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빅만 잃어버린 15년… ‘제2의 홍콩’은 언제쯤?
미군, 80억 달러 인프라 남겨두고 떠났지만,
15년 동안 외국인 직접 투자 31억달러 그쳐,
정치 불안정·부정부패가 외자유치 걸림돌,
한진重 유치 등 ‘희망의 불씨’ 찾아 안간힘,
“수빅(Subic)은 전 세계에 잘 알려져 있긴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거론하지 않는 곳이 돼 버렸다.”
필리핀 수빅관리청(SBMA·Subic Bay Metropolitan Authority) 초대 청장을 지낸 고든(Richard Gordon) 상원의원은 이렇게 한탄했다.
필리핀 수도 마닐라 서북쪽으로 110㎞ 떨어진 수빅만(灣)은 전 세계인의 귀에 익은 이름이다.
그곳은 아시아의 대표적인 미(美) 해군기지였다.
1992년 필리핀 상원이 논란 끝에 미군 철수를 의결한 후,
이곳은 ‘수빅자유항지역(Subic freeport zone)’으로 이름을 바꿔 달았다.
그러나 이 이름을 기억하는 세계인은 별로 없다.
중국, 인도, 베트남 같은 필리핀의 경쟁국들이 상전벽해(桑田碧海)의 새 역사를 쓰는 동안 수빅은 정체의 늪에 빠져 있었다.
수빅 경제자유지역이 작년 8월까지 15년 동안 유치한 외국인 직접투자 금액은 31억 달러에 그쳤다.
수빅보다 출발이 2년이나 늦었던 중국 쑤저우(蘇州)공업원구(園區)는 이 기간 동안 231억 달러를 유치했다.
지정학적 요충지, 미군이 남긴 인프라, 영어를 구사하는 풍부한 인력….
성공의 조건이 훨씬 많아 보이는 수빅은 왜 실패하고 있는가.
그 실패를 연구했다.
■ 수빅, 15년 동안 외자 유치 31억 달러뿐
지난 5일 수빅자유항지역 입구에 들어서자 말끔하게 단장된 수빅관리청 청사가 눈에 들었다.
미 해군 군용기가 날아오르던 수빅 공항의 활주로엔 글로벌 물류회사 페덱스(Fedex)의 화물기가 분주히 움직였고,
대만의 컴퓨터 업체 에이서(Acer) 같은 외국 기업들의 간판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그러나 수빅항 컨테이너 터미널은 썰렁했고,
공터들로 곳곳이 황량했다.
경제자유지역으로서의 활력보다는 해변도시의 한가함이 묻어나는 풍경이었다.
15년 전 미군이 떠날 때, 수빅만은 ‘세계적인 자유 무역항, 제2의 홍콩 건설’이라는 구호를 의욕적으로 내세웠다.
출발 조건도 나쁘지 않았다.
미군은 80억 달러에 달하는 전력·통신·공항·항만 등 인프라를 남겨 두고 떠났다.
선박수리시설, 컨테이너하역시설, 원유저장고, 발전소 등 기반시설 외에 주택 호텔 등 편의시설들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필리핀 정부의 투자 유치 정책도 표면상으로는 적극적이었다.
수입관세 면제, 통관절차 간소화 같은 자유항의 기본 요건 외에 수출 기업에 대해서는 최대 8년간 법인세를 면제하고 이후에도 총 수익의 5%만 세금으로 내면 되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었다.
그렇지만 작년 8월까지 수빅의 투자유치 실적은 총 36억8700만 달러(SBMA 집계).
이 중 필리핀 자국 기업 투자 6억1300만 달러를 빼면 외자 유치 실적은 고작 31억 달러에도 미치지 못 한다.
고용효과도 기대 이하다.
작년 7월 기준으로 수빅경제자유지역에서 일하는 근로자 수는 6만1800명 수준에 불과하다.
미군 철수 당시 잃었던 4만명 수준의 일자리를 회복한 것도 2000년 들어서다.
수빅의 성적표를 중국의 대표적인 국가차원 공단인 쑤저우공업원구와 비교해보면 더욱 초라하다.
제대로 된 인프라가 거의 없었던 허허벌판에서 1994년 공사를 시작했던 쑤저우공업원구는 2005년 말까지 세계 500대 기업 53개를 포함한, 총 2000여 개의 외자기업과 231억 달러의 외자를 유치했다.
수빅이 15년 동안 끌어들인 외자가 쑤저우단지가 평균 2년 동안 유치한 자금보다 적다는 얘기다.
쑤저우 투자부서에는 지금 외자기업들이 줄줄이 몰려 들고 있지만,
수빅의 투자신청서는 공란으로 가득하다.
심지어 수빅 경제의 간판 같은 존재였던 페덱스조차 내년엔 중국 광저우(廣州)로 아·태지역본부를 이전할 예정이다.
