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발견돼 주목받은 조선 초기 부부 미라 '학봉장군'과 '학봉부인'의 사망연령·연도·원인, 생활양식, 생존시 질환 등을 거의 완벽하게 규명한 연구 결과가 30일 공개됐다.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정광호 씨의 '학봉장군 부부미라의 고병리학적 분석' 논문을 보면 조선 초 이들 부부의 삶의 모습이 생생하게 재연돼 있다. 부부 미라의 연구 결과가 발표된 건 아시아에서 처음이다.
약 600년 전 숨진 학봉장군 부부 미라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기록됐으며,
발견 당시 김한겸 고려대 교수가 기관지 등 장기를 내시경으로 관찰해 화제가 됐다.
세종 2년인 1420년 전후 사대부 가문에서 태어난 학봉장군은 167.7㎝ 키에 턱수염과 콧수염이 발달한 외모였다. 1410년대 후반 출생의 여성과 결혼하고서 육류와 채소가 골고루 차려진 균형 잡힌 식사를 했고,
하인들이 잡아 온 민물고기를 날로 즐겨 먹었다. 마을은 소나무, 참나무, 팽나무가 울창하고 국화와 부들류 꽃이 필 정도로 경치가 좋았다.
부부가 함께 늙어간 탓에 남편의 수염과 아내의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해졌다. 그러다 남편은 중증 폐질환을 앓았다.
기관지 확장증으로 추정되는 병을 고치고자 각혈 지혈에 효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포황(애기부들 꽃가루)'을 자주 달여서 먹었다. 하지만 42세(추정) 때인 1460년대 초반 겨울에 학봉장군은 아내를 뒤로하고 저세상으로 떠났다.
아내는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서 10년을 채 못 살고 53세(추정)되던 1470년께 눈을 감았다.
자식들은 아버지 무덤에 어머니를 함께 묻었다.
정씨가 당시 생활상을 이처럼 생생하게 재연할 수 있었던 것은 현대 과학 덕분이었다.
미라를 손상할 수 있는 부검 대신에 X선·CT·MRI 등 영상의학적 검사와 내시경·화분 검사, 방사성 탄소연대측정법, 치아 교모도 분석법 등을 통해 2년여 연구한 끝에 600년간 지속된 비밀을 풀 수 있었던 것이다. 세균배양·중금속 함량·유전자 검사 등도 비밀의 문을 여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사망 당시 연령은 남은 치아를 3차원 사진으로 재구성해 분석·추정했고,
사망연도는 탄소연대측정과 족보 분석에서 나온 결과를 종합해 이끌어냈다. 부부의 장기 조직에서는 민물고기 회를 통해 감염되는 기생충인 간흡충란, 편충란이 다량 발견됐고, 장 내용물에는 육류·채소류가 고루 남아 있었다.
고대 미라에서 간디스토마 충란이 확인된 건 이번이 처음이어서 기생충의 역사를 새로 쓰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학봉부인이 '렙토스피라증'에 감염된 걸로 볼 때 가축·야생동물 배설물에서 나오는 렙토스피라균에 감염돼 걸리는 이 병이 조선 초에도 있었던 사실을 알아낸 것도 소득이다.
학봉장군이 기관지 확장증을 앓다가 숨졌다는 사실은 몸에서 다량으로 나온 애기부들 꽃가루로부터 추론했다.
소나무, 국화 꽃가루도 몸 곳곳에 남아 있었다. 한방에서 부들류 화분이 지혈제로 쓰인다는 점을 고려하면 학봉장군은 많은 양의 출혈을 반복하는 폐쇄성 기도질환(기관지 확장증)을 앓았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논문은 결론지었다.
한국에 2대뿐인 탄소연대 측정기기가 때마침 모두 고장나 미라 조직표본을 뉴질랜드 지질핵과학연구소로 보내 수개월을 기다려야 했던 일화도 있다. 무덤과 관구조를 분석하다가 발견한 미세한 분리 흔적 등을 토대로 미라 발견 당시 알려진 것과 달리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고 아내가 뒤늦게 합장 됐다는 설명도 했다.
정씨는 "최근 한국에서 발견되기 시작한 미라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져 외형뿐 아니라 풍부한 자연과학적 자료를 제공할 내부 장기가 그대로 보존된 경우가 많다"며 미라 연구의 매력을 설명했다.
(서울=연합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