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에 감생이 떳다 


작가: 장호준 (aqualux199) 

 

        
  

       ▲ 울진큐젬초 (수심20m)

         문어를 촬영하기위해 사진 왼쪽 밑에 한 다이버가 열심히 카메라를 조작하고 있다. 

         ⓒ 장호준

 

이 세상 모든 탈 것에 멀미가 있다.

그중에서도 뱃멀미가 으뜸이다.

그 고통은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내 생애 처음으로 탔던 버스는 길가의 가로수가 뒤로 밀려 가던 모습과 멀미의 추억이 함께 남아 있다. 

고등학교 때 제주도로 가게 된 수학여행에서는

때마침 불어온 태풍 때문에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던지 멀미만 끝날 수 있다면

배가 물 속으로 들어가도 좋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16시간이 걸린 뱃길이었다.

 

마침 우리가 탄 제주행 목선에는 같은 목적으로 함께 탄 여고생들이 있었다.

얼마나 좋았겠는가.

우리들은 기대에 부풀었다.

그러나 멀미 앞에서 그것은 헛된 꿈이었다.

도처엔 여학생,남학생 할 것 없이 그들이 토해 놓은 오물과 신음소리 뿐이었다.

낭만이고 뭐고, 기대에 잔뜩 부풀었던 소년 소녀들의 마음은 태평양의 파도 속으로 모두 묻히고 말았다.

육체가 고달파지면 정신이 홀로 우뚝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다이빙을 하면서 피해 갈 수 없는 것이 멀미다.

다이버는 물 속으로 들어갈 때도 어지러움을 만난다.

물 속은 육지와는 달리 삼차원의 공간이동을 해야 한다.

전후좌우에 상하가 하나 더 붙는 것이다.

거기다가 귀의 압력균형을 맞추어야 한다.

더욱 어지러움에 노출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걱정할 것은 없다.

우리들의 몸은 신비하기가 우주와 같아서 배를 자꾸 타다 보면 멀미를 제 스스로가 조절한다.

간혹 이 마저 안 되는 사람도 있다.

그때는 도리가 없다.

스스로 멀미를 이기는 수밖에....
 
그렇게 멀미가 심하던 나 역시 배를 타는 횟수가 늘자 

나도 모르게 적응이 되었다.

한 번은 다이빙을 나갔다가 폭풍을 만나 고무보트를 타고 8시간을 표류했다.

망망대해, 집채 같은 파도, 그러나 멀미에는 시달리지 않았다.

오히려 신고를 받고 우리를 구조하러 온 배에 타고 있던 해경에서 파견한 어린병사는 선실로 들어가는 입구에 누워서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재는 왜 저래요?”

“멀미 때문에 저러지.”

배는 100톤짜리 꽁치잡이 배였다.

 

       
  

      ▲ 어렝놀래기 (수심 10미터)

        제주도 연안에서 산호 옆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고기이다. 

        ⓒ 장호준

 

 

민간에 다이빙이 퍼지기 시작한 시기는 1970년대 초였다.

물론 그 때의 다이빙 인구는 전국을 통 털어도 셀 수 있을 정도였다.
 
1970~80년대의 동해안 다이빙은 군사작전과 다름 없었다.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얼룩무늬 야전 잠바를 입은 현지 다이빙 숍 사장이

하늘같은 고객들에게 이것을 날라라, 저것 날라라, 이래라, 저래라....

훈련조교처럼 호령을 하던 시절이었다.

 

그들은 대개 특수부대 출신이었다.

하기야 그 시절엔 가령 태권도를 배워도 제 돈 내고 가서 체육관 청소하고,

선배 학원생에게 쥐어 터지던 시절이었으니까.

 

거기다가 장비는 열악하기 그지 없었다.


“70년대 전반에는 대구에 콤뿌(컴프레셔)가 어데 있선노,

없었다 아이가,

땡끄 들고 버스 타고 부산까지 가짠나.

그래 그거 한통 여어와 갖고도 혼자 몬쓰고 둘이 나나 �잔나,

그것도 서로 먼지 드러 갈끼라꼬 지랄하고 그랬제,

게이지도(공기잔량을 체크 하는 게이지) 업섰다 아이가,

그래가 먼저 들어간 놈이 좀 마니 있다 나오마 또 싸우고 그랬지 하하하.”