대통령 직속기구인 수빅관리청의 아만드 아레자(Armand C. Arezza·36) 청장은 “사실 15년 동안의 성적표가 경쟁국들에 비해 신통치 않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며
“하지만 12억 인구의 중국 경제규모와 필리핀을 곧바로 비교하는 것은 무리”라고 말했다.
■ “문은 열되, 들어오지는 못하게 막은 꼴”
수빅을 탐구하면, 필리핀의 실패를 분석할 수 있다.
1992년 미군을 철수시키기로 결심한 것은 필리핀이 새로운 기회를 열어갈 수 있는 결단이었다.
수빅에서 나고 자라 18세 때부터 미군부대에서 일자리를 얻었던 트럭 운전기사 몬티놀라(Robert Montinola·42) 씨는 “그때는 미군이 떠나면 죽는 줄 알았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잘한 일인 것 같다”고 말했다.
4만 명의 실직, 매년 10억 달러의 경제적 손실을 의미했던 ‘미군 철수’도 감당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깊은 수심의 잔잔한 항구와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가진 수빅은 뛰어난 경제적 잠재력을 갖고 있다. 수빅뿐 아니라 필리핀 전체가 비행거리 3시간이면 아시아권 어디에든 도착할 수 있는 지정학적 위치에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노동력이 풍부하고,
미국식 자본주의 경험까지 갖춘 투자의 적지(適地)였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마르코스(Ferdinando Marcos) 장기 독재에 따른 정치 불안, 방만한 재정 운용으로 인한 재정 적자, 인프라 투자 부족, 부정부패에 의한 사회 활력 저하 등이 겹치면서 필리핀은 낙제생으로 전락했다.
마르코스가 물러난 이후에도 독재정권은 사라졌지만 정치적 불안정성은 더욱 심화됐고, 전략 부재, 실행력 부족으로 투자 환경은 별반 나아지지 못했다.
수빅이 미군을 철수시키던 당시 필리핀을 장악한 시대정신은 ‘민족주의’였다.
1986년 피플파워로 대통령에 취임한 코라손 아키노(Corazon Aquino) 정권의 필리핀 상원은 ‘민족 우선’이라는 정치적 논리와 ‘일자리와 돈’이라는 경제 논리 사이에서 치열한 논쟁을 벌이다 간발의 차이로 미군 철수를 의결했다.
민족주의 논리로 미군을 철수시키고, 경제자유지역이란 이름으로 문을 열었지만,
‘민족주의’는 외국인 투자를 가로막는 장벽으로 작용했다.
‘문은 열되, 들어오지는 못하게 막은 것과 다름없는 격’이었다.
지난 8일 마닐라 통상산업부 청사에서 만난 에르난데스(Elmer C. Hernandez) 통상산업부 차관 겸 필리핀 투자위원회(BOI·Board of Investments) 위원장은 “외국인은 필리핀의 풍부한 지하자원을 개발할 수 있는 광산업을 비롯해 거의 전 사업 분야에서 100%의 지분을 가질 수 있고, 세금 혜택도 뛰어나다”고 말했다.
그러나 외국인들이 느끼는 현실인식은 이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아키노 대통령 시절이던 1987년 개정된 필리핀 헌법에는 결과적으로 외국인의 투자를 제한하는 갖가지 독소조항이 들어 있다.
헌법 12조 ‘국가 경제와 자산’
1항에는 “국가는 외국의 불공정한 경쟁과 무역에 대해 필리핀 기업을 보호한다”,
2항에는 “공유지, 수(水)자원, 광물, 석탄, 석유, 어업자원, 임산자원 등을 모두 국가소유로 한다”고 돼 있다.
단지 기술적 필요나 재정적 지원에 있어 외국 기업이 대통령의 승인을 얻을 경우에만 투자할 수 있도록 했다.
이뿐 아니다.
12조 10항에는 이러한 국가적 자산에 대해 의회는 검증된 필리핀인들에게 특권을 줄 수 있다고까지 규정했다.
이런 조항들은 오랜 식민기간과 마르코스 대통령의 독재에 시달린 필리핀 국민들에게는 환호를, 외국인 투자자들에게는 우려를 안겨줬다.
외국인 투자를 가능하도록 규정한 필리핀 법률은 헌법의 이 같은 조항들 때문에 늘 위헌(違憲) 시비에 시달렸다.
에르난데스 위원장은 “위헌 관련 소송이 몇 건 있었지만 몇 년 전까지 대법원에서 외국인들의 지분 보유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다 결판이 났다”고 했다.
하지만 기업들에게는 법적 다툼의 소지 자체가 부담일 수밖에 없다.
글로리아 아로요(Gloria Aroyo) 현 대통령은 민족주의적 조항을 대폭 폐지하는 개헌 의지를 가지고는 있지만,
스스로가 카지노 관련 부패 스캔들에 연루되며 고초를 겪었고,
쿠데타설에 시달리는 등 개헌을 추진할 만한 정치적 안정을 이루지 못했다.
