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년 한국 스포츠, 눈물과 땀으로 이룬 발전 


태극기 대신 일장기를 달고 뛰어야 했던 손기정의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제패는 한국 스포츠사에 아픔이었다. 


1945년 광복은 한국 스포츠의 새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일제 치하에서 움츠러들었던 스포츠는 광복과 함께 다시 기지개를 폈다. 

이후 전쟁과 빈곤의 그늘 속에서도 면면히 이어져왔다. 


70년이 흐른 지금 한국은 엘리트 스포츠 강국이자 프로스포츠를 즐기고 생활 속에서 운동을 즐기는 스포츠 천국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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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광복과 함께 조선체육회를 재건했다. 


1938년, 일제의 강제 해산으로 문을 닫았던 한국 스포츠는 다시 일어섰다. 

그해 10월27일 자유해방 경축 전국종합경기대회(제26회 전국체육대회)를 개최했다. 

남북한 모두가 참가한 이 대회에서는 육상, 야구, 축구 등 10개 종목에서 4100여명의 선수가 기량을 겨뤘다. 올림픽 정상에 오르고도 슬퍼했던 손기정은 이 대회에서 기수로서 태극기를 흔들며 감격에 젖었다.


한국은 1948년 올림픽(런던)에 처음 출전했고, 역도 김성집과 복싱 한수인이 각각 동메달을 따내며 처음 태극기를 달고 올림픽 시상대에 섰다. 

마침내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레슬링의 양정모가 올림픽 첫 금메달을 따내 애국가를 울렸다. 


1984년 LA 올림픽에서는 6개의 금메달을 따내 사상 처음 세계 10위에 진입했다.

한국 스포츠는 1980년대 초반 군사정권의 정책적인 지원 속에 프로야구와 프로축구 등 프로스포츠가 탄생하면서 외형적으로 크게 성장했다. 

프로야구가 출범한 1982년에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숙적 일본을 누르고 사상 첫 금메달을 따냈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 올림픽은 한국의 위상을 세계에 알리고 한국 엘리트 스포츠의 힘을 과시하는 계기가 됐다. 

한국은 당시 금메달 12개를 포함해 모두 33개의 메달을 획득해 올림픽 사상 처음 4위를 차지하는 쾌거를 이뤘다.


1990년 남북 통일축구가 열렸고, 1991년 축구와 탁구에서 남북 단일팀을 구성해 세계대회에 참가하면서 스포츠는 남북 화해의 분위기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92년 황영조가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따내며 손기정 이후 한국 마라톤의 힘을 다시 한 번 세계에 떨쳤다.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 속에서 박찬호와 박세리 등 미국 프로무대를 누비는 선수들의 선전은 국민들에게 큰 위안과 희망이 됐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은 또 한 번 전 세계에 대한민국의 국력과 스포츠 열기를 과시했다, 

한국 축구는 사상 첫 4강이란 놀라운 성적과 길거리 응원이란 새로운 문화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동계올림픽에서도 눈부신 발전을 이뤘다. 

1948년 제5회 생모리츠 대회 때 3명의 선수가 처음 출전한 한국은 2010년 밴쿠버 올림픽에서 모두 14개의 메달을 따내며 세계 5위로 올라섰다. 


김연아는 밴쿠버에서 한국 피겨사상 첫 금메달의 영광을 안겨줬다.


강원 평창은 ‘3수’ 끝에 2018 동계올림픽을 유치했다. 


한국 스포츠는 광복 이후 눈부신 경제 성장의 속도와 발을 맞춰 빠르게 발전해 왔다. 

이제 엘리트 스포츠와 생활 스포츠가 조화를 이룬 새로운 통합체육회 탄생을 앞두고 또 다른 도약을 꿈꾼다.


<양승남 기자 ysn9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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