 

그 시절을 겪은 다이빙 1세대 선배 한 분이 들려 준 말이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30년 전의 일이다.

 

90년대 초반까지도 다이빙 숍의 장비는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제대로 격식을 갖춘 리조트도 아직 생기기 전이었다.

다이빙 숍에 대한 개념이 자리를 잡아 가던 시절이었다.

탱크를 제대로 실을 수 있는 배도 없었다.

어선을 용선해서 다이빙을 나가고는 했었으니까.

그래도 내가 다니던 울진의 한 숍에는 고무보트가 한 척 있었다.

용골이 부러져 물마루에 올라서면 배가 척척 꺾이곤 했지만,

특수부대출신인 숍의 사장은 “이래도 엔진은 존니더”라며 자랑하던 배였다.

 

잠수복을 입으면 온몸이 팽팽하게 조인다.

체온을 보호하기 위해 잠수복과 몸 사이에 물이 교통하지 못하도록 팽팽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잠수 모자를 쓰고 장비를 짊어지고, 

용골이 부러져 척척 꺾이는 보트의 뱃전에 줄을 잡고 앉아,

떨어지지 않으려고 용을 쓰며 포인트까지 이동하고 나면,

다이빙을 들어가기도 전에 온 몸은 땀으로 젖고 진이 다 빠져 버린다.

 

특수부대 출신인 숍의 사장은 성질도 급해서,

한 번은 초보다이버들이 바다에 떨어져서도 입수를 못해 버둥거리고 있자.

 “하이고 저래 가 무신 다이빙을 한다꼬, 지랄하네, 난 저런거 보마 허파가 디비져서…”라고 구시렁 구시렁.... 

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배 위에 탄 초보다이버들이 자신은 절대 저런 말을 듣지 않아야겠다는 결심을 한 탓에 바다에 떨어지자마자 입수에만 온 힘을 기울이고,

귀의 압력균형을 맞추는 걸 잊어 버렸다.

당연히 그는 고막이 나가버렸다.

그때 같이 간 우리 팀에 마침 이비인후과 의사가 한 분이 있어 뒷감당은 그분이 했었다.

 

        
  

        ▲ 열기 떼 (수심15m)

          동해 양포, 열기가 떼를 지어 몰려다니고 있다. 

          ⓒ 장호준

 

 

울진의 큐젬초는 그 꼭대기가 수면에서 2~3m이고 거기서 부터 수심 40m까지 내려가면서 곳곳에 기암괴석이 즐비하다.

그 사이 사이를 날아다니는 맛은 온갖 어려움을 충분히 보상해 주고도 남는다.

 

그런 곳이기에 “울진에 감생이(감성돔)가 떴다”라는 한 마디가 돌면 전국의 다이버들이 속속 모여든다.

기암괴석 사이를 떼 지어 다니는 감성돔을 보기 위해서이다.

그걸 카메라에 담기 위해서 대구에서 출발하면 울진까지는 4~5시간이 걸린다.

 

일요일 새벽 일찍 밥을 지어 먹고 집을 나서서 현장에 도착하면

마음은 추녀 끝에 불이 붙은 듯 급해진다.

서둘러 두 탕을 하고 나면 그날의 다이빙이 끝난다.

물 속에 머문 시간은 쭉 해야 1시간 남짓,

다시 5시간에 걸쳐 돌아 갈 생각을 하면 아쉬움은 더 크게 남는다.

그때는 하루 두 탕이 금과옥조처럼 통하고 있었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었고 오후가 되면 바다가 거칠어지기 때문이기도 했다.

 

시간이 가면서 우리는 하루 세 탕을 기본으로 깔게 되었다.

그러나 바다는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보트에서 떨어져 고개를 박지 않는 이상 그날의 시야가 얼마나 나오는지는 모른다.

바다의 속살을 보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바다가 매력적인 것이다.

언제나 내일을 남겨두기 때문이다.

“내일은 더 좋아지겠지…, 내일은.....”

인생도 마찬가지다.

내일이 훤히 보이는 인생이란 얼마나 끔찍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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