일관성 없는 정책, 부패, 정쟁에 의한 정정(政情) 불안은 필리핀 투자자들에게 항상 짐이 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마닐라 니노이아키노국제공항(NAIA)의 신(新)청사인 제3터미널 문제다.
기존 1, 2 터미널의 수용 능력이 턱없이 부족해 시작한 공항 신청사 건설사업은 독일 프라포트(Fraport) 사가 주도한 컨소시엄에 의해 2004년 거의 완공됐지만, 아직도 개장하지 못하고 있다.
라모스(Fidel Ramos) 대통령 시절 이뤄진 계약 변경 등을 문제 삼은 현 아로요 정부가 소유권 소송을 제기했고, 지루한 법정공방 끝에 필리핀 대법원은 현 정부의 손을 들어줬기 때문이다.
프라포트 사는 공항 운영권을 잃고, 필리핀 정부가 공사비로 내놓은 3억2000만 달러만 받고 물러서야 할 운명에 처했다.
마닐라의 한 한국 기업인은 “외국인들은 이 사례만 떠올리면 필리핀에 투자하는 걸 망설일 수밖에 없게 된다”고 말했다.
필리핀의 직접 외자 유치 실적을 보면 정치적 불안이 필리핀 외자유치에 얼마만큼 큰 걸림돌이 되는지 단번에 알 수 있다.
아로요 대통령이 재선(再選)돼 정치 안정이 이뤄졌던 2004년,
수빅을 비롯한 필리핀에는 가장 많은 외자가 밀려들었다.(표 참조)
그러나 아로요가 부패스캔들 등에 시달리자 외자 유치 실적은 다시 급감했다.
■ 희망의 씨앗 찾아나서는 필리핀
필리핀이 안고 있는 또 하나의 문제는 인재 유출이다.
작년 말 필리핀의 큰 이슈 중 하나는 간호사 자격 시험을 둘러싼 논쟁이었다.
간호사 국가 자격시험 문제가 지방의 한 도시에서 유출된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재시험을 치러야 한다는 측과, 결과를 인정해야 한다는 측이 맞서 큰 소동이 일었다.
아로요 대통령조차 재시험 고려 의사를 밝혔다가 번복하는 등 파장이 계속됐고,
이 문제는 연일 신문 1면 머리를 장식했다.
필리핀인들에게 간호사 시험은 ‘막막한 현실 탈출의 비상구’다.
이 시험에 합격하면 간호사 수입을 원하는 미국에 합법적으로 취업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필리핀의 의사들 조차 간호사 시험을 다시 치러 미국에 취업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필리핀의 주요 ‘수출산업’ 중 하나는 ‘인력수출’이다.
작년 필리핀 근로자들이 해외에 나가 고국으로 송금한 돈이 국내 총생산(GDP)의 10%가 넘는다는 통계가 나와 있다.
그만큼 필리핀 안에는 괜찮은 일자리가 부족하다.
최근 들어서 희망의 싹이 조금씩 돋아나고 있다.
지난 5월 필리핀이 중국을 제치고 미국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사로부터 10억 달러 규모의 생산기지 건설 투자유치에 성공했다.
최근에는 일본 도쿄전기와 마루베니 사로부터 40억 달러 규모의 투자유치에도 성공했다.
게다가 미국기업들의 콜센터 아웃소싱산업 유치 실적도 급격히 좋아지고 있다.
미국 기업의 단골 콜센터 아웃소싱 기지였던 인도가 급성장하면서 임금이 높아지자,
영어 소통 노동력이 많은 필리핀이 콜센터 기지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성장률도 상승하고 있다.
필리핀중앙은행 다킬라(Francisco G. Dakila) 서기관은 “올 1분기 성장률이 7.9%에 달해 우리도 놀랐다”고 말했다.
필리핀은 중국, 베트남, 인도 등 경쟁국들이 고속성장을 하는 와중에서도 늘 4~5%대의, 인플레이션보다 낮은 성장률을 기록해 왔다.
부유층 10%가 국부의 90%를 쥐고 있는데 성장은 정체하면서 빈부(貧富) 격차를 극복할 수 있는 기회조차 제공되지 못했던 지금까지의 상황과 비교하면 다분히 희망의 신호로 해석될 수 있다.
수빅도 달라지고 있다.
작년 수빅관리청장에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경영대학원(와튼스쿨) 출신인 30대의 아레자 청장이 부임하면서,
기업식 경영기법을 도입했다.
아레자 청장은 수빅 사상 최대규모인 한진중공업의 7억 달러 규모의 조선소 건설 프로젝트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사실 수빅은 한진중공업에 운명을 걸다시피 하고 있다.
아레자 청장은 “지금 수빅의 배후산업은 한진중공업이 볼트 너트까지 한국에서 실어와야 할 만큼 열악하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한진의 뒤를 따라 기계부품, 중공업 기업들이 밀려올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나갈 것”이라며, “수빅의 새 역사를 쓰는 작업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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