된 대진국에게는 별 어려움 없이 국력을 축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대진국의 본격적인 진출은 2대 광종 무황제 때 대장 장문휴의 등주 기습에서 시작된다. 견디다 못한 당현종은 대조영에게 ‘발해군왕’이라는 이름을 내리며 평화협정을 맺는다. 대조영은 ‘발해’라는 이름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후세에 사대주의 사학자들이 대진국을 ‘발해’라 쓰면서 지금까지 ‘발해’라 부르고 있는데, 우리는 마땅히‘대진국’이라 불러야 한다.
『속일본기』에 의하면 대진국의 광종 무황제 대흠무가 일본에 국서를 전할 때 자신을 ‘고려3)국왕’이라 칭한 사실이 나온다. 그리고 일본국이 대진국에 보내는 회답서 또한 대진국을 ‘고려’라 하였으며, 대진국의 사신들도 ‘견고려사(遣高麗使)’라 하였다. 중국의 사서에도 도처에 대진국과 고구려가 일치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천손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삼신 상제님께 천제를 올렸으며, 고구려 건축물과 동일한 형태를 한 대진국의 온돌의 존재와 형태는 대진국이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입증하는 중요한 증거로 꼽히고 있다. 이는 고구려 전성기의 1.5배~2배, 후신라의 4~5배, 한반도의 2~3배의 강역으로 칭제건원과 상제님에 대한 천제의식으로 천자국임을 내외에 공표하고 천하의 중심 고구려의 부활임을 내세웠다. 당, 일본, 신라, 거란 등이 두려워하며 복종하였고 주변으로부터 조공을 받으며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흠송 받았다.
고구려의 국통을 이어 광대한 제국을 건설했던 대진국은 9세기 후반 통치력이 크게 약화된 것으로 보인다. 거란 태조 야율아보기의 흥기는 대진국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다. 야율아보기는 정복군주로서 중국대륙으로의 진출을 목표로 삼았다. 유목민족이 갑자기 성장하게 되면 국가유지 비용충당을 위해 중국을 공략하는 것은 상례였고, 후방의 안전을 위해 우리 민족과는 늘 숙명적인 대결을 벌여야 했다. 925년 겨울, 야율아보기는 대진국 원정을 단행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정월 대진국 수도 홀한성이 함락되었다. 지금까지는 『요사(遼史)』의 기록에 따라 내분에 의해 자멸했다고 말해 왔다. 하지만 요사는 전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에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그리고 1990년 일본의 마치다 히로시 교수는 「백두산 화산 폭발과 그 환경적 영향」이란 논문에서 대진국의 멸망이 백두산의 화산폭발 때문이라는 가설을 내세우기도 했다. 주변국가와의 교류를 지속적으로 추진하면서 압박해 오는 거란군의 침입에 대응을 하였던 것이 밝혀진 만큼 대진국의 멸망에 대해 좀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아직까지 사학계에서는 대진국의 건국주체 세력이 누구인지 분명한 결론이 없다. 중국의 대표적인 사서인 『구당서』에서는 대조영의 출신성분을 고려별종이라 하여 고구려유민으로 말하고, 『신당서』에서는 속말말갈이라 하여 귀부된 고구려인으로 잡고 있다. 서로 상반된 기록들은 후대인들에 많은 혼란을 가져왔고 그 정체성마저도 의심받게 만들었다. 『삼국유사』에서는 말갈 발해전이라 하여 말갈을 우리 역사에 편입시키면서 대진국의 건국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즉 말갈을 우리와 전혀 다른 족속이라 여기게 된다면 대진국 건국주체는 이질적으로 변할 수 있지만, 말갈인이 우리와 같은 족속인 것이 밝혀진다면, 그런 논의 자체가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말갈(靺鞨)이라는 것은 물길(勿吉), 원래 물가라는 뜻이다. 송하강 강변에서 살던 사람을 말갈족이라 불렀던 것이다.
그 민족적 계통의식이나 정치적 의미, 인적 구성, 문화적인 일체 감등에서 보면 한민족사에서 면면히 내려오는 신교문화의 종주를 이룬다. 조선 후기 유득공이 『발해고』 서문에서 삼국시대에 이어 남북국시대를 처음 기술함으로써 대진국 역사를 기술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유득공은 “고려가 발해사를 편찬하지 않았으니…. 북쪽은 대씨가 차지했으니 곧 발해다. 이것이 남북국이니 남북국사가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삼국사기』에서도 대진국의 건국 및 자세한 역사기술은 빠져있다. 『삼국유사』에도 말갈 발해전에서 간단히 언급하는 정도이다. 그래서 두만강 북쪽과 압록강 서쪽이 누구의 땅인지 알지 못하게 됐다. 많지 않은 대진국 관련 기록과 그 기록의 애매함으로 대진국의 정체성이 왜곡되어 온 것이다. 우리 역사에 대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가장 잘 알아야 함에도 그 관심은 너무나 일천하다. 후손들의 애정과 관심을 받지 못하는 역사는 역사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고구려는 그 후 20년 만에 너무나 허망하게 멸망하고 말았다. 패망한 고구려 유민의 망국의 한을 딛고, 역사의 황무지 위에 고구려의 부흥을 꿈꾸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칭송을 받은 대진국이 건설되었다. 하지만 그 대진국이 우리 역사에서 조차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거기다 지금은 중국의 손에 의해 철저하게 왜곡되고 있다. 대조영이 꿈꾸었던 고구려 부흥의 에너지가 우리 내부에도